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25 강릉 괘방산(399m)의 구과십육(口過十六)

김흥만 2017. 4. 10. 20:59


2017.  4.  8  06;00

먼동이 트려한다.

잠실행 광역버스를 기다리는데 머리 위에서 벚꽃송이 터지는 소리 들린다.

새벽잠이 없는 뻐꾸기도 날라 와 뻐꾹 댄다.


카메라 렌즈후드가 없어져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아까 광역버스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내렸건만 알고 보니 잠기지 않은 내 카메라 후드였구나.


감기약도 빼뜨리고 오늘 왜 이러는지 또 건망증이 찾아온 모양이다.

참 오랜만에 감기에 걸려 보름 고생을 한다.

규칙적인 산행과 백팔배를 4년째 하기에 체력만은 자신이 있었는데 백운산 산행 후

느닷없이 감기에 걸렸다.


체력에 대한 자만감을 나이가 복수하는 모양이다.

햇수를 세어보니 꽤나 많은 세월이 내 몸에 눌러 앉았구나.

싱그러운 연두 잎이 나오는 쥐똥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하다.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갈 때 교통카드를 대면 소리가 두 번 난다.

엊그제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하철 직원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순간 죄를 진듯한 생각에 당혹감을 느끼며 신분증을 제시하지만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

지하철 역무원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너무 젊어보여 부정사용으로 적발하려 했다고 한다.


만 65세를 넘었다는 게 부끄러워 할 일도, 그렇다고 반가워 할 일도 아니다.

태어나 공부하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일을 하며 세금을 꼬박꼬박 내다가 그냥 찾아오는

나이를 맞았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오는 나이라 피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 남들 어깨 넘어로 보던 경로카드를 만들어야 하지만, 노령연금에

해당하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말 꺼내기가 쑥스러워 다른 사람에게 묻기가 어색한 경로카드와 노령연금.

나는 머리수술로 인한 장애등급이 있어 복지카드가 있지만,

건강한 초보 노년들은 신한은행에 가서 지하철 무료 교통카드를 발급받아야 하고,

노령연금은 지역 주민센터에 가서 신청을 해야 한다.


또한 노령 연금수급 대상자인지 궁금하지만 구차해서 찾아다니며 묻기가 힘들다.

나이가 대상이 되면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안내서 한 장만 보내주면 간편하게 해결될 텐데,

몰라서 때를 놓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어느 정치인은 "노인은 투표도하지 말고 집구석에 있어라."라고 했다가 호되게 혼난

경우도 있다.

노인을 개인이나 국가의 재앙으로 보는 그 정치인도 우리나이 또래인데 지금도

국회의원으로 잘 살고 있다.


긴 세월 국민의 4대 의무를 이행하면서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 공헌했는데 나이 먹은

댓가로 노인을 홀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노인이 노후에 조금 받는 혜택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카드도 신한은행 하나로 제한 한 거도 굳이 은행원 출신임을 내세우지 않아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 은행을 한 곳으로 제한함은 가급적 해주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하는 제도가 아닌가.


65세 이상 노인은 세금이나 축내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기에,

노인 경로우대카드는 버림받을 나이를 입증하는 증표가 아니라 그동안

국가와 가정에 기여한 데 대한 증표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지 말고 기를 펴자.


07;00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예상한대로 차가 많이 밀린다.

한식이 이미 지났는데 오늘도 성묘 차량인지, 봄꽃나들이 차량인지 꼬리를 길게 물어

달리지 못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고,

간밤에 과음을 했는지 코를 고는 소리도 들린다.


목적지에 10시면 도착하려나,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니 밀리면 밀리는 대로 차에서 스치는 풍경이나 즐기자.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엔 연둣빛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이틀 전 주룩주룩 내린 봄비는 자연에 보약을 선물했구나.


재산이 얼마나 되어야 부자(富者)일까.

차이는 있겠지만 은행원의 잣대로서는 최소 수십억 원에서 백억 원은 되어야 부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


봉급생활자는 물론이고 사업을 해도 웬만해선 부자 되기가 힘들다.

