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23 광양 백운산<1222.2m>의 원증회고(怨憎會苦)

김흥만 2017. 3. 30. 19:36


2017. 3. 23.

동곡곡 개울가에 버들강아지가 눈을 떴다.

버들개지는 벚꽃이나 진달래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향긋한 향을 내뿜지 않아도

하얀 꽃 이삭이 피면서 봄이 목전에 온 것을 몸으로 말하는 거다.


문득 오염된 물질을 흡수하는 독특한 능력을 갖춘 갯버들 가지의 마디를 잘라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고 싶다.


2017. 3. 23. 11;54

이맘때면 섬진강은 하얀 벚꽃을 태우고 광양만으로 흘려보내는데

백운산 들어가는 길은 벚꽃은커녕 항상 먼저 피던 매화도 보이질 않아 삭막하다.


서울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소란스럽기만 한데

정작 봄을 마중하러 전라도 광양까지 내려왔어도 봄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백운산은 여전히 겨울잠을 자며 침묵을 지킨다.


꼬박 5시간을 달려와 백운산 2코스인 진틀에 도착한다.

누구 집인지는 모르지만 산기슭에 지어진 기와집이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한다.


하늘은 박무와 미세먼지로 흐린 잿빛이다.

박무를 뚫고 겨우 내려앉은 태양빛이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주차장 한구석에 놔둔 고로쇠 물통이 외롭다.

백운산의 고로쇠 약수 중에는 특히 이곳에서 채취하는 약수가 신경통 요통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경칩 전후 많은 고로쇠 채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는데  3월도 하순이 다 되어가니 인적이 끊겼다.




12;00

흰 구름 뭉게구름을 기대했건만 백운산 하늘엔 엷은 박무(薄霧)만 떠있고, 새들만 짝짓기를

하는지 요란스럽게 지저귄다.


병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가는 이 없어 너무나 한적(閑寂)하고 개울가엔 물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끝없이 갈고 장쾌한 백운산 산릉이 내 앞에서 꿈틀거린다.

저 능선에 오르면 남해바다와 섬진강이 보이려나.

백운산은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산행이 시작에 불과한데도 마음이 설렌다.


어느 시인은 말했지.

가을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봄은 땅바닥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말이다.


등산로 길가에 큰개불알꽃이 와글거리며 나를 반긴다.

서울에선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곳엔 이미 봄이 왔구나.


                  [   나만 몰랐구나


                      나만 몰랐구나.

                      세상 시끄러워

                      눈과 귀

                      입을 막았더니


                      북풍한설 뚫고

                      개불알꽃 핀 줄

                      나만 몰랐구나.


                      담벼락 밑 땅 세상에서

                      제비꽃 개불알꽃 튀어나와

                      비명을 질렀는데도

                      귀를 막은

                      나만 몰랐구나.


                      세상사 싫어

                      죽음의 계절

                      겨울 늦잠 속에 허둥댔더니


                    이 조그만 꽃이

                    잠은 인생의 사치라며

                    마구 나무란다.


                    꽃은 피고

                    마구 잔소리를 해대는데

                    내 닫힌 마음엔 언제 봄이 올까.


                    겨울을 배웅하고

                    봄을 마중할 시간이 되면

                    꽉 닫힌 마음

                    풀어지려나.                                        석천   ]


12;10

600m를 올라왔더니 정상까지 2,7k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를 반긴다.


호남정맥에서 가장 높은 백운산,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을 목표로 추진하였지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백운산을

오른다.


설악산, 지리산을 비롯하여 최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을 다녀오기도 했으니

이참에 백운산이 국립공원 자격이 있는지 슬그머니 들여다봐야겠다.


이상하다.

조금 전 이정표는 정상까지 2.7km이였는데 여기 이정표는 3.3km가 남았다고 안내를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호남정맥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광양의 주산(主山)이자 진산(眞山)인 백운산을 예전에는

백계산(白鷄山)이라 했다.


'닭이 두 발을 딛고 날개를 편 상태에서 북쪽으로 날아오르는 형세의 산'이라는데,

정상 상봉(上峰)이 닭 벼슬이고, 계족산이 닭발이요, 올라가면서 왼쪽 또아리봉이 몸통,

한재는 목 부분이라고 한다.


초록이 없어 황량했던 산 들머리에 빼곡하게 들어선 전나무가 분위기를 확 바꾼다.

전나무 숲은 짙은 솔 향을 내 몸에 마구 뿌려준다.


예로부터 백운산에는 영험한 3가지 기운이 있다는데,

봉황의 정기를 탄 사람이 조선 중종 때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 선생이고,

지혜의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은 병자호란 직후 몽고국의 왕비가 된 월애부인이라 한다.


