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7. 09;12
한 손에 T map을 켜고 창경궁 홍화문을 찾는다.
1978년 당시 창경원 밤 벚꽃 관람을 하고 처음이니 방향을 도저히 잡지 못하겠다.
혜화역에서 헤매는 중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여인이 창경궁 방향을 가르쳐 준다.
그윽한 궁궐의 담벼락 아래 앞서 걷던 사람이 사라지고, 이제부턴 나 혼자 걷기에
카메라를 꺼낸다.
월관문(月觀門)의 빗장은 굳게 잠겨서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다.
사도세자의 사당(경모궁)이 창경궁 맞은 편 서울대 의과대학 자리에 있었다는데,
정조가 이 문을 통해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했다는 창경궁의 동북 궁문은 정조가 1779년에
세웠다니 어느새 240년 세월이 내려앉아 단청이 다 벗겨졌다.
현재 위치에서 약 100 m를 내려가야 홍화문(弘化門)이다.
궁궐 담벼락을 걸으며 생각에 빠진다.
도로엔 차 몇 대만 다니고 그나마 앞서 걷던 사람도 사라졌다.
이 큰 도시에서 나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조선시대 송금(松禁), 우금(牛禁), 주금(酒禁)에 이어 가장 가혹하게 다스렸던 궁금(宮禁)에
주눅이 든 백성들은 아직도 궁궐의 담벼락이 무서운 모양이다.
내 키가 174cm이지만 폴짝 뛰어도 궁궐 안자락을 볼 수 없는 높이의 담장은 나를 왜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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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은 외국인 관광객과 학생들로 점차 소란해진다.
건축의 문외한이라 무슨 기법을 사용하여 거대한 문(門)을 만들었는지 양 날개는
하늘을 향해 무한비상(無限飛上)을 한다.
요즘 새로 당선된 문 대통령의 낮은 자세가 화제다.
취임초기 소통을 하려는 자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도 왕이 백성을 직접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영조는 이곳 홍화문 앞에서 균역법에 관한 찬반여부와 의견을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또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들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는데 그런 군주를 이 시대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문득 소통은커녕 청와대의 거울공주로 불리던 박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창경궁 안으로 들어가 명정문(明政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곳이 청와대지만,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시대 참담하게 격하되었던
창경원 즉 창경궁 이렇게 다섯 궁궐이 중추였지.
1천만 명이 와글거리며 넓은 도로와 고층빌딩, 많은 차량이 북적되는 서울의 한복판,
나는 궁궐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찾고자 고궁(古宮)을 한적(閑寂)하게
걷는다.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조선(朝鮮),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미(美)를 만날 수 있는 창경궁의 뜨락을 나는
지금 걷는 거다.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넉넉한 웃음을 짓는 친구의 모습을 재발견한다.
심각한 봄 가뭄은 궁궐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옥천교 아래 바짝 마른 금천(옥천)이 애처롭다.
그래도 어디서 수기(水氣)를 취했는지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에는 열매가 자란다.
슬그머니 살구를 따 입에 넣으니 시큼한 맛이 돌며 군침이 생긴다.
다리에는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 도깨비 얼굴을
그렸다는데, 왕의 말 한마디에 산천초목이 떨고 온 백성이 왕의 발아래에 엎드리는
위엄만 가지고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지 못하는지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다리를 보며
쓴 웃음이 나온다.
금천을 지나 명정전(明政殿)을 향한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로 명정전은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되었는데,
조선 왕조는 메인 (main) 궁궐로 경복궁을 법궁(法宮)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였다고 안내문에 기록되었다.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좋아했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창덕궁의 생활공간이 좁아지자, 성종(成宗)이 세조 비(妃)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새로 마련한
궁궐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창경궁이다.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한 궁궐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지어진 궁궐,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과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창경궁,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아담한 규모를 자랑하는 궁궐 위 하늘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동궐도(東闕圖)를 바라본다.
창경궁은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곳이 아니다.
창경궁은 창덕궁처럼 자연의 높고 낮은 자세를 거슬리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전문가들은 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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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회 금요포럼을 하기 위해서 40명이 모였다.
오늘은 고궁을 거닐며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를 듣겠지.
오랜 역사와 선조들의 삶 속에서 터득한 지혜와 슬기로움을 배우면 요즘 새로 바뀐
위정자들에 의해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해소가 될까.
