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8. 08;00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입은 옷에 대해
'할아버지 스타일'이라고 잔소릴 한다.
아직은 낮기온이 여름 날씨이고, 튀어나온 똥배를 가리느라 티셔츠를 바지 밖으로 빼내서
입었더니 보기 싫은 모양이다.
요즘은 정장은 커녕 겉옷 걸치기도 싫다.
예식장에 갈 때는 가급적 넥타이 정장을 하는데 완전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다.
그냥 거추장스럽지 않은 옷으로 편하게 입으면 백수의 복장으로는 그만인데 꼭 집고
넘어간다.
17;00
오늘 포럼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온 한의사 겸 목사인 이풍원 박사가 침술봉사와 함께 정통
태극권의 가르침이 있는 날이다.
18;00
장충공원은 자동차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소음으로 떠들썩하다가 서서히 고요해진다.
공원에서 산책과 담소를 즐기던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추분이 지나서인지 서서히
어스름이 몰려온다.
열흘 전에 포럼 공지를 했는데 몇 명이나 모일까?
사실 운영자 입장에선 가급적 많이 참석해야 의욕이 생기고, 다음 추진 목표에 더욱
정성을 쏟게 된다.
모이는 친구들 복장이 울긋불긋하고 간혹 운동화 차림도 보인다.
나도 금년 봄에 아들이 사준 나이키 운동화 두 켤레를 교대로 신었더니, 내 발은 봄과 여름을
잘 보내고, 가을 초입에 들어섰어도 무좀 없이 여전히 잘 보낸다.
매스컴에서는 운동화를 신은 남자를 '운도남'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운동화도 패션이지만 나는 백바지와 청바지 입기를 즐긴다.
등산할 때 이외엔 검은 바지나 남색 계통인 네이비 색상은 진부해 잘 입지를 않는다.
캐쥬얼 정장 상의에도 어깨 패드를 넣지 않은 옷을 즐기며, 아직은 구부러지지 않은 당당한
어깨를 보이고 싶다.
30개월 전 승민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을 다 얻은듯한 나의 기쁨은 하늘까지 뻗쳤었다.
옛날 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와는 또 다른 희열(喜悅)로 손자의 블로그까지 만들어 틈틈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기도 했다.
둘째를 출산한 며느리가 청주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다가 틈틈이 동영상으로 아기들의
재롱을 보여주며 "할아버지께 인사해"라고 한다.
내가 할아버지?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나?
어느새 노인의 대명사인 '할아버지'서열이 되었나 보나.
은퇴 후 5년간 200군데가 넘는 전국의 산을 섭렵하며,
내 블로그인 '느림의 미학'에도 2만 명이 넘게 다녀가고, 전화 연락처가 500명이 넘으며
카톡 친구가 340명이나 되는데도 할아버지라니?
인터넷도 하루 네 시간 이상을 하고, 야동과 야설도 즐겨보며, 팔굽혀펴기도 삼십 회 이상
하는데,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리 늙었나?'하며 자괴감이 든다.
스마트폰도 최신 LTE폰을 가지고 다니며 젊은이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컴퓨터 자판도 독수리타법으로 1분에 150타 이상 친다.
최근 개봉된 베를린, 7번방의 비밀, 더 테러라이브, 감기, 설국열차도 보았고, 이번 주에는
'스파이'와 '관상'을 볼 예정이다.
NX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전국의 산에서 나무와 꽃과 풍경을 찍기도 한다.
이래도 내가 노인(老人)인가?
상대방이 나이를 물을 때는 답이 바로 안 나와 머뭇거리기도 하며,
때로는 58년 개띠라고 하기도 하고, 69년이라고 장난도 치지만 할아버지란 호칭은 정말 싫다.
아직은 아저씨, 오빠 소리를 듣는 게 더 좋다.
사오십 대 못지않은 활동력을 자랑하는데도, 손자를 봤기에 세대 구분상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결코 반갑지만은 않은 '할아버지'호칭이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왠지
씁쓰레해진다.
일본에서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로 살라는 말이 유행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은 자기 나이에서 7년을 빼라고 한다.
50~60대 노년들의 악력과 팔굽혀펴기 등 신체의 건강도 좋아지고, 기대수명도 늘어
요즘은 노인(老人)이 아니고 신중년(新中年)이라 한다.
신중년은 각국에서 영 올드( Young Old),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뉴 시니어(New Senior),
뉴 올더(New Older) 등으로 부르며 새로운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야 하는 직종과 컴퓨터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포진한 사무직보다는
안정적인 일이 적성에 맞는 신 중년층.
세상의 일에는 나이에 따라 잘하는 일이 있고, 반대로 감당이 안 되는 일이 있다.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가졌는데도 나이 먹었다고 정년퇴직과 명예퇴직이란 명분으로 다들
직업현장에서 떠났지만 씩씩한 모습들이 청년 못지않다.