그러나 돈과 재산이 없어도 부자(富者)로 사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친구가 보관해온 수십 년 전의 명함은 옛날의 추억이 쌓였다.



조기출근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에도 출근은 다반사였을 때,

어쩌다 연휴라도 걸리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기거나 쪼개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런 세월이 지난 후 백수가 되니 남는 게 시간이라 시간부자(時間富者)가 된다.



백수로 산지 9년,

이제 부자에 대한 나의 관념은 바뀐다.

아들 내외가 분가를 한 덕분으로 아내와 같이 쓰던 서재를 혼자 쓴다.


서재의 서가(書架)에 책을 한 권 두 권씩 꼽다가 줄을 바꿔 또 꼽고 나니

서가에 빈틈이 없어서 서가를 또 늘려야 하는 고민 많은 책부자(冊富者)가 되었다.


눈이 아파도 읽고 싶은 책들이 서가에 가득 차고 책상 위에도 즐겨 읽는 책들이 쌓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항상 아쉬웠던 시간도 철철 넘칠 정도로 남아돌아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책이 많아도 예전처럼 풍요롭지 못하다.


책도 서가에 빈틈이 없으니 원함이 이루어진 후에 겪는 증세인가.

마음 한구석이 공허(空虛)할 때가 종종 생긴다.


큰 대가(代價) 없이 무심코 누리는 것에 대한 무관념 증후군이라 할까.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질 때는 여행이 최고의 활력소다.


혼자만의 여행도 좋지만 때로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특히 억겁의 연(緣)을 가진 친구라면 더욱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친구다.


오늘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니 서로 '친구부자(親舊富者)'가 된 셈이다.

오늘만큼은 돈, 권력, 명예를 가진 부자가 아니라 친구부자로서 추억을 쌓아야겠지.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으로 지위, 명예, 재산보다는 친구가 많고 적고,

나 자신의 영혼이 친구들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10;30

안인진리에 도착해 산행준비를 한다.

엷은 해무(海霧)를 뚫고 따뜻한 해풍이 나를 맞는다.




1996년 잠수함을 타고 숨어들었던 무장공비 일당이 쫓기며 도주로로 택한 곳이

지금 내가 오르려 하는 괘방산이다.


산불방지 입산 금지를 확인하려고 강릉시청에 확인하니 청학산 쪽은 입산금지라고

안내를 하기에 무장공비들의 자취를 쫓지는 못하고, 정해진 등산로를 이탈할 수가 없다.


1996년이니 벌써 21년이 지나간다.

북한 인민무력부 소속 상어급(350톤) 잠수함이 동해안 일대에서 정찰 공작활동을 하고

북한으로 복귀하다가 이곳 안인진리에서 좌초를 하자 26명의 승조원은 잠수함을 버리고

강릉해안으로 침투한다.


그들은 등명 낙가사 북쪽 약 500m 지점의 해변으로 들어와 괘방산 줄기를 타고

달아나다 화비령을 지나 청학산에서 11명이 자살을 택한다.


우리 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소탕작전에 들어가 9.19일 강릉시 강동면 단경골에서

공비 3명을 사살하고 오후에는 칠성산 부근에서 4명을 추가로 사살,

9.20일 1명이 생포되고, 20일에는 오늘 우리가 오를 괘방산 코스의 당집 오른쪽 코스에 있는

청학산 정상에서 무장간첩 11명이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후 나머지 공비소탕을 위한 49일간의 작전이 전개되는데,

9월 21일은 아군 특전사 이병희 중사가 총상으로 전사하고,

9월 22일에는 무장공비 2명을 사살하지만 아군 송관종 일병, 강정영 상병이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 중 전사한다.


10월 9일은 민간인 3명이 살해당하고,

10월 22일에는 숙영 준비를 하던 표종욱 일병이 습격을 받고 전사를 한다.


11월 5일에는 인제 용대리에서 무장간첩 2명을 사살하지만 오용안 대령, 우황룡 소위,

강성민 상병 등 4명이 전사를 하고 13명이 부상당한다.