부자가 되는 돼지의 정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데 광양 제철소 및 대기업들이 들어섰으니

이게 바로 돼지의 정기가 아닌가.


백운산이 '생태 경관 보전구역'으로 지정되었고,

국립공원으로 추진하면서 서울대학교 연구단지가 걸림돌이 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12;36

생태 경관 보전구역은 여의도의 8.40㎢보다 넓은 9.74㎢의 면적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원시의 자연림에 각종 동·식물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특산종과 희귀종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백운산은 살아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寶庫)로 900여 종이 넘는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몇 년 전 들렸던 옥룡사지 터 주변에는 1만 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장관을 이룬다.

900여 종의 희귀한 식물군(植物群)은 한라산 다음으로 많은 종수(種數)라고 한다.

                                                            2012. 3. 21. 촬영한 옥룡사지 동백나무숲


길은 너덜이다.

길은 걸어가 봐야 알게 되고 산은 올라가 봐야 순한 산인지 험한 산인지 알게 된다.


강원도나 충청도 산은 겉에 보이는 대로 유순한 산이면 거의 부드럽고,

처음부터 악산(惡山)이면 끝까지 산세가 험하고 거칠어 산객들을 힘들게 하는데 묘하게도

전라도 산은 겉과 속이 다르다.


출발할 때는 유장한 능선을 바라보며 매우 부드러운 산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너덜겅도 길고 만만치 않다.

무릎보호대를 차지 않아서인지 깨진 돌 틈 사이로 걸어가려니 몸의 균형이 자주 깨진다.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가 수난을 당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나무에 구멍을 파고 줄을 끼워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한다,

어느 나무는 구멍이 한 개고 조금 굵었다 싶으면 두 개의 구멍을 파서 호스를 끼웠는데

기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규정을 찾아보니 직경 10cm 이하인 나무에서는 채취를 금지하고, 구멍도 3개 이상

뚫어서는 안된다.


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상처를 최소화하여야 나무의 생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수액 채취를 한 다음에 반드시 나무 쐐기로 구멍을 막아줘야 한다.


수액은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낮에 영상으로 올라가는 환절기 즉 경칩을 전후한

2월 중순에서 3월 말까지 채취가 가능하며,

낮 기온이 영상 12도 이상으로 올라가거나 영하로 떨어지면 수액이 나오지 않는다.


수액은 고로쇠나무 외에도 가래나무, 자작나무, 물박달나무, 다래나무에서도 채취가

가능하며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은 뿌리를 통해 완벽하게 정수된 깨끗한 물로 몸에 좋은

미네랄이 있어 최고의 음료수라고 불린다.


고로쇠나무에서 수액을 빼기 위해 깔아놓은 호스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호젓한 산길에

흉물로 바뀌었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이곳 광양 백운산에서 참선하다가 일어서려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무릎이 펴지지 않아서 옆에 있는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마셨더니

무릎이 펴졌다고 한다.


그래서 뼈에 이로운 물이라는 골리수(骨利水)란 이름이 붙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고로쇠로 변했다고 전해지는데, 난 이 물이 싫어서 잘 마시질 않는다.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 사전절차로 대장내시경용 물을 마실 때 시금털털한 맛으로

간혹 다 마시지 못하고 토할 때도 있는데, 고로쇠물맛이 대장약물과 비슷하게 시금 털털

하기에 잘 마시지 않게 된 거다.



키가 쭉쭉 뻗은 전나무숲을 지나자 아직 잎이 나오지 않은 자귀나무, 나도밤나무,

노각나무가 혼효림을 이루고 간혹 비목(枇木)도 보인다.


근육질의 자작나무과 서어나무 앞에 선다.


죽은 참나무등걸에 운지버섯이 피었다.

암치료제인 PSK를 추출하는데 아직 이곳엔 소문이 나지 않은 모양이다.


만성간염, 항종양억제, 면역력 강화, 콜레스테롤 저하, 혈당 증가 억제에 효능이

있으며 특히 PSK(폴리사카로이드) 성분은 정상적인 세포에는 독성을 나타내지 않으며

암세포에만 작용을 하여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고 연구 결과가 나왔다.


13;00

출발한지 한 시간 만에 너덜지대를 지나 진틀 삼거리에 도착한다.

신선대까지는 1.2km가 남았기에 좌측 신선대를 지나 정상인 상봉에 올랐다가

원점회귀를 하기로 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야 능선에 올라탈까.

물이 500㎎ 한 통밖에 없으니 아껴 마셔야겠다.


