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3. 10;00
계명산 휴양림에서 탄금대로 이동한다.
나는 고향이 충주에 인접한 진천이지만 탄금대는 처음 밟는다.
신라 진흥왕 당시 악성(樂聖)으로 꼽히던 우륵(于勒) 선생은 원래 가야국 출신으로
거문고(琴)를 만들어 가야금(伽倻琴)이라 했고,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그는 12곡을 지었으며 가야금을 탄주(彈奏)하고
연마하던 탄금대(彈琴臺)는 먼 훗날 비극의 역사현장으로 바뀐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8천 여 병사를 이끌고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맞붙어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자살을 선택한 탄금대에 들어선다.
늘 궁금했던 탄금대를 거닐며 마음이 무겁다.
이곳 전장(戰場)의 주인공인 신립 장군은 패배 후 왜 투신자살을 택하였을까.
일시 후퇴나 피신하였다가 다시 왜적을 물리치려하지 않고 그는 왜 투신자살을 선택했을까.
임진왜란 당시의 임금 선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무능하고 의심이 많았다고
후세의 일부 사학자(史學者)들은 혹평 하는데 과연 그는 무능했을까.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송림을 스치고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신립 장군의 넋과 8천 병사의 곡성(哭聲)으로 들리니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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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전문가는 아니라도 여러 책을 읽으며 선조 임금을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징비록에 의하면 선조는 조선 통신사 사절단 부사 동인(東人)의 김성일이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는다." 라고 하는 보고를 믿지 않고 오히려 절박한 위기감으로 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유능한 무장들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남쪽 지방의
성(城)들을 신축하고 개축하게 하며 국력을 모두 기울여 전쟁을 대비했는데도 전쟁 초기
패전을 거듭하자 급기야는 서울과 백성들을 버리고 신의주 방면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충주 지역의 순직 장병, 경찰관, 군속 및 군 노무자 등 1,910위의 넋을 추모하는 충혼탑 앞
태극기가 그들의 넋을 위로라도 하듯 힘차게 펄럭이는데,
서울에선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정치놀음에 태극기가 동원되어 악다구니를 쓰는
현장에서 도구로 쓰이며 태극기의 존엄이 훼손되고 있다.
충장공 신립 장군의 결사항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위령탑이 외롭다.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왜군이 상륙한 영남 지방에선 김성일 같은 영남 출신의 견해를 따라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을 하고, 임금의 명에 따라 성을 쌓고 무기를 비축하였지만
병사들의 전투력을 제대로 키우지 않았기에 막상 전쟁이 터지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치거나 싸우는 족족 패전을 한 것이라고 분석을 한다.
이에 반해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확신을 해 거북선 등 특수 전함과 판옥선을 만들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시켰기에 해전 초기부터 승리를 거듭한다.
따라서 선조는 전쟁을 미리 대비하였어도 막상 전쟁이 터져 육군이 참담한 패전을
거듭하자 경악을 하며 심한 공포를 느껴 황망히 달아난 임금으로 역사에 기록이 된 거다.
소설가 '송우혜' 선생 글에 의하면 선조는 무장(武將)들을 참혹하게 다뤘다고 한다.
이순신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던 선조는 초수(超授) 즉 정해진 규정을 크게 뛰어넘어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승진 시켜 전라좌수사에 임명을 하지만,
여진족의 대추장인 니탕개가 조선군의 아홉 배가 넘는 1만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경원진성을 한나절 동안 함락 당했다가 부사 김수의 목숨을 건 활약과 구원군의 도움으로
다시 되찾았어도 선조는 파격적이고 잔혹했다.
당시 장수가 부족하였어도 육진 최고의 무장인 경원 부사 김수와 판관 양사의를
경원성 일부를 함락당한 죄를 물어 처형한다.
그는 적에 비해 중과부족으로 변명할 여지가 있다 해도 '패배한 무장은 사형'이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단호하게 실시하며, 4년 뒤 남해안에서 왜군에게 패한 전라좌수사
'심암'도 처형한다.
따라서 전투에 패배한 신립에게도 당시 육군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어도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강물에 투신자살 한 것일까.
신립은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두려워했던 문경새재를 버리고 달천변 진흙탕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배수진이란 물(水)을 등지고 치는 군진(軍陣)으로서 후퇴를 할 곳이 없기에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라고 치는 진(陣)이다.
'병법에 병력이 열 배가 되면 적을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나가 싸우라 했다.'