꽁지머리 이풍원 박사가 팔이 아픈 친구에게 뜸과 침 시술을 한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의료봉사를 하는 이박사와 마음이 넉넉한 친구의 표정은 평화스럽고
한가하다.
태극권(太極拳)이 무얼까?
사전을 찾아보니,
젊었을 때는 아침 8시가 되어도 눈 뜨기가 힘들었지만, 요즘에는 새벽 3~4시면
저절로 눈이 번쩍 떠진다.
나는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한 시간 이상 한강 산책을 하며 사색을 즐긴다.
들어와서는 샤워 후 컴퓨터를 열어 메일과 뉴스를 보며 40~50대 때보다 더 활기찬 아침을
맞는다.
컴을 열면 메일이 100여 통 이상 들어와 있고, 심지어는 200통이 넘을 때도 허다하다.
일일이 보고 지우는 거도 만만치 않지만, 이 메일은 나에게 삶의 중요한 활력소가 되기에
출근길을 재촉하던 40~50대 때보다 더 활기찬 아침을 보내는 거다
어찌 보면 노년엔 수입(收入)도 중요하겠지만 일이 더 중요하다.
일자리야말로 노년의 복지이다.
요즘의 추세대로라면 90세도 훌쩍 넘길 거 같다.
인생 3막 중 마지막 3막인 은퇴 후 30여 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까?
이대로 삼사십 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다 죽을 것인가?
앞으로 30여 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요즘 깊은 고민을 한다.
우리나라 신중년층은 체력(體力)과 지력(智力)면에서 매우 건강할 뿐만 아니라 산업화의
주역들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의 의미나 보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고,
격동과 성장시대를 겪은 경험으로 근로에 매우 긍정적인 세대이다.
얼마 전 은행장을 지낸 민 행장과 대모산 등산을 하며 일자리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예 리(Li)교수팀'은 각종 실험을 통해 '나이가 들면 새로운
지식을 쌓기는 어렵지만, 판단능력과 상황 대처능력은 강해진다.'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산술능력은 청년층보다 6% 정도 다소 떨어지지만, 금융 분야에 대한 지식평가에선 10~20%
정도 앞서고, 금융위험 회피능력은 약 10% 정도 앞선다고 한다.
즉 나이가 들면 뇌 회전은 느리지만 판단력은 오히려 좋아진다는 거다.
19;00
요즘 전 현직 국정원장과 현직 검찰총장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포럼 뒤풀이를 하는 우리의 술자리에서도 예외 없이 검찰총장의 혼외의 자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며, 오늘 배운 태극권은 아예 화제 거리가 되지 않아 이박사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친구들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다.
다행인지 우연인지 고위공무원 출신 친구는 아무도 없다.
포럼의 주관자인 전병태 전(前)건국대 총장이 종합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으니 '대제학(大提學)'
서열인가?
조선 시대 벼슬 중 청요직(淸要職)은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이었다.
사간원과 사헌부는 다같이 비리를 적발하고 탄핵할 수 있는 자리이고, 서로 탄핵과 고발을
할 수 있는 자리라 서로 정면충돌을 하면 삼정승(三政丞)보다 더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대제학(大提學)이 수장인 홍문관이 중재를 하였다 한다.
정보기관인 국정원과 사법권의 칼을 쥔 검찰청의 권력(權力)싸움인지 대선개입 등의 사유로
전 국정원장의 구속과 현 국정원장의 해임 요구로 시끄럽더니, 현직 검찰총장의 혼외의 자(子)
문제로 세상이 더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현대의 3대 최고 권력기관의 수장은 국세청장, 국정원장, 검찰총장이다.
즉, 국세청의 장부(帳簿), 국정원의 감청(監聽), 검찰의 기소(起訴)는 우리 사회의 3대 칼날이다.
옛말에 "칼을 휘두르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하였다.
칼을 맞은 사람은 피를 흘리고, 또한 칼을 휘두르는 사람도 피를 흘리기에 세 직업을
혈삼직(血三職)이라 하였다.
국세청장 여러 명이 뇌물 받아먹고 해외로 도망 다니다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고,
국정원장도 여러 명이 감옥살이와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행방불명이 되기도 한다.
검찰총장도 2년 임기(任期)를 제대로 채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직 검찰총장의 혼외(婚外)의 자(子)를 두고, 정치권 싸움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이런 국회의원들과 권력자를 보는 국민들의 눈엔 핏발이 서고 가슴엔 피멍이 든다.
나는 권력(權力)과 돈복(金福)은 없지만, 누리지 못할 염복(艶福)이 있는 모양이다.
철산지점장실로 전화가 온다.
하얀 모자를 쓰고 오는 여성이라며 지점장실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한다.
누굴까?
사연을 들어보니 내가 현역 지점장이라 믿을 수 있기에 사귀자고 하는 거다.