지난겨울 추위와 미세먼지 핑계로 운동을 게을리 하고 막걸리를 많이 마셨더니 나도

모르게 체중이 4㎏이나 늘어 산을 오르며 숨이 가쁘다.


능선에 오르니 남해로부터 불어오는 훈풍이 백운산의 봄을 재촉한다.


남쪽의 최남단에 위치한 산이라 이곳에 봄이 와야만 서서히 시속 1㎞의 속도로

북쪽으로 봄이 북상한다.


고개를 숙이고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앞이 뻥 뚫렸다.


산마루에서 박무 속에 일렁이는 능선을 바라본다.

묵묵히 먼 능선을 바라보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젠 나도 맑은 수액(樹液)이 흐르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모양이다.


13;33

백운산 신선대와 정상인 상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흰 구름이 걸려 있는 백운산.


전국에 백운산이 몇 곳이나 될까.

완도 백운산(483.1m), 영종도 백운산(255.5m), 정선 백운산(1,426m), 동강 백운산(882.5m)

포천 백운산(903m), 원주 백운산(1,087.1m), 용문 백운봉(940m), 홍천 백운산(895m),

장수 백운산(1,278.6m)에 이어 이곳 광양의 백운산(1,218m)이 있으니

조선 팔도 곳곳에 있구나.


우리나라 산 4440개 중 가장 많은 이름은 봉화산으로 47개나 되며,

백운산도 11개 또는 25개라고도 하는데 유감스럽게 내가 아는 곳은 10개에 불과하다.


이중 산림청이 지정한 100명산 가운데 백운산은 3곳이다.

광양 백운산, 동강 백운산과 포천 백운산인데 그중 광양 백운산을 오늘 오르는 거다.

100대 명산이 아니더라도 원주 백운산과 양평 백운봉은 이미 예전에 올랐지.


급경사를 올라가자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뾰족한 봉우리를 보며 가슴이 메더니 무엇인가 머리를 탁 친다.


내가 수도자는 아니지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아름답고 성스럽고 평화롭고 심성이 맑아지면 그게 깨달음인가?


지난겨울 조금 방심한 댓가로 체중이 무려 4kg이나 늘었다.

늘어난 체중으로 사진촬영까지 하면서 올라가니 다른 일행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건 당연하다.


뒤늦게 당구를 배우면서 많은 것을 깨우친다.

얼마 전까지는 공이 잘 맞지 않고 경기에 지면 속도 상하고 짜증이 났지.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매일 전패(全敗)를 해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이게 깨달음일까.

평범한 깨달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치졸하다.


깨달았다 해도 늘 두려움을 느끼고, 시련도 오고 가고, 병이 들고, 늙어 죽는 것은 같다.

또한 깨달았다 하더라도 슬픔과 분노, 이기심, 이타심은 다 있게 마련이다.


14;16

때로는 너덜지대를 지나기도 하고 부드러운 산길을 오르기도 하다 보니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신선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슬그머니 고도계를 보니 1,190 m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500 m가 남았구나.


상념은 이어진다.

어느 순간이 되니 내가 지게 되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되며 마음이

편해진다.

실력도 없으면서 꼭 이기려고만 했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냥 매사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마비된 어깨와 손의 컴플렉스도 잊혀지고 나를 위한

슬픔과 분노도 사라진다.


어느 성현은 말한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슬프고 번뇌하고 고통을 느낀다고 말이다.


따라서 고통과 갈등이 있어도, 번뇌하는 마음이 생겨도 이를 두려워하거나

버리려 하지 않고 즐길 뿐이다.


전쟁당시 빨치산 소굴이었던 백운산,


여수 순천 10·19 사건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백운산 살쾡이'로 불렸던 공산주의자

김선우 일당의 소굴이기도 했다는 백운산의 주봉인 이곳 신선대에도 그들의 비트 흔적이

있을까 두리번거려도 내 눈에는 보이질 않는다.

내가 은밀한 길로 오르지 않고 정해진 등산로로 올라와서 보이지 않았겠지.


주위경관이 좋아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던 장소라서 신선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나는 옆에서 신선대(神仙臺)를 올려다만 봐도 신선이 되는 느낌을 가진다.


14;20

신선대를 지나며 능선 길은 매우 부드러워졌다.


천천히 걸으며 지나간 잡다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냥 풍경만 즐기련다.



신선대 갈림길을 지나자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어온다.

땀을 많이 흘려 방풍 재킷을 벗었더니 바람이 온몸에 파고든다.


그래도 바람은 계절을 역행하기 싫었는지 그다지 차가움은 느끼지 않고

오히려 훈훈한 기운이 담겼다.