병력이 적다면 문경새재에서 길목을 막고 전투를 하던지, 청산리 전투와 같이 적당한 곳에서
왜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불시에 공격하는 매복전(埋伏戰)을 하던지, 아님 게릴라 전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8,000여 병사를 효용성 있게 활용하였더라면 전쟁의 역사가 바뀌었을 텐데
아쉽다.
배수진을 택한 신립은 우매(愚昧)하였던 것일까.
'죽을 곳에 빠지면 살고, 망할 곳에 놓이면 생존한다.'라는 배수진 병법을 믿은 걸까.
조선군은 조총소리에 놀란 말들과 함께 우왕좌왕 하다가 8,000여 정예부대원이 몰살하고
본인은 투신자살을 택하는데,
물론 당시에 신립은 당대의 명장으로써 최선을 다하였다.
나는 사병출신으로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밀리터리 마니아(military mania)로 군사학에
많은 흥미를 느낀다.
손자병법, 소부대, 대부대 전투 등 여러 군사학 서적을 섭렵하면서도 여전히 신립의 전술과
작전에 이해를 하지 못하며 신립의 작전은 나에게 미스터리(mstery)로 남는다.
열두대로 내려간다.
열두대는 탄금대 절벽 위에 있는 바위로 신립 장군이 1592년 탄금대 전투 당시 병사들을
격려하고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강 아래로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절벽 아래 남한강물은 고요하다.
신립은 전투에 패전하자 이곳에서 물결을 따라 내려가다 중앙탑면 창동 암벽에 자화상을
그려놓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는데,
자결한 후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낚시꾼이 잡은 잉어의 배에서 나온 옥관자가
신립 장군의 것으로 판명되어 그 자손들이 안장하였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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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여진족 우을기내를 유인해서 체포하였는데도 상관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은밀하게 작전을 하였다는 이유로 강등을 시켰다가 10단계가 넘는 초수(超授)를 시행하여
만호(萬戶)에 임명하기도 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도 한 선조임금.
임금으로서 선조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현군(賢君)일까, 아님 암군(暗君)일까.
학자들은 선조는 의심이 많고 자기보다 똑똑한 신하에 대해 시기심도 많았다고 한다.
신하들의 반대를 누르면서 율곡 선생과 이순신 장군과 같이 현능한 신하를 발탁하여
국가 보위에 성공하였으니 현군(賢君)일까.
훌륭한 신하들을 존중하고 고맙게 여기기보다는 자신보다 능력이 있음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이용하며 단순 소모품으로 취급한 암군(暗君)일까.
따라서 여기에 자살을 택한 답(答)이 나온다.
신립은 패전 장수로서 살아 돌아가도 처형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도 신경병적 자세의 마음을 가진 선조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전쟁이 끝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노량해전에서 방패를
치우게 한 후 장렬하게 전사를 택한 게 아닐까.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바람엔 신립 장군과 8천여 병사들의 통곡소리가 실려 온다.
잠시 눈을 감고 수백 년 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이에 대한 명복을 빌며,
탄금대 비극의 주인공인 신립 장군과 선조 임금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달천이 고요히 흐르고 사위(四圍)는 고요하다.
비록 세월은 흘러갔지만 복잡하고 쓰라린 역사를 생각하며 강물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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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혼돈(混沌)의 세상이다.
매일 태극기와 촛불이 맞서서 분노와 증오, 혐오와 저주로까지 번졌다.
정치인들의 끝없는 욕망으로 나라와 전 국민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탐욕, 어리석음, 성냄의 3독(三毒)에서 언제가 되어야 탈출할 것인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반대, 혼란과 갈등으로 나라가 망해야 정신 차릴 것인가.
승복, 위로, 화해, 평화, 사랑과 자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이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정치인은 정치가(政治家)가 되어야 하고,
학생은 학생답게,
경제인은 경제인답게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진정시키고 이끌어줄 진정한 지도자와 세상을 선도할 어른이 보이지 않고
갈등의 치유가 요원하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신립 장군의 묘는 광주 곤지암에 있다.
나는 장군의 묘가 진천 무제봉(武帝峰)에 있는 줄만 알았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무제봉엔
신립의 형인 '신잡'의 묘이다.
탄금대의 송림을 걸으면 가슴이 뻥 뚫릴 줄 알았는데, 패전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보며
오히려 기분이 착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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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성을 지나며 이름 모를 산봉우리에 핀 상고대가 환상적이고, 뭉게구름 사이로
솔개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저 산에 언제 오를까,
나에게 여행과 산행은 그리움과 아쉬움이다.
그리고 또 기다림이다.
2017. 2. 23. 탄금대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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