높기만 한 홍화문보다 더 높은 하늘엔 흰 구름 피어오른다.
높다란 담벼락 안쪽에서 백성들과 단절된 삶을 사는 왕과 왕실 가족들.
위정자(爲政者)라는 정체(正體)는 무엇일까,
위정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대를 초월한 나는 오늘 왕(王)이 되어 이곳을 배회해야겠다.
1483(성종 14년)년 수강궁 터에 창건된 창경궁,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임금에 대한 분통으로 백성들이
경복궁과 함께 창경궁에도 불을 질렀다는 것이 팩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총명해 반대세력에 의해 탄핵 당하고 제주도까지 유배를 당했다가 죽은 광해군이
1616년 창경궁을 중건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동궁인 저승전과 내전이 소실되고,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亂)으로 동명전과 양화당 등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과 자경전을 건립하고,
이후에도 숱한 화재로 동명전, 환경전, 선인문, 위장소, 주자소 등이 소실되었으며,
1909년(순종 3년) 동, 식물원 조성으로 궁궐이 훼손되더니 급기야는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가 1983년 다시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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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서 세상의 부침(浮沈)이야 늘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
수백 년의 시공간(時空間)을 뛰어넘는 이기석 해설사의 강의는 시작된다.
열정은 참새라는 미물(微物)도 감동을 시키는구나.
다 같이 귀를 기울여 강의 들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도 짹짹거리지 않고 조용히
경청을 한다.
강의를 들으며 혹심한 가뭄으로 물 한 방울 없이 마른 금천 바닥을 본다.
최근 문 대통령이 4대강 6개보를 항시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그 지시를 접한 환경단체는 신이 나서 서로 축하를 하고, 농민들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며
망연자실(茫然自失)한다.
전국에 심한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물이 마르고, 논에는 물이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밭작물은 타들어간다.
모내기를 못한 농가는 올 농사를 아예 포기한다고 하는데 이런 비상상황에서
4대강 6개보의 물을 방류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너무 잔인하다.
농민의 생명과 같은 농업용수와 공단의 생명수인 공업용수를 그냥 흘러 보낸다니 속이 탄다.
물을 방류하기 전에 녹조 제거 및 분해 방법을 최대한 모색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농민과 국민들은 녹조가 문제라는 걸 알지만 먹고 사는 게 더 큰문제이다.
세계 최고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스위스 여행 중 가뭄으로 녹조현상이 생긴 거도 보았다.
40년 만의 최악이라는 가뭄이 왔으니 녹조도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하는데 정권이 극성스런
환경단체에 떠밀려 성급한 결정을 하였기에 농민들은 애만 태운다.
예전에 이런 극심한 가뭄이 들면 '명산에 묘를 잘못 쓰는 바람에 산신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며 남의 묘를 파헤치는 게 다반사요, 임금들은 머리 풀어 헤치고 식음을
전폐하며 석고대죄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금강보에서 도수로를 긴급히 만들어 보령댐으로 송수를 하며 난리를 치는 마당에
국가지도자라면 타들어 가는 농심과 민심을 헤아리고, 모를 다 심은 후 장마철에 보를
개방하면 녹조제거 효과가 더 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과 환경단체는 4대강 사업을 몹시 미워한다.
그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DNA를 계속 이어왔기에 녹조가 발생했다는
핑계로 4대강 사업의 효과를 철저히 무시한다.
최근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나왔다.
국민안전처의 발표에 의하면
4대강 사업 이후 이재민은 26,376명에서 4,005명으로 줄었고,
침수면적은 1만 600ha에서 29.7ha로 1/357,
사망 실종은 30.3명에서 2명으로 1/15,
도로, 하천, 수도 등 공공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피해액은 5,567억 원에서 978억 원,
자연재해 총 피해규모는 7,297억 원에서 1,229억 원으로 줄었다고 문화일보에 보도가
되었다.
폐족이 되었다가 거의 10년 만에 돌아와 정권을 잡은 386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않겠지.
천안함의 북한 폭침도 요즘에 와서 겨우 믿는 시늉이나 하니 저런 발표를 믿겠는가.
그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덕분으로 살기가 돌았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감췄던
속내가 한 달도 안 되어 서서히 드러난다.
보수정권을 친미(親美) 독재정권으로 비판하며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은 역사 국정교과서를 폐기하고 북한과 재접촉을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북한 핵억제를 위한 국제공조의 틈을 파 민간협력부터 서두르며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을 슬슬 흘리니 답답하기만 하다.