자기 남편이 외환은행에 근무하다가 IMF 외환위기시에 명예퇴직을 하고 수족관사업을 하는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며, 가끔 밥도 같이 먹고 술도 마시며 데이트를 즐기자고 한다.
이런! 꽃뱀인가?
내 바로 전임 지점장도 새로 부임한 지점에서 여직원 성추행사건에 연루되어 한 달 전에
보직해임을 당했고, 강서 본부장도 체육대회 때 여직원 성희롱 죄로 옷을 벗었는데 난감하다.
이런 문제일수록 질질 끌지 말고 단호한 게 좋다.
근무 중 술은 할 수가 없고, 식사는 언제든지 구내식당에서 대접하겠노라고 말한다.
며칠 후 VIP 팀장이 40대 후반 여성고객을 지점장실로 안내를 하고 빠진다.
참 재미나는 여인이다.
본인은 미혼으로 돈도 많은 숫처녀라고 하며, 내가 자기한테 이상형이라고 한다.
어허!
참 문제로다.
내가 그리 헤프게 행동을 하였는지 반문을 해본다.
당시 은행장이나 부행장들은 지점장이 외부 섭외보다는 지점 내 객장에서 활동해주기를 바란다.
덕분에 객장과 지점장실에서 내점고객과 접촉할 일이 많아진다.
내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 인상 깊었다며, 오랫동안 망설이다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거라고 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그날 이후 여성고객과 식사자리에는 가급적 부지점장이나 차장 서열의 직원과 동행하여
오해의 소지를 차단한다.
상일동지점 부지점장 시에도 한 여성고객이 밤새워 줄을 서서 사회체육센터 수영장멤버십을
등록도 해줘 난감했었는데, 여기 와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긴다.
방배서 지점장 시에는 고액거래처가 툭하면 외제차 몰고 와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면
일부로 작고하신 백남봉 형님 또는 이창명이나 다른 연예인들과 같이 식사를 시켜주며
간접적으로 거절을 한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태극권과 관계없는 일이 왜 생각이 날까.
신중년(新中年)이라 아직은 힘이 넘쳐서 일까?
암튼 나는 염복을 누리고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동욱 검찰총장과 달리 염복을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만기제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금요포럼을 정리하며 문득 책꽂이에 꽂혀있는 '고사성어 대사전'과 소설 '사마천'을 들춰본다.
친구란 무엇일까.
친구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비슷해야 되는 걸까.
차이가 심하면 따뜻한 우정을 느끼기가 어려운 걸까?
중국의 역사학자인 사마천(司馬遷)은 역사학자이자 위대한 문학가이다.
그는 만(萬) 권의 책을 읽었고, 만(萬) 리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가장 심오한 학문인 하늘과 사람을 궁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였으며,
시대를 초월한 사가(史家)의 최고봉에 오른 인물이다.
사마천이 쓴 '계명우기'에는 친구를 4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두려워할, 존경할 외자의 외우(畏友)는 서로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큰 의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친구이다.
서로 친구사이지만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존경하는 두려운 존재의 친구를 말한다.
둘째 밀우(密友)는 힘들 때 서로 돕고, 늘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로 공이와 절구 같은 친밀한
친구이다.
셋째 놀다라는 뜻의 일우(昵友)는 좋은 일과 노는 데에만 잘 어울리는 놀이친구를 말하며,
넷째 적우(賊友)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걱정거리가 있으면 서로 미루고 나쁜 일에는
책임을 전가하는 기회주의적인 친구이다.
이밖에도 사마천은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管鮑之交),
수레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패랭이를 쓰고 다닐 정도의 생활수준이 차이가 나지만 절친한
친구 사이인 거립지교(車笠之交),
서로 뜻이 통해 거슬리는 일이 없는 막역지교(幕逆之交),
나이를 초월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는 망년지교(忘年之交),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문경지교(刎頸之交),
가난할 때 참다운 친구라는 빈천지교(貧賤之交),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떠날 수 없는 수어지교(水魚之交),
절구공이와 절구처럼 친한 지구지교(杵臼之交),
어릴 적부터 친한 총각지교(總角之交),
민초들 간의 우정인 포의지교(布衣之交)를 말한다.
우리들은 어떤 친구일까, 밀우(密友)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밤늦은 경동교회의 담쟁이 덩굴에 고운 단풍이 깃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노년(老年)이 아닌 신중년(新中年)이다.
이제부터는 기(氣)죽지 말고, 직위 등에 개의치 말고 일자리를 만들어 보자.
공자는 예기(禮記)에서 "음식남녀(飮食男女)는 인지대욕(人之大慾)"이라 하며
인간의 큰 욕망을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사에서 식과 색은 조절을 할 수는 있지만 끊기가 불가능하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재물(財物)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일(事)도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도 좋고, 나이를 먹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열정과 꿈을 달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풍원 박사같이 내가 가진 경험을 나누고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3. 9. 27. 장충공원 금요포럼을 끝내고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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