군데군데 겨우내 얼었던 땅이 질퍽거리고 나는 그곳을 피해 걷는다.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유영을 한다.

저앞에 꿈틀거리는 산릉은 어느 산일까.


무등산, 조계산, 팔영산 등이 보인다는데 이곳이 초행이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내려가 지도를 확인하련다.


신선대에서 정상은 10분 거리라는데 나는 20분이 넘게 걸렸다.

백운산 정상인 상봉은 호남정맥 최고봉답게 거대한 암봉으로 나를 위압한다.


닭 벼슬처럼 우뚝 솟은 암벽 상봉 정상에는 아무도 없다.


14;45

백운산 정상은 두려움이다.

뾰족하게 솟은 정상을 오르려면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한다.


정상은 다가서기가 어려울수록 더 끌리는 법이지.

고생스러워도 겁이 나더라도 멈추지 않고 서서히 오르면 되겠지.


먼저 올라가는데 팔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마음을 졸이게 한다.

상체를 조금 세우고 다리를 약간 벌리며 레펠 자세로 올라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쉽게 올라가고 이루어지면 고통도 없고 좋으련만

한발씩 발을 떼면서 심장은 폭발할 듯이 두근거린다.


여기서 나의 욕심은 유한대라 정상만 오르면 오늘의 내 목표는 채워지는 거다.

채워지면 욕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조금씩 덜고 비워지겠지.


힘겹게 오름에 행복한 즐거움이 나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진다.



간신히 올라와 정상석앞에 선다.

불과 두 평도 되지 않는 정상에 골바람이 올라와 몸을 휘청거리게 한다.

올라올 때는 훈풍이었는데 막상 정상에 서니 냉풍(冷風)이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이 감싸 선계(仙界)를 이루는 곳.

정상석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었어도 나는 정상을 가졌다.


정상을 구하고자 얻고자 로프를 잡고 올라왔으니 행복하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苦痛) 즉 구부득고(求不得苦)에서 해방된 거다.


거센 바람은 몸을 휘청거리게 하기에 좁디좁은 정상에서 도도한 품위를 지키며

꿋꿋이 서있는 정상석을 잡아 몸의 안정감을 유지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정상석에 높이가 표시되지 않았다.

지도상에는 1,216.6m로 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에는 2010년 1,228m로 정정했다가

정밀 GPS측량을 해 최종 1,222.2m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상석에 높이가 표시되지 않은 모양이다.


온 천하가 내 세상이라는 희열을 느낀다.

섬진강과 지리산, 바다가 아스라이 보이고 길게 뻗은 능선이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이런곳에서 어찌 산의 낭만과 정취를 느끼지 않으리.


              [     백운산 상봉


                  이제 하늘에 닿았구나싶어

                  하늘에 손을 휘저어보지만


                  구름이 도망가고

                  강물도 흘러가고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새버리더니

                  어느새 세월도 흘렀구나.


                  세상사 제행무상(諸行無常)인것을

                  백운산 정수리에 올라 깨닫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각도 떠나보내고

                  멍 때리다 보니

                  시간도 흘러갔구나.


                  흐르지 않고

                  멈춰 섰더라면

                  내 삶도 고인 물같이

                  썩었을 텐데

                  다행히 구름따라 흘러 갔구나.


                  내 삶은

                  잊어지고 잊혀지고

                  지워지고 멀어지니

                  내 세월이야말로 회자정리(會者定離)로구나.


                  바람이 억센 날

                  백운산 정상에 서서

                  생각도 마음도 욕심도

                  저 하늘가로 날려 보내리.                                      석천   ]


이곳에선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

길게 이어진 능선 끝에 우뚝 선 억불봉(1,008m)의 모습은 양평의 백운봉과 많이 닮았다.


억불봉은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백운산 상봉보다 높지는 않겠지만,

산만큼은 크던 작던 높던 낮던 다투지를 않고 서로 평등하다고 주장을 한다.


활처럼 부드럽게 휜 능선 상에 우뚝 솟은 억불봉은 마치 산릉의 바다에 섬처럼

신비롭게 보이지만 박무(薄霧)에 의해 장엄한 지리산 능선과 그림처럼 펼쳐지는

한려수도를 볼 수 없어 아쉽다.


14;53

시계를 보니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이 다돼간다.

여기서 시간을 따져본들 무엇하랴.


해 지기 전 내려가면 될 것을,

자연의 시간 앞에 인간의 욕망은 하나의 티끌만도 못한데 말이다.


억불봉 방향으로 가다가 진틀 삼거리로 우회전하여 하산하기로 한다.