정3품의 품계석을 바라본다.
정3품 이상 당상관은 임금과 당상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을 한다.
당상에서 결정한 정책은 당하관이 집행을 하는데, 군주와 신하란 무엇일까?
군주(君主)가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고 결정과 지시를 하면,
신하(臣下)는 그 정책을 어떻게 집행할까 궁리하며 진행을 하는 거다.
정1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국무총리급.
종1품은 좌, 우찬성으로 부총리급.
정2품은 판서와 좌, 우찬성으로 장차관, 도지사, 광역시장, 대법원 판사, 총장, 교육감, 대장.
종2품은 참판과 관찰사로 차관보, 법원장, 검사장, 학장, 중장.
정3품은 참의, 목사, 도호부사로 관리관, 주임교수, 소장.
종3품은 집의사관으로 이사관이나 국장, 교수, 부교육감, 준장.
정4품은 군수, 사인, 장령으로 부이사관, 판사, 검사, 대령, 중령, 치안감.
종4품은 경력 첨정.
정5품은 현령, 판관, 지평으로 서기관이나 조교수, 교장, 군수, 소령, 경무관, 총경.
종5품은 청량, 교리로 사무관.
정6품은 좌랑 감찰이며 사무관, 면장, 교감, 전임강사, 대위, 경정.
종6품은 주부, 현감, 찰방.
정7품은 직장, 봉교, 참군, 사정으로 주사, 교사, 중위, 경감, 경위.
종7품은 저작, 부사정으로 주사보, 조교, 소위, 준위, 경사.
정8품은 서록, 부직장으로 주사보.
종8품은 부사맹으로 주사보.
정9품은 점자, 검렬로 서기, 상사, 중사, 경장.
종9품은 부사용으로 서기보급인데 지금의 하사, 순경의 직급과 비슷하다.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의 품계에는 편견을 별로 느끼지 못하나, 현재의 품계는 경찰보다
군인이 더 대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서 대위는 사무관 급인데 경찰은 경찰서의 과장급인 경정과 품계가 같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후 3~5년이면 대위로 승진하는데, 이와 달리 경찰관이
사무관급인 경정으로 승진하려면 15~20년 이상도 걸린다.
예전 보릿고개 시절 국가의 예산이 넉넉하지 못 하였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에게
상당한 권력을 주며 봉급을 넉넉히 주지 못하니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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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그림자 방향을 보면 명정전은 분명 동향이다.
무릇 임금이 있는 궁궐은 경복궁을 비롯하여 정남향을 봐야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풍수의
정설이지만, 창경궁의 외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 잃은 용상(龍床)이 외롭다.
용상을 보며 감방에 들어간 전임 박 대통령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소통부재와 국정농단이라는 이유로 받지도 않는 뇌물죄를 적용받아 탄핵이라는 명분으로
청와대의 용상에서 끌어내려져 감옥에 들어간 비운의 여인,
세상이 시끄럽다가 정권이 바뀌자 그동안 폐족(廢族)을 자처하며 숨죽여 지내던
귀두남면(鬼頭藍面)의 무리들이 대거 등장해 요직(要職)을 꿰찬다.
청문회에서 위장전입, 세금탈루, 병역비리는 기본으로 깐 사람들을 보니 그동안 세금 낸
것이 아깝고 분하다.
입으로는 적폐청산이요, 소통을 말 하면서 지난 정권 권력을 차지했던 사람들보다
지금 사람들의 행태는 예전보다 더 심하다.
그들의 뻔뻔스런 얼굴을 얼마나 더 보려나.
지금 당장은 권력을 새로 잡았기에 기세등등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른다.
모든 일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옛 현인들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며 지나침을 경계했는데,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라는 교훈을 우습게
여긴다.
일월오봉도를 보며 국정을 개혁하려고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다가 최순실과 국정농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감옥에 들어간 여인과 폭군으로 낙인 찍혔던 개혁군주 광해군이 대비가 된다.
광해군은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죄,
이곳 창경궁 등 궁궐 넷을 무리하게 중건해 백성을 괴롭힌 죄,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편든 죄를 명분으로 삼은
권력을 잃었던 서인(西人) 세력의 반기에 꼼짝없이 왕위를 빼앗긴 거다.