11월 5일을 끝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26명 중 24명이 사살됐고,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

되었지만, 아군도 전사 12명(예비군 1명), 경찰 전사 1명, 부상 27명, 민간인 4명이

숨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긴장하며 신문과 Tv방송을 보던 일을 기억하며 넓직한 마당 구석에 전시된

전투기로 눈을 돌린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였던 F5A/B는 1969년 소흑산도 간첩선 격침, 1970년

영덕 간첩선 격침, 1983년도 동해에서 구 소련의 Tu16 요격 등 40년 동안 영공방위를

하다 2005년 10월 31일 퇴역하였다고 안내문에서 전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자유의 투사로 애칭 하었던 전투기 F5AB는 1976년도까지

F86 전투기 대체로 총 128대가 도입 되였다.


F5A 전투기 전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74대나 도입된 팬텀기도 전시되어 동해바다를 노려본다.


안보전시장을 보며 나라의 장래에 대해 걱정이 된다.

박대통령의 무능과 여인들의 국정농단에 의해 탄핵과 파면 그리고 구속이라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고 급기야는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난 심각한 고민을 한다.

그동안에는 보수우파로 40% 범위 내에 포함되니 후보자가 결정되면 망설임 없이

투표를 했지만 이번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안보불안감을 느끼는 종북 좌파를 찍기는 무조건 싫고, 머저리 같은 보수 우파는

믿음직스럽지 않고, 또한 얼치기 좌파도 싫으니 도대체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동안은 그냥 편하게 선택을 했는데 이번엔 내가 선택을 강요받는 초유의 선거가 됐다.


내 성향에 맞는 보수후보는 지지율이 한참 바닥이다.

내 성향에 맞춰 투표를 해야 할지, 전략적으로 중도후보를 찍어야 할지,

무조건 싫은 후보를 피하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당선 가능성이 있는 덜 싫은 후보를

선택해야 할지,


아님 이도저도 싫으니 국민의 의무를 포기하고 산으로 도피를 해야 할 것인지

요즘 마음이 착잡하다.


10년 좌파 하는 꼴에 진저리를 쳤고, 다시 바뀐 무능한 보수우파에 많은 실망을 했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괘방산은 답을 주려나.


이젠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게 문제가 된다.

이를 걱정하고 나서는 국가의 큰 어른이 없기에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위령탑을 보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


10;38

산행은 2코스인 안인진 전시장~삼우봉~괘방산~285고지~당집~183고지~정동진역으로

이어지는 8.3km 거리에 3시간을 목표로, 산행 팀과 해파랑길 트래킹 팀 두 팀으로 나눠서

오후2시 정동진역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모자를 썼어도 뙤약볕이 따갑다.

이 길로 30여 분을 올라야 지능선길을 만나 제대로 산 맛을 볼 텐데 그냥 참고 묵묵히 오른다.


휴일의 안보전시관엔 들락거리는 사람이 없는지 정적에 쌓였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슬슬 달아오른다.

영상 20도의 날씨는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며 땀을 흘리게 한다.


봄이 실종되고 여름이 곧바로 온 모양이다.

긴팔소매 옷이 부담스런 날씨라 반팔 옷을 챙겨와 미리 갈아입은 친구들이 부럽다.



바다가 조용하더니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달려든다.


                 [             훈풍


                    스치는 바람결에 흰 포말을 그리는 바닷물

                    봄은 저 건너편에서 물결 따라 오고 있구나.


                    스치는 바람결에 마음이 찰랑거리며

                    잔잔한 파문이 이니 봄은 봄인가 보다.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며 가볍게 머리칼을

                    날리는 여인 사이로 진달래꽃 이파리 사라진다.


                    봄향기 잔득 먹은 훈풍이 파란 풀밭에 스며들고

                    나는 봄노래를 부른다.                                        석천   ]


전망대에서 보는 동해바다는 파도도 없이 잔잔한 호수로만 보이고 떠가는 배도 없다.

그냥 산바람 바닷바람이나 맞으며 산행을 즐기라고 하는 모양이다.


