2012. 12. 30. 10;00
밤새도록 내린 눈은 순백의 세상을 만든다.
흰 눈은 쳐다만 봐도 마음이 정화가 된다.
흰 여백에 그림을 그려볼까?
창가에 서성대다 창문을 열고 카메라셔터를 누른다.
영하 10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강추위에 마스크를 끼고, 스패츠도 차고 완전무장을 하고 나선다.
원래 우리의 마음은 순백(純白)의 눈같이 밝고 맑으며 깨끗하다.
더러움은 우리의 진짜 마음이 아닌데도 선거 때문에 더러운 마음이 슬그머니 들어와
우리를 더럽혔다.
대통령 선거로 더러워진 세상을 덮으려 밤새 흰 눈은 내렸는가 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강아지는 출출한지 사라지고,
소나무 위에 동박새 재잘댄다.
무심히 흐르는 흰 구름이 내 마음이니,
저 하늘에 자유롭게 나는 새가 내 육체인 모양이다.
인간의 육신이나 지구상의 사물은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으로 이루어졌다지만,
적어도 오늘 만큼은 4개뿐만 아니라 눈(雪)도 같이 이루어졌다.
길 위에 내려앉은 풍경.
잠시 바람이 불어오고, 눈소리 바람소리 지나더니 나무 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유(雪有)의 땅.
숲길과 호수를 가득 채운 건 눈이다,
일 년을 기다려 찾아온 풍성한 눈.
누군가는 직선(直線)보다 곡선(曲線)이 아름답고 직선을 이긴다 하는데,
어느 곡선이 이 직선보다 아름다울까?
꿈결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살짝 부는 바람에 주먹만 한 눈 덩어리가 떨어지며 내 어깨를 친다.
흰 눈 속의 세상.
걷는 이 하나 없는 고요 속에 나 홀로이다.
호수와 예봉산, 하늘도 얼어붙었다.
지상에 낮게 드리운 고요.
적요(寂寥)의 호숫가에 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 속에 갇힌 호수에서
나는 순백의 세상을 바라본다.
햇살이 퍼지며,
하늘과 산과 호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닮을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함일까?
예봉산 하늘금 위로 한 조각 흰 구름이 허허(虛虛)로워,
나는 하얀 여백의 세상에 조용히 눈을 맞춘다.
한 폭의 수묵화인가, 아님 수채화인가?
매서운 추위에 목덜미까지 휘휘감고,
나는 수묵화의 세상에서 호수와 산과 파란하늘을 만난다.
쇠오리, 청둥오리
떼로 눌러 앉았던 곳.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雪)이 주인행세를 한다.
내 해 그림자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얼어붙었다.
눈에 눕는다.
푹신한 눈이 부드럽고 편하다.
나는 자유다.
티 하나 없이 파란하늘에 한 조각 흰 구름이 흐르고,
나는 누워 흰 여백의 세상을 메꾼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였지만,
숨막히도록 살아온 지난 일 년.
내가 걸어 온 일 년의 삶이 순백의 발자국에 묻혀간다.
뽀드득~뽀드득!!
고요한 길에 눈 밟는 소리가 선명하고,
햇살을 향해 몸을 돌려 세우자, 지금까지 옆에 있었던 바람이 사라졌다.
바람처럼 살기는 그른 모양이다.
내리는 눈을
활짝 가슴으로 안아주는 이 나무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서러웠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소나무에 눈이 내려앉았다.
스치는 바람을 느꼈는지,
스스로 제 침묵에 놀라 부르르 떤다.
눈꽃보다 더 화려한 꽃이 있을까?
눈꽃보다 더 청순한 꽃이 있을까?
순백의 꽃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36시간도 남지 않은 새해.
어깨 위에 또 일 년이라는 세월이 내려앉는다.
임진년은 세월의 뒤편으로 묻혀간다.
[ 덧없는 인생
덧없는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하나의 티끌인가.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며
심란한 마음은
산 너머 구름인데,
사람들은
묵은 해 간다고 즐거워한다. 석천 ]
언제 또 다시 이런 날이 올지 몰라 눈 내린 풍경에 취해 걷고 또 걷는다.
2012. 12. 30. 순백의 세상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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