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27 분당 영장산(413.5m)의 고뇌(苦惱)

김흥만 2017. 5. 8. 21:13


2017.  5.  6.  04;30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피곤한 사람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좋아할 거고,

뚱뚱한 사람은 먹는 시간을 좋아하며, 수다스런 사람은 남들과 떠드는 시간을 좋아하고,

술꾼은 술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겠지.


나는 어느 시간을 가장 사랑할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단연 새벽시간이다.

남들이 다 자는 시간, 자연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간의 적막을 나는 사랑하는 거다.


Tv를 켜니 탐욕에 찌든 정치꾼들이 보이기에 서둘러 SBS로 돌린다.

춘천시향에서 연주하는 페르시아의 사리아드왕과 세헤라자데의 사랑을 묘사한 

'세헤라자데'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왕비가 흑인노예와 간통하는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을 살해한 왕은 여자의 불성실을

증오하며 온 나라 안에서 미인을 골라 하룻밤만 자고 사형(死刑)에 처한다.


왕의 잔학에 나라 전체의 부모가 떨고 있던 차,

재상의 딸인 언니 '세헤라자드'가 동생인 '둔야자드'와 짜고 왕의 침실에 든 동생이 언니에게

이야기를 부탁하자 언니인 세헤라자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1,000일 동안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를 '천일야화'라 하며 40년 전 지인의 부탁으로 산 천일야화라는 책은 오래 전 버렸지만

스토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중에 왕비가 된 그녀의 이야기에서 유명한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 '신드바드의 모험' 등이 탄생하게 된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관현악곡을 4악장까지 들으며,

문득 2009년 세계 피겨 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이 곡을 프리곡으로 선택하여

멋진 연기로 우승하였던 장면을 떠올린다.


백팔배를 마치고 서재 한구석에 있는 소니 오디오에 눈길이 간다.

오래 쓰다 보니 수명이 다했는지 손볼 구석이 많아 보존과 폐기의 결단을 망설이게 하는

오디오,


마땅히 살 만한 거도 없기에 고쳐 듣자니 비용이 많이 들고, 새로 사자니 정이 많이

들어 난처하게 만들기에 오늘 산행 후 '세헤라자드'곡을 한 번 더 듣고 결정하기로 한다.


08;40 분당 야탑역

어제는 낮 기온이 27도나 되는 무더운 날씨였기에 여름 산행복장을 하니 다소 썰렁하다.

출발시간은 되어가고 산행하기로 약속하였던 친구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광장 꽃가게에서 분주하게 상품을 진열한다.

무슨 꽃이지?

가까이 다가가 리본을 보니 어버이날 꽃을 준비하고 있는 거다.


벌써 어버이 날인가,

5월은 근로자의 날, 석가탄일,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이

있어 참 분주한 달이구나.

현역시절엔 여기저기 챙길 데가 많았는데 지금은 챙길 데도 없으니 세월 쌓인 황혼을 원망할까. 


아침부터 부는 강풍으로 길가에 핀 '흰씀바귀'가 마구 흔들린다.

하늘은 파랗고 햇빛도 말짱한데 중국에서 넘어오는 황사로 인해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경보문자가 들어온다.


사람들은 잡풀이라 생각하겠지만 내눈에 보석으로 보이는 이 씀바귀도 오늘 하루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겠구나.


09;20

분당지역에 있는 영장산(靈長山 413.5m) 들머리에 선다.


영장산 지도를 보니 성남과 광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배재고개~망덕산~검단산~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산이구나.


도심에 있는 산답지 않게 초입부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5분을 헉헉대고 올라오니 평지가 펼쳐지고 열린 숲은 봄빛을 그려낸다.

연둣빛에서 녹색으로 바뀌는 숲의 시간에는 욕심도 집착도 없는가 보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면 모질었던 시간도 지나가고 어딘가에 놓아두었던

나의 시간을 재발견 하겠지.



산길에서 보이는 친구들의 뒷모습은 함께 불도(佛道)를 닦는 벗은 아니지만

도반(道伴)의 길을 걷는 모습과 같기에 천천히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이 길은 번뇌(煩惱)가 그친 길이라 여기를 걷는 것만으로도 해탈(解脫)이 되는 길이다.