11;04

임도를 따라 굽이도는 고개를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임도가 중간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직선(直線)은 사람이 만들고 곡선(曲線)은 신(神)이 만든 선(線)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만든 곡선이다.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는 건물을 디자인 할 때 직선을 없애고 곡선을 최대한 살렸다.

실제로 천체(天體), 지구도 사람과 동물의 몸까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은 곡선으로 이뤄진 물체를 보거나 만질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특히 산에서는 곡선으로 이뤄진 고갯길이나 산허리로 난 길을 만날 때 편안함을 느끼지만,

장가계 천문산에서 만난 고갯길은 공포와 스릴을 만끽하던 길이었지.


문득 2015년 4월 장수 삿갓봉(1,114m)에서 만난 고갯길과 2011년 4월에 만났던 속리산

말티재가 떠오른다.



11;12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 삼거리에 도착한다.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엊그제 객산에서 만난 진달래보다 색이 진하다.

이틀 전 내린 비로 산과 들이 꽃 바다가 되었다.


때를 제대로 알지 못한 철쭉도 피었고, 언제 필까 두근거렸던 매화는 서서히

낙화(落花)가 되기 시작하고 목련과 벚꽃도 활짝 피었다.  


11;18

삼거리에서 6분을 오르니 작은 돌과 큰 돌이 함께 쌓여 커다란 봉분이 되었다.


고려산성지라는데 옛적에 봉수대였는지 안내판도 없고, 괘방산에서 아직 제대로 된

산성터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고려산성지라는 이름도 쉽게 납득이 되지를 않는다.




제비꽃이 피었으니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왔겠구나.


제비꽃이 필 때는 어김없이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오랑캐꽃'이라는 별칭도 있는

노랑제비꽃을 정상 부근에서 만난다.



절벽에 바짝 붙어 진달래가 피었다.


멀리 박무 속에 흐르는 유장한 능선은 설악산 능선인가.

거대한 능선이 꿈틀거리다가 슬그머니 박무 속으로 사라진다.



해풍이 몰려와 땀으로 젖은 몸을 말려준다.

걷어 올린 팔소매를 슬그머니 내린다.


뾰족하게 솟은 바위 아래는 천길 단애(斷崖)다.

바람은 동해바다 냄새를 품어 비릿하다.


능선 길을 걸으며 바다풍경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다의 모습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괘방산 정상(399m)에 정상석이 보이질 않는다.


내가 잘못 알았나,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가장 높은 봉우리고 내 고도계는 400m를

표시하는데 잠시 쉬어가자.




12;10

진행방향인 정동진까지 5.25km가 남았고, 등명 낙가사가 왼쪽 1.7km 거리에 있다는

이정표가 말없이 서있다.


등명 낙가사 일주문 옆의 등명약수 맛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났기에 탄산수 물맛을 보고

싶지만 진행방향이 아니라서 들릴 수가 없다.



수학(修學)하는 사람이 3경(三更)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가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등명사(燈明寺)라는 이름이 조선 초기 숭유억불 정책을 펼 때

낙가사로 바뀌었는지 언제 바뀌었는지 자료에는 없다.


1977년 인간문화재 유근형씨가 심혈을 기울여 청자 오백나한을 빚어 영신전에 모셨다는데,

제각각 모습이 다르고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하니 몸과 마음이 편한 날 혼자라도 찾아야겠다.




철조망에 오방색으로 만든 무수한 리본이 붙었다.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커다란 두루마기에 적은 방문(榜文)을 걸어

알렸다는 괘방산(掛榜山)의 분위기에 맞게 리본은 스치는 바람에 휘날린다.



청명 한식이 지나고 꽃을 재촉하는 봄비가 오더니 화답이라도 하듯 꽃들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


봄바람이 한번 쓸고 지나는 자리마다 꽃들이 우르르 피어나고,

봄비가 떨어진 땅에는 어김없이 파란 풀과 봄맞이꽃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겨울엔 춥고 힘들어하던 숲의 나무들이 기가 쫙 퍼져 온몸에 수액이 잘 도는 모양인지

숲은 화신풍(花信風)을 잘 받아들인다.


