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30 청송 주왕산<장군봉 687m>이 천상의 컬렉션을 펼치다.

김흥만 2017. 6. 22. 20:53


2017.  6. 15.

08;00

졸다가 실눈을 뜨고 지금 어디쯤인가 묻는다.

일상에 쫓겨 광속(光速)으로 사는 거도 아닌데 조금 졸면 어떤가.

졸다보니 황량했던 세상은 녹색으로 변했구나.


10;53

인생에서 대충이란 없다.

거친 숨도 쉬지 않고 달리던 차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슬그머니 선다.


청송의 주왕산 가는 길 중앙 고속도로 서안동 IC 1km를 남기고 차가 고속도로 중간에서 

멈춰 난감하면서도 참 재미있고 편리한 우리나라를 생각하며 짐짓 여유를 부린다.


기름 재고를 대충이라도 확인하지 않은 죄로 고속도로 갓길에서 30여 분을 기다리니

보험회사에서 달려와 주유 서비스를 해줘 무사히 다음 주유소까지 이동한다.


두타산의 험한 산속에서 자동차 열쇠를 분실하였어도 1시간 이내 신속히 달려온 서비스로

열쇠를 만들어줘 숙소로 무사히 이동하기도 하였고,


거창의 금원~기백산을 종주하며 이상한 이정표를 본 죄로 물이 떨어지고 해도 넘어가 탈진

직전에 119대원에게 구조를 받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는 분명 천국(天國)이다.


게다가 하위소득 계층 노인수당도 월 25만 원으로 올리고, 5세 미만 아동에게도 월 10만 원을

지급한다고 하는데 나중에 후세들이 부담하겠지만 대통령 선거만 하면 우리나라는

부자나라가 된다.


청송의 숱한 사과밭을 지나며 동요가 내입에서 흘러나온다.

동구 밖 과수원길~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네 ♬♪

오늘만은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때 묻지 않은 일상을 보내리라.


12;22

출발 후 5시간 반 만에 주왕산 국립공원에 도착한다.

예정보다 1시간 반이나 늦게 도착하였어도 하지가 가까워 낮이 길기에 상의 주차장~

장군봉~금은광이 삼거리~용연폭포~용추계곡~대전사로 이어지는 10.6km 거리의 5시간

코스를 선택하는데 다른 안내문에는 약 6시간 50분이 소요된다고도 했다.


길가 상점 위로 기암(旗岩)이 완벽한 뫼산(山)자 형태를 보여주는데,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홍천의 가리산보다 더 완벽한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음식점에서 시끄러운 가요가 아닌 감미로운 클래식이 나온다.

전국의 어느 유원지든지 시끄러운 게 자연스런 현상인데 클래식이 나오니 오히려 좀

엉뚱하다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요즘 작은 변화가 생겼다.

잦은 고장으로 골칫거리를 안겨준 소니 오디오를 버리자 방 한구석이 휑하다.


사무실에서 별로 쓰지 않는 스피커를 떼어다 컴퓨터에 연결하니 훌륭한 스테레오 방식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기상만 하면 클래식으로 일상을 시작한다.


소형 스피커라 홈시어터용 대형 스피커처럼 쿵쿵 대지 않아 아래윗집에서 시비를 걸 일이

없으니 나는 클래식의 매력에 빠져 작은 행복을 매일 누리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교향곡을 들으며 백팔배를 하고 식사를 하면 즐거움이 배가(培加)되니

행복하다.


고즈넉한 대전사 뒤로 우뚝 솟은 기암(旗岩)은 장엄하고 엄숙하다.

백수의 바쁜 일상에도 쉼이 필요한 시간이라 나는 주왕산 기암을 찾았다.


대전사 왼쪽 뒤로 오늘 오를 장군봉이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산이던지 정상은 꼭꼭 숨겨뒀다가 서너 시간 땀을 흘려야만 보여주는데,

유독 주왕산 장군봉만은 처음부터 자기의 모습을 내어준다.


장군봉(687m)을 오르는 길은 얼마나 거칠까.

2010년 7월 22일엔 주봉으로 올라 후리메기 삼거리~용연폭포로 내려왔으니 오늘은

정반대 방향이다.


이 코스를 무사히 종주하면 주왕산에 원을 그리며 다 오르는 건가.

물론 월외 코스와 가메봉 코스는 빼고 말이다.



12;50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야 할 주방천은 마르고 잡풀만 무성하다.

다리를 건너며 물소리를 기대했건만 주왕(周王)도 가뭄엔 속수무책이구나.


