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림의 미학 202 연하장 유감(年賀狀 有感)

김흥만 2017. 3. 25. 21:23


2012.  12.  31.  17;10

창가에 서서 서산에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괜한 한숨이 나온다.

석양에 비쳐진 그림자는 길게 이어지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삶은 늘 시간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시간의 경계로 들어서는 걸까?

 

사람들은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라고 곧잘 비유를 한다.

나이를 먹으면 젊을 때 보다 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걸까?

'젊은 나이엔 흐르는 강물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충만하지만,

찬바람, 이슬 맞은 머리가 하얘진 늙은 나이엔 숱한 세월이 어깨에 내려앉아

강물보다 더 빨리 가기가 힘든 탓이겠지.

 

임진년(壬辰年) 한해.

나는 임진년생이라 임진년은 나의 영광된 해가 될 줄 알았지.

그러나 눌삼재(침삼재 枕三災)에 해당되어서인지 여느 해보다도 더 많은 일이 생긴다.


묵은해, 새해.

사람들은 시간의 경계를 만든다.


오늘 떴던 태양과 내일 뜨는 태양은 다른 건가?

오늘 지는 해는 내일 또 뜨는데,

사람들은 지는 해엔 숙연(宿緣)해 하고, 새해의 태양에는 환호를 한다.


2013. 1. 1. 07;40

묵은해와 새해라는 시간의 경계를 지나,

계사년(癸巳年) 초하루.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되니 새해 아침이 열린다. 

구름 사이로 태양이 떠올라 온 누리를 비출까?

 

잿빛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니, 길도 산도 지붕도 하얗게 뒤덮인다.

정월 초하루에 내리는 상서로운 서설(瑞雪)은 국운(國運)이 융성해질 징조를 보여준다. 


11;00

잠시 맑았던 하늘이 심상치 않다.

마구 내리는 함박눈에 객산이 숨을 멈추고 침묵을 지킨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굉음도 함박눈 속으로 사라진다.

 

신년을 맞으려 산을 찾은 사람들은 가슴에 앉은 과거의 더께를 씻어내고,

새 숨결을 맛보려 가쁜 숨을 헐떡이며 새해의 소망을 빈다.

 

예정에 없던 번개산행이라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아쉽지만 휴대폰으로 찍는다. 


휴대폰으로 지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냥~~했어, 연말이라 안부도 궁금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그냥"이라는 말은 허물없는 사이에 단순하며 따스하고 정(情)이 흐르는 말이다.

어떤 이는 목적 없이 말 한다고 싫어하지만,

사실 "그냥~"이라는 말은 정답고 여유있는 말이다.

 

연말연시엔 안부 겸 연하메시지가 많이 온다.

백수 첫해엔 며칠간 수백 통의 메시지가 오더니, 한해 두 해 지나며 서서히 줄어들어

이젠 백여 통이 조금 넘게 온다.

 

대부분은 정형어법을 쓴 단체메일을 보낸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

"근하신년(謹賀新年)~~~~~"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을~~"

"계사년(癸巳年) 새해도~~~"

 

정형어법으로 된 연하메일을 받으면 괜히 상품취급을 받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개중에는 반가운 메일도 있지만, 각 개인별로 안부를 묻고 건강을 빌어주는 건 어떨까.

 

또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왔다.

며칠 전 웃음의 전도사인 '황수관'박사가 급성패혈증으로 별세했다.


많은 사람에게 웃음으로 희망과 용기를 주며 삶을 행복하게 해주었는데

그의 너털웃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어딘가 허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 희망, 행복보다는 슬픔, 절망, 불행으로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좋은 일만 생기겠는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이니 살아가며 자신을 낮추고 비우면 행복하지 않을까?

 

인간사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게 아닌가?

그러나 삶은 다 행복하지도, 다 불행하지도 않다.

길가에 있는 작은 풀 한포기, 작은 돌멩이 하나를 보면서도 삶의 가치를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자.

이젠 지난 시간의 허물에서 벗어나자.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던 후회, 절망, 낙담, 한숨도 묵은 해에 실려 보내고,

새해의 숨결에 몸과 마음을 맡기자.

 

용봉산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행복도 선택이다'라는 책의 제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한다.

 

행복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사람에겐 돈, 명예, 지위, 권력, 미모, 사랑, 건강 등 수많은 욕망이 있다.

물론 이 욕망들이 다 충족된다면 신도 부러워할 거다.

 

또한 이런 물질적인 욕망은 다 가질 수 없다.

사소한 일에도 기쁨을 느끼는 게 행복이 아닐까?

 

Tv드라마에서는 판사, 검사, 의사 등 '사'자가 붙은 직업이 행복의 척도인양

오도(誤導)를 한다.

 

권력을 남용한 대통령의 형이나 측근들이 탐욕스런 얼굴을 가린채 수사기관에 잡혀가고

감옥에 가며 꼴불견을 연출한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데 있다.

오늘 눈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술 한잔하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겐 행복이다.

행복은 스스로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으니 이를 끄집어내야 행복을 느낀다.

 

시간이란 괴물에 따라 허겁지겁 뛰지 말자.

때로는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시간을 멈추기도 하며, 뒤돌아보기도 하자.

 

올해 내내 돌아갈 시곗바늘과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에 국운융성(國運隆盛)과

모든 이들의 행복을 빈다.

 

정형화된 연하메일이라도 받으면 매우 반가우면서도,

새해 첫날 충청도 사람 특유의 투정을 부려본다.

 

                         2013.  1.  1.  객산의 서설(瑞雪)속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