광해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14년 동안 경기 강화도와 충남 태안의
유배생활을 거쳐 1623년 제주성 안에 있는 '하늘 구멍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탱자나무
가시가 빽빽한 집'에서 산송장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4년 뒤 병사(病死)를 한다.
그가 죽은 날 7월 1일에 광해우(光海雨)가 내려 가뭄에 지친 백성에게 기쁨을 준다.
요즘같이 봄가뭄이 심한 때 태종우와 광해우가 내리려나 하늘을 보니 비는커녕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야속하다.
광해는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하듯 정말 폭군이었을까?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책을 간행했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다 망가진 백성 경제를 부활 시켰고,
망해가는 명나라 대신 신흥 강국인 후금(後金)나라를 인정하고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군사를 보내라는 명나라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음은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를
또다시 전쟁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라 요즘 북핵에 대비해 배치된 사드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위정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책였다.
임진왜란 이후 경제를 살리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던 개혁군주 광해군이 폭군으로
오명(汚名)을 쓴 역사를 이 향나무는 알고 있겠지.
지금 새로 정권을 잡은 문 대통령은 사드 배치의 절차상 정당성을 따진다.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부르지 못하는 대통령이
당장 하늘에선 북한의 미사일이 날아다니는데 절차의 정당성이나 따지고 앉아 있으니
수백만 수천만의 국민이 죽어나가야 정신을 차릴 건가.
군(軍)의 무기 도입은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힘이 된다.
손자병법 제3편 모공(謀攻)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또한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고 했다.
비밀도 비밀이 지켜져야만 힘이 되는 거다.
군부대 앞에서는 사진도 못 찍게 하면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처럼
최첨단 무기의 도입시기와 과정, 성능까지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나라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우리밖에 없을 거다.
도입된 사드 발사대가 2기인지 6기인지를 놓고 대통령과 청와대, 국방부가 벌이는
치졸한 행동을 국민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국민들에겐 이념이 문제가 아니다.
또한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죽고 사는 게 문제다.
강아지도 위협을 느끼면 주인을 무는 법인데, 국민들을 무시하는 위정자들의 처사를
끝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중국의 덩샤오핑 주석은 흑묘백묘론을 펼치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실용정신을 발휘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수천 발의 미사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한다면 더 많은 사드를
배치하고 그 사실을 대외적으로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게 원칙이라는 것을 위정자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낙선재와 경계한 함인정 담장가의 향나무에 다가가니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지나는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무의 향기를 보낸다.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문정전,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崇文堂),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경춘전을 지나 환경전 앞을 지난다.
정조와 현종이 태어난 경춘전(景春殿)은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황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경전 터에 선다.
1777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앞쪽으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향해 지었으며, 한중록(閑中錄)의 산실이기도 한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藏書閣)이 들어섰다가 1992년 철거되었다.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
사람이 만든 비밀의 정원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나의 설렘을 창덕궁 후원(後園)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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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 인원이 제한된 후원을 향한다.
대략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고자 웅성거린다.
저 담벼락을 통과하면 후원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맛보겠지.
임금과 임금의 여인들의 영욕(榮辱)이 점철된 곳,
아직은 통행이 재개되지 않아 정적(靜寂) 속에 뻐꾸기만 울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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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혔던 비밀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
비원(秘園)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후원의 입구에 선다.
들어가는 길 높은 담벼락은 정적에 싸이고,
들어가라는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설렘을 감춘다.
1분 후면 구중궁궐 중에서도 가장 깊고 그윽한 멋을 간직했다는 후원(喉園)으로 들어가겠지.
11시 정각이 되자 해설사의 뒤를 따라 200여 명이 우르르 들어간다.
첫 번째 만나는 부용지 호수와 주합루,
내가 이곳을 언제 와봤지?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로 기억되니 40년이 넘어 50년이 다돼간다.
나이 스물이 안돼서 들어왔던 곳에 반세기가 지나 초로(初老)가 되어 임금과 임금의 여인들이
거닐었던 곳을 걷는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 마다 만든 정원과 연못을 보며
당시 자연의 이치를 접목한 '박자청'의 작품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다.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자, 호익사 대장군이었던 박자청.
토목건축 분야에 대단한 능력이 있어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인 경회루를 8개월 만에 완공시킨 능력자 박자청,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판한성부사의 지위에도 올랐던 박자청,
내시로서 정일품까지 올랐던 공조판서 박자청은 창덕궁과 후원을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로 불규칙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배치를 하였다.