타포니 현상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에 잠시 앉아 울창한 소나무를 바라보며

코감기로 잔뜩 막힌 콧구멍으로 훈풍을 억지로 들이마신다.



12;32

괘방산의 전설 당집을 만난다.

돌담을 두른 아주 작은 당집은 누구를 당신(堂神)으로 모셨을까.


당신을 모시는 집을 원당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대개 나무나 돌을 할아버지 할머니 등으로

인격화하여 모시기도 하지만 여기 당집은 무엇을 모셨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빗자루로 정갈하게 쓴 마당이 너무 한적하고 괜히 접근하기가 싫다.



여인들과 그들의 일당이 벌인 국정농단으로 세상이 시끄럽다가 서서히 정리가 돼간다.

박대통령과 최순실은 구속이 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농단(壟斷)이라 함은 언덕 롱(壟)에 끊을 단(斷)으로 '깍아 세운 듯 높은 언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시장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잘 팔리는 물건들을 매집매석으로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이다.


국정농단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고 어색하다.

차라리 국정회롱(國政戱弄)으로 말을 바꾸고 국정회롱을 한 일당들이나

희롱을 당한 사람들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밥을 주지 말고 이런 당집으로 유폐를 시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12;32

목적지인 정동진까지 아직도 3.9 km가 남았다.

두 시까지 도착하려나.


'꿩의바람꽃' 세 송이를 만난다.

급히 찍으려 하니 초점이 잘 맞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3대 인연을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이라고 하며,

지독한 인연을 억겁(億劫)의 인연(因緣)이라고 하지.


시간을 따질 때,

눈 깜작할 사이를 찰나(刹那)라고 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시간은 탄지(彈指)라 하며,

숨 한 번 쉬는 시간을 순식간(瞬息間)이라고 한다.



여기서 겁(劫)이란 선녀가 비단 옷을 입고 사방 3자(尺)의 바위 위에서 춤을 추어

닳아 없어지는 길고 긴 시간을 일컫는 말이라는데,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년을 '한 겁'이라고 하니 상상하기 조차 불가능한 시간이다.


더 계산하기 힘든 것은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스칠 수 있고,

2천겁의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하루 동안 동행을 할 수 있으며,


5천겁의 인연이 되어야 이웃으로 태어나고,

6천겁이 넘는 인연이 되어야 하룻밤을 같이 잘 수가 있으며,

억겁의 세월을 넘어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나랑 같이 산행을 하는 친구들은 대단한 인연이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최소한 일천 겁 이상을 뛰어넘은 인연으로 귀한 존재라니

상상하기도 힘든 인연이라 서로를 소중하게 여겨야겠다.



내가 저곳을 돌아 여기까지 왔구나.

언제 또 오를지 모르겠지만 내가 걸어온 유장한 능선을 향해 손을 흔든다.


지도상에는 당집을 지나 서낭나무가 있다는데 만나지 못하고 작은 봉우리를 만난다.

조금 전 만났던 소나무에도 아무 표시가 없었으니 어느 나무가 서낭나무일까.


212고지를 오르며 다시 숨은 가빠진다.



특이하게 작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탁 트인 바다를 기대하건만 아지랑이 속에 산줄기만 일렁인다.



겹겹이 주름잡은 능선이 일렁이는데 유감스럽게도 어딘지 모르겠다.

또한 모르면 어떤가.


마지막 183봉을 오르며 설악산 주능선을 바라본다.


14;00

약속된 장소에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 도착한다.




차가 질주하니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화우(花雨)는 쓸쓸함인데 고작 열흘도 못 채우고 바람에 낙화(落花)되니 아쉽다.


가뭄에 비가 왔다고 봄꽃들이 동시에 피었다.

계절이 뒤죽박죽이 된 건지 봄을 생략하고 바로 여름으로 왔는지 더위를 느낀다.


16;30

빈 배 위에 혼자 앉은 괭이갈매기가 외롭다.