사유(思惟)의 숲길은 집착을 끊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말라고 한다.


09;40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동안은 텅 빈 목소리였지.

다시 바람소리 들리고 아까시향이 콧구멍으로 스멀스멀 들어온다.


나이가 드니 산행을 하면서도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한 것처럼 세월이 쌓이면 늙고, 아프다가 죽음에 직면한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더라도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으며 언젠가는 괴로움을 보게 된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주변에 늘 있는 거지만 막상 나에게 닥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과 생물법칙에 따라 생로병사는 괴로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도 말이다.


세상은 영원한 게 없고 무상(無常)할 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나이고 나의 자아(自我)라고 할 수 있지.

또한 나, 자아, 나의 것에 집착을 하면 고통이 생기고,

그것에 집착을 하지 않으면 무아(無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석가탄일에 이어 어린이날도 지나고 며칠 후면 대통령 선거일이다.

살만큼 살았는데도 선거에 연연하니 마음을 비우려면 아직도 먼 모양이다.


달마는 "마음은 모든 성자의 근원이며 만 가지 악(惡)의 주인이라,

해탈(解脫)의 즐거움도 자신의 마음에서 오며, 윤회의 고통도 마음에서 온다."라고 했다.

따라서 마음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문이요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라고 한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열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 없고 나루터를 알면 차안(此岸)을 떠나

강 건너 기슭인 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 없다는 것이다.


10;10

종지봉(227m)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불교신도는 아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

이 글에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

명확하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서 헤매니 내가 마땅히 삼계의 고통을 다 편안케 할지어다.'


인간을 비롯한 이 숲의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각기 하늘 위 아래 홀로 존귀한 존재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상관관계가 되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자비는 무엇이고 연민은 무엇일까,

자비(慈悲)는 중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연민(憐憫)은 그냥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기에서 선(善)이라 함은 착하고 건전한 것을 증가시키고 악하고 불건건한 것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Tv 토론에서 자기만이 옳고 절대 진리라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니 혐오감을 느낀다.

역지사지(易之思之)라!

모든 것은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사유(思惟)를 하면 질투, 혐오, 분노, 집착,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는

모습이 한심하다.


자연에선 가을에 낙엽이 지면 있던 게 사라지고, 봄에 새싹이 나오면 없던 것도 있게 된다는

대자연의 단순한 법칙을 그들만은 모르고 사는구나.



영장산 숲 속에는 장쾌한 풍경은 없지만 대신 안온(安穩)을 준다.

그동안 쌓인 눈이 녹고, 찬바람이 온화(溫和)한 바람이 되니 모든 것을 잃었던 숲은 생기가

돌고 다시 세상을 얻기 시작한다.


대도시 안에 있는 산이지만 산길을 둘러보니 강원도의 산 못지않게 산첩첩 골첩첩의 모습이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마구 쪼아대고 어치가 짹짹댄다.

귀를 기울이면 따오기 울어대는 소리도 들리려나.



10;45

날카로움은 없고 부드러움만 있는 산,

뾰족한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행을 하는 육신이 편하니 문득 평안(平安)과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쉽던 길은 500m 를 남기고 제법 숨이 차게 한다.


이 길은 정상을 오르기 위해 있는 길이다.


엄격한 산세도 없는 곳을 오르며 저곳에 오르면 세상이 달라 보일까.

힘들면 힘든 대로 올라야 하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11;20

3.8km의 산길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 정상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지독한 감기로 술을 마시지 못한 한 달이라는 기간에 카메라 렌즈 후드를 잃었고,

이어 등산용 장갑을 잃어버리더니 이번엔 주흘산 산행을 마치고 8년을 썼던 등산용 모자를

잃었다.

다음엔 무엇을 잃을까.


평생 술꾼으로 살다가 제대로 마시지 못한 기간에 엉뚱하게도 이것저것 많이 잃었으니

술이라도 편하게 마셔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정상은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다.