각기 종류가 다른 2,8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창덕궁,
여기 후원은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 그대로 남았다.
수많은 누각과 정자에 눈길이 간다.
저곳에선 어느 왕이, 어느 여인이 원대한 꿈을 품었다가 사멸(死滅) 되었을까.
죽어가는 고목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산산이 부셔진다.
바람에 흩어지는 시간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그냥 조용히 해설사의 말을 경청한다.
다시 길을 따른다.
구비 구비 시간이 빚은 곳에 여름이 성큼 왔다.
어느 곳에 간들 초록이 없겠느냐 만은 여기 초록은 특별하다.
금방 빗질이라도 한 듯 길은 정갈하고 하늘빛을 닮은 자연은 초록으로 색칠이 된 거다.
길은 유순하고 넓다,
유유히 흐른 세월을 담은 정자가 외롭다.
왕의 여인들이 사랑하고, 왕이 힐링을 했던 곳에서 그들 삶의 조각을 생각해본다.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되고 높이 12m, 둘레 228cm 나이는 약 400년으로 궁궐의
맏형이라는 뽕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옛날에는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가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고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함은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자 함이었다.
내가 숨쉬는 소리마저 사치스러운 곳,
가만히 지켜봐야 아름다운 후원이라는 자연에선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답다.
세월의 나이테가 낀 거대한 은행나무가 숲에서 빛이 난다.
존덕정 뒤편에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라는데, 둘레 5m, 높이 22.4m이며
나이는 약 250년에 이른다고 한다.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곳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긴다.
기온이 점점 오르고 목이 마르다.
이곳 저곳 곳곳에 정자가 많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은밀한 정자를
보았으니 다음엔 어느 정자가 나오려나.
볏짚으로 지붕을 두른 청의정은 작은 논을 끼고 있다.
후원 북쪽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玉流川)이라 한다.
1636년 큰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그 물은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는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졌다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말라간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오언절구
시(詩)를 바위에 음각하였는데 내 카메라의 성능으로는 잡지 못하겠다.
왕비가 누에를 치고 침실에 뱀이 들어올 정도로 자연과 가까운 곳이자 왕의 힐링 공간의
정자 지붕은 초가지붕이고, 왕이 직접 심었다는 춘당벼를 해설사가 설명을 한다.
왕의 마음을 잡았던 공간에서 왕은 무슨 가르침을 얻었을까.
자연과 인간의 솜씨를 더한 곳에서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를 가로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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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문 앞에서 오소리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다가 카메라를 대도 숨지 않고 유유히
나무 사이로 사라진다.
이 녀석들은 사람들이 저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창덕궁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세 그루라는데, 아까 뽕나무를 보고 지금은 거대한
음나무 앞에 선다.
귀신을 쫓아내고 행운을 가져온다는 음나무의 윗부분이 무슨 이유인지 잘렸다.
선조들에겐 음나무가 행운을 가져오고 연리목을 만들어두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만복이
깃든다고 알려졌다.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자귀나무(合歡樹)로도 효험이 없다면 4~5년 생 정도의 음나무를
연리목으로 만드는 처방도 서슴지 않았다니 참 재미있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어 약 9만 평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다는 후원을 벗어나며 궐내각사 규장각 뒤에서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향나무를 만난다.
다른 나무보다 더 방향(芳香)을 뿜어주는 향나무는 나무 색깔이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이라
자단(紫檀)이라 부르기도 하고 나무에서 향기가 나기에 목향(木香)이라고도 부른다.
나무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마음에 부정(不淨)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
이 신목(神木)은 이미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연결된 모양이다.
고궁 중에서도 창덕궁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많은 곳이다.
그 중에서 향나무, 뽕나무, 회화나무 군은 보았으나 다래나무는 보지 못하고 떠난다.
나중에 확인하니 내가 본 세 나무는 후원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으나 다래나무만은
별도로 관리사무실에 미리 신청을 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래서 공부나 여행에는 철저한 예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12;34
후원관람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내려온다.
돈화문 앞에는 거대한 회화나무 세 그루가 서있다
나뭇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하는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리는 회화나무는
양반을 상징하기에 양반 동네로 알려진 곳으로 가면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꽤 많다.
내 고향 진천엔 아예 회화나무(해나무 거리)거리라는 명칭도 있고, 괴산에 가면 회화나무
가로수도 많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로 귀히 여긴다.