다른 놈들은 먹이를 먹으려고 대드는데 유독 저 한 마리만 제자리를 지킨다.



17;06

아래는 꽃비가 내리고 훈풍으로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아스라이 보이는 설악산 계곡엔 눈이 흘러내린다.


눈이 희끗희끗 보이는 저곳까지 봄이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설악산자락을 바라보며 차는 달린다.



뒷좌석에서 친구들끼리 대화를 하다가 의견 충돌이 되어 심한 욕설이 들린다.

내가 단체행사에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라,

정민 교수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구과십육(口過十六)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미수 허목(許穆) 선생이 노인이 구과(口過), 즉 입으로 짓기 쉬운 16가지의 잘못을

경계한 내용인데, 

지금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그 글이 생각나 쓴 웃음이 나온다.



1. 행언희학(行言戱謔)으로 실없이 시시덕거리는 우스갯말이다.

2. 성색(聲色)으로 입만 열면 가무나 여색에 대해 말한다.

3. 화리(貨利)라 무슨 돈을 벌겠다고 재물의 이익에 관한 얘기를 한다.

4. 분체(忿㚄)로 걸핏하면 버럭 화를 낸다.


5. 교격(矯激)이라 남의 말은 안 듣고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

6. 첨녕(諂佞)이니 체모없이 아첨하는 말이다.

7. 구사(苟私)라 사사로운 속셈을 두어 구차스레 군다.

8. 긍벌(矜伐)로 내가 왕년에 운운하며 남을 꺾으려는 태도다.


9. 기극(忌克)으로 저보다 나은 이를 꺼리는 마음이다.

10.치과(恥過)는 남이 내 잘못을 지적하면 수치로 알아듣고 못 견딘다.

11.택비(澤非)라 잘못을 인정치 않고 아닌 척 꾸민다.

12.논인자후(論人訾詬)로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방하며 헐뜯는 일이다.


13.행직경우(倖直傾우)는 저 혼자 곧은 체하며 남의 허물을 들춘다.

14.멸인지선(蔑人之善)으로 남의 좋은 점을 칭찬하지 않고 애써 탈 잡는다.

15.양인지건(揚人之愆) 남의 사소한 잘못도 꼭 드러내 떠벌린다.

16.시휘세변(時諱世變)은 당시에 말하기 꺼리는 얘기나 세상의 변고에 관한 말을 하는데,

    이런 노인일수록 입에 말세란 말을 달고 산다.<출처; 조선일보 정민교수 세설신어>


허목 선생은 나이 들어 입으로 짓기 쉬운 허물 16가지를 위와 같이 조목조목 나열한 뒤

"삼가지 않는 사람은 작게는 욕을 먹고, 크게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

마땅히 16가지 구과를 범하지 않으려면 입을 꾹 닫고 침묵하면 된다."라며

어떤 말도 침묵만은 못하니 말을 삼가 하라고 교훈을 주는 거다.


과연 나 그리고 우리들은 말(言)의 처세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곰곰이 되새기며

구과십육(口過十六)을 마음속으로 담는다.


울산암에도 어둠이 내려앉고 차는 귀경을 서두르며 서울을 향해 달린다.



21;00

비 온 뒤 내집 담벼락 밑에 풀들이 마구 솟아나고,

매화와 목련꽃은 어느새 떨어져 파란 풀들의 사이에 잔해를 남겼다.


며칠간 심한 미세 먼지로 시계(視界)가 매우 흐렸어도,

내가 집을 비웠어도 백운산에서 만났던 봄의 화신은 어느새 여기까지 따라 왔구나.


가로등아래 벚꽃 핀 길을 걷는 내 발자국도 경쾌한 소리를 낸다.

이래서 화풍(花風)에 꽃이 핀 봄은 좋은가 보다.


가고 오는 자연의 이치, 무위(無爲)의 자연의 섭리를 보며

봄이 문득 달아날까봐 조바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 역시 자연의 순리에

순응 하겠지.


                                          2017.  4.  8.  강릉 괘방산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