술 한 잔을 하는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정상에서 만난 '각시붓꽃'의 보라색 잎에 먼지가 있길래 입김으로 불어 날리고 포커스를

맞춘다.


사람들이 마구 밟아대는 정상에 핀 각시붓꽃,

이곳도 사람과 동물, 식물이 공존하는 곳이로구나.


나무의 가지마다 물이 잔뜩 오르고 봄 향기를 마구 내뿜는 산속에서 핀 꽃,

겨울의 추위가 없었더라면 이런 꽃과 향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지나간 겨울에게 고마움을 느끼니 나에게 하루의 산행이란 짧은 수행(修行)이기도 하다.


11;40

하산을 하기 전 영장산 정상석(413.5m) 앞에 선다.


영장(靈長)이라 함은 '영묘한 힘을 가진 것의 우두머리'라는 사전적(辭典的) 의미가 있는데,

정상석 앞의 친구들 모습을 보며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파란데 믿지 말고 조심하라는 경고문자도 날라 오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목구멍을

체크하니 모래가 들어간 것 같이 따끔거린다.


서둘러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는 모습을 저 태극기는 어떻게 생각할까,

3일 후면 대통령 선거인데 어찌 될 지 저 태극기는 알까.


태극기에서 보이는 문양이 청색 50%이고 붉은 색은 40% 미만이니 내가 뜻한 대로

되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바라는 후보가 당선되길 간절히 빈다.


요즘은 하루걸러 뿌연 도시가 되었다.

매일 날아오는 황사,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사람과 자연은 멍들어간다.

어젯밤 5mm 이내로 비가 온다는 예보도 맞지 않았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흩날린다.


바람이 부니 저쪽에 있던 먼지마저 내게로 날아오고 눈이 빡빡해진다.

안구건조증에 쓰는 인공눈물이 배낭 속에 있으니 참고 하산할 수밖에 없다.


또 바람이 불고 산은 소리를 내어 운다.


손가락에 지문(指紋)이 있듯이 목소리에도 성문(聲紋)이 있다.

내가 내는 소리는 성문을 확인도 못한 채 금세 바람소리에 묻힌다.


소나무 숲은 상생(相生)이다.

곱게 뻗은 소나무와 휘다가 곧추 세운 소나무가 서로 다투지 않고 자기의 영역을 지킨다.


12;15

산불감시탑에 올라가 분당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황사바람이 심해 포기를 한다.


13;00

지는 꽃 사이를 내려오며 3시간 반이 걸린 7.8km 산행을 끝낸다.

꽃이 소박하니 바람도 소박한 바람이고 지난날의 먼지가 땀과 함께 내 몸에서 훌훌 떠나간다.


산행 뒤풀이로 한잔을 더한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3일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이다.


누구를 찍고 과연 누가 될 것인가.

누가 되던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에 막혀 개혁과 성장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성장 동력은 멈춰가고 노령화는 급속히 진행되는 우리나라,

사회 구성원 사이의 공통 가치도 해체되었기에 유독 님비(Nimby) 현상이 강한 나라.


조선일보 5월 6일자 A26면의 기사에 의하면,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이미 선거는 끝났다. 극우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예전 서울 부시장 시절 표독스런 얼굴로 말단 공무원을 무릎 꿇리고 폭행하던

전직 국무총리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고,


정권이 바뀌면 이재명 성남시장이 국정원장을 맡아 작살낼 놈을 작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폭언도 나오고,

무슨 일만 생기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 들고 정권퇴진과 하야를 외치며 재미를 본 세력이

가장 당선이 유력하다고 하니 난감하다.


민족 해방(NL)론자 리영희 교수는 모택동 체제와 수천만 명이 학살되던 문화혁명을

찬양했다.

그런 리영희 교수를 자기 인생의 큰 스승이라고 하는 문재인은 월남 패망을 보면서

'진실이 승리하는 희열을 느꼈다'라는 사람이다.


우리 국민은 누구를 선택할까.

주적(主敵)을 주적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람, 천안함의 북한 폭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문득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며 즐거워야 할 술잔 앞에서 마음이

우울해진다.


                                                  2017.  5.  6.  분당 영장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