주나라 때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三公)이 그 나무
아래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정사를 돌본 유래로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출세하였다가 관직에서 물러날 때 그 기념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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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년 동안 조선의 정궁 노릇을 한 창덕궁의 인정전 하늘엔 무심한 구름이 떠간다.
1405년 태종이 개성에서 재천도하며 지은 궁궐,
서울의 동쪽에 있다하여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는 별칭을 가진 창덕궁은
세종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정사를 보자 이궁(離宮)으로 쓰이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궁궐 중 유일하게 관람 시간과 장소를 제한하는 구중궁궐인 창덕궁,
5개의 궁전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창덕궁에서의 하루,
궁궐과 비밀의 정원에서 숨겨진 비밀을 보았으니 이렇게 예쁜 서양미인을 보며
궁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겠다.
이기석 해설사의 명강의는 이어진다.
나는 뒷전에 우두커니 서서 친구들의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어느 책에선가
본 글이 생각이 나 급히 몇 자를 메모한다.
나이가 들면 줄여야 할 것은 줄이고, 늘려야 할 것은 늘려야 하는데, 이것을 반대로
하면 망한다.
나이가 들면 우선 줄여야 할 네 가지로는
배속에 밥이 적게 들어가야 하고, 입속에는 말이 적어야 하고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하고, 밤중에 잠이 적다면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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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우리는 배 터지게 먹고, 쉴 새 없이 떠들며 세월을 반추한다.
입으로는 떠들면서 머릿속에는 온갖 궁리가 떠나지 않고,
또한 초저녁부터 잠이 들면 코를 골며 쿨쿨 잘도 자지만,
쓸데없는 궁리에 머리가 무겁고, 실컷 잤어도 몸이 늘 찌뿌듯하다.
현명한 사람들은 밥과 술은 조금만 먹고,
입을 열어 말을 많이 하는 대신 귀를 열어 많이 듣고,
생각은 단순하게, 잠도 조금 부족한 듯 자야 정신이 깨어 마음이 활발해진다고 교훈을 주는데,
그러나 오늘만은 비밀의 정원을 걸었으니 수진신록(修眞神祿)의 교훈을 무시하고
마음 편히 먹고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들자.
그래야 속도 거뜬하고 몸이 개운해질 거 같다.
황혼을 살면서 늘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돌아 다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많아야 하고,
질박함이 꾸미는 것보다 많아야 하고, 은혜보다는 위엄이, 다툼보다는 양보가,
들뜸보다 개결함이, 문밖에 나가는 것보다 문을 닫고 있는 것이 많아야 하며,
성냄보다는 기쁨이 많아야 한다는 복수전서(福壽全書)의 글이 요즘 세상 형편에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기본은 맞겠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진기(眞氣)가 쌓이고, 입을 다물면 기운이 흩어지지 않는다.
책에서는
화려함이 소박함을 못 이기고, 무게를 잡는 위엄이 따뜻하게 베푸는 은혜에 미치지
못하니 양보를 하고, 문을 닫아 걸고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한다.
안을 비우고 밖을 덜어낸다?
밖에서 나돌던 시간보다 안으로 향하는 시간을 늘리면 밖으로 나돌던 정신이 수습되며
차분해지고 내면이 충실해진다는데 만날 산(山)으로만 맴도는 나에게 필요한 충고겠지.
말이야 맞는 말이겠지만, 성인군자나 위선자가 아니라면
위와 같은 미사여구를 떠나 단순하게 느리게 살라고 나는 권하고 싶다.
그러면 없던 복도 생길 것이고, 건강도 제대로 챙기게 된다고 주장을 하는 거다.
조직이라는 수직의 세계에서 수평의 세계로 바뀐 백수건달의 일상에서는 늘 곁에 있는
소중한 걸 잊고 산다.
나이를 먹어 늙어지면 사람으로서 쓸 데 없어지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려울 때가 있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섭리가 공존하는 궁궐을 걸었더니 배고픔을 느낀다.
오늘을 즐기고 또 내일을 즐기려면 먹고 또 마셔야겠지.
술잔을 들자.
술잔은 비워야 채워지고,
마음은 비워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나를 비우면 행복이 찾아오고,
나를 채우면 불행이 찾아온다.
자세를 낮춰 서로를 위하고 이해를 하면 황혼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2017. 5. 27. 창덕궁 금요포럼을 마치고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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