박무속에 섬진강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섬진강의 은빛 모래사장과 흰꽃잎이 두둥실 떠다니는 옥빛 강물을 기대한건

나의 큰 욕심이겠지.


강 건너로 지리산 자락과 또아리봉(1,127.1m)과 도솔봉(1,234m)이 겨우 보인다.

날씨가 맑아 지리산 전체를 보려했음은 나의 욕심으로 끝나는가 보다.


정상주를 한잔 했더니 힘이 생긴다.

풍수에서 명당의 조건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저쪽이 촤참판댁인데, 백운산 자락을 감싸고 도는 섬진강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명당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산에서는 화기(火氣)가 나오고 물에서는 수기(水氣)가 나오기에 불과 물이 배합되는 것을

최고의 명당으로 치는 것이다.


인자요산(人者樂山)이라 사람이 산에 올라 화기를 받으면 힘이 생기고,

지자요수(知者樂水)는 물을 가까이 하면 조급증이 해소되고 열을 식혀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명당의 요건을 지닌 이곳에 올랐기에 힘도 생기고 마음도 차분해지는 모양이다.


바람을 피해 능선의 왼쪽으로 오르니 봄 햇살을 피한 절벽아래는 눈과 얼음이 녹지 않았고,

나무나 풀에 연둣빛이 비치질 않아 비록 황량한 풍경이지만 저멀리 간신히 보이는 섬진강 

풍경에 잠시 시선을 고정시킨다.  


15;00

정상주를 나누며 아픈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만히 들어보니 원증회고(怨憎會苦)로구나.


살다보면 미운 사람, 내가 싫어하는 일을 반드시 만나는 게 우리의 삶이다.

아픔을 줘 꼴도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을 만나는 건 필연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지나가 봐야 그 사람의 마음도 알 수가 있다.


돌고 도는 게 세상의 이치다.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고, 현명하고 지혜롭게 긍정적으로 살아야겠지.


지금은 조금이라도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 나이다.


단순하게 살려면 내가 꼭 필요한 거 소중한 거 빼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도제(道)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고(苦)는 인생의 고통, 집(集)은  번뇌의 집적, 멸(滅)은 번뇌를 멸하여 없게 한 열반(涅槃),

도(道)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고통의 원인이 집착과 욕망에 있다고 보기에

물건과 가질 수 있는 명예, 돈, 권력을 버리면 마음도 비울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한 행복이 깃든다고 한다.


사무실에 있는 난(蘭)도 7년이 다돼가니 비실거린다.

그동안 물을 주며 정성껏 길렀는데도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꽃이 피지를 않는다.

이젠 미련없이 떠나 보내고 얽매임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려나.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산길을 내려가며 곰곰히 생각을 해본다.


행복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다.

늘 고통과 인고(忍苦)의 시간을 거쳐야만 오는 거고,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을

하지 않아야 오는 거다.


16;20

신선대로 오르는 방향은 너덜지대였지만 이 길은 서두름 없이 천천히 내려간다.

억불봉 방향으로 가다가 진틀 삼거리로 내려가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형태를 갖췄다.

산 사면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덕분에 가파르지만 돌이 없어 편하게 내려왔다.


16;50

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다.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소(沼)를 만들었다.


물은 잠시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멸해서 없어진다.

달도 차면 기울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얼었던 얼음도 녹는 게 자연의 섭리지.


4시간여의 산행을 끝내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너덜과 떨리는 마음으로 올랐던 상봉(上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에서 벗어나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백운산의 4대 계곡은 어치계곡, 금천계곡, 성불계곡, 동곡계곡인데

그 중의 하나인 동곡계곡의 물가엔 다들 하산하고 나 혼자만 덩그라니 서서

티 하나 없이 맑은 명경지수(明鏡止水)를 들여다본다.


항상 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백운산(白雲山),

호남정맥의 최고봉인 백운산 산행은 쉬운 듯하면서도 쉽지 않았고,

어려운듯 하면서도 어렵지 않았던 산이다.

잘잘하면서도 우람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 백운산을 결코 잊지 않으리.


19;00

저녁노을로 하늘은 살짝 붉어지고 백운산 자락에 걸렸던 해가 숨으려 한다.

석양(夕陽)은 한없이 아름답다 하는데 나는 서글픔을 느끼니 황혼(黃昏)을

거부하려는 나의 몸짓인가 보다.


이제 초보 노년에 접어들었다.

황혼이 초라하거나 서러운 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위축이 될까.

석양과 황혼을 잊어버리고 살아야 될 모양이다.


                                           2017.  3.  23.  백운산 자락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