오르면 오를수록 숲은 원시림으로 거칠게 변하고 나는 그 숲의 일부가 된다.

물 흐르는 계곡 양쪽으로는 짙은 이끼와 양치류의 관중(貫衆)이 공룡이라도 튀어나올만한

원시시대의 숲을 만들었다.



신록(新綠)은 어디에서 온 빛일까.

칙칙한 세상에 6월이 되자 세상은 녹색(綠色)으로 바뀌고 흰색이나 붉은색은 꼬리를 감췄다.

오늘만큼은 나도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 초록 세상을 만끽해야겠다.


산모퉁이에서 만난 바위의 지질 형태가 특이해서 자세히 보니 진안 마이산에서 만난

지질과는 또 다른 성분이다.


마이산이 수성암과 시멘트와 모래, 자갈을 섞어서 굳혀 놓은 형태의 역암이라면,

이 바위는 화강암도 섞이고, 편마암도 섞이고, 군데군데 타포니(Tafoni) 현상도 보이니

정체를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며 때 이른 무더위로 숨이 차다.

산행이나 인생의 고비 길에서 조금 가파르면 숨이 찬건 당연하지.


오늘은 주왕산의 생생한 풍경을 보며 혼탁한 세상에서 더럽혀진 눈과 귀와 입을 씻고 싶다. 


거친 바위 길에 설치된 계단이 없었다면 아마도 내 실력으로는 이곳에 오를 수 없겠지.

계단 중간을 오르다 옆을 보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병풍바위의 비경(秘景)이 눈앞에

나타난다.


병풍바위는 시공간(時空間)이 무색할 정도로 기막힌 천상의 컬렉션을 펼치는데 무엇이라

표현을 할까.


13;11

주왕(周王)이 누구더라,

사람의 이름으로 산 이름을 정한 주왕산의 전설이 생각난다.


신라 태종무열왕 7세손인 김주원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을 임금으로 추대되지만,

즉위 날 쏟아진 폭우로 입궁(入宮)을 못하자 정적(政敵)인 내물왕 12세손 김경신이

무력으로 왕위에 올랐다.


김주원은 어머니 연화부인의 고향인 명주군으로 물러나서 명주군국(溟州郡國)이라는

국호로 통치조직과 군사기반을 다지는데 이때 청송은 명주군에 속했다.


김주원의 세 아들 중 둘째인 김헌창은 신라가 지배층의 극심한 부패로 인해 민심이 최악인

상태로 떨어지자 장안(長安)이란 이름으로 신라 역사상 가장 큰 반란을 일으킨다.


김헌창은 지방 세력의 지지를 많이 받았지만 정부군의 일사불란한 진압과 내부의 밀고자로

인해 크게 패하는 바람에 스스로 자결을 한다.

청송의 향토 사학자 김규봉씨는 자신의 연구서적에서 주왕의 전설을 920년 낭공대사가 쓴

'주왕사적'이라는 비밀기록에서 찾아냈다고 밝힌다.


낭공대사는 이 기록을 자신이 죽으면 땅에 묻었다가 100년이 지난 후 열어보라고 했다는데

그는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혁명의 역사를 중국의 이야기로 꾸몄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당나라 주도라는 자가 반란에 실패하고 신라의 주왕산에 숨어들어 세력을

키워 나가다가 신라 토벌군에 의해 진압이 되었다는 전설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또 다른 전설을 알게 된다.


내가 주왕산의 전설을 생각하며 머뭇거릴 때 내가 산을 보는 게 아니라 산이 나를 보고

있었구나.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산경(山景)에 취해 잠시 나를 잊었다.


장군봉의 허리춤에서 보이는 기이한 암벽의 풍경을 보며 나도 감탄하지만 우연히

찾아왔다면 신선(神仙)도 감탄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계단을 오른다.

산에서 계단이 나오면 몸은 안전하지만 무릎에 부담이 올 때도 있다.

계단 위 텅 빈 공간은 하늘이고, 계단 사이로 보이는 밑은 악마의 절벽이다.


이 계단이 없었더라만 저곳에 오를 수가 있을까.

문득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waven)'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There's lady who's sure~~all that glitters is gold~~♬♪


번잡한 세상을 떠나 만나는 비밀의 문(門),

저 위에는 정상이라는 존재 이상의 또 무엇이 있겠지.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르며 자연의 계단과 인생의 계단을 생각해 본다.


솔방울이 많이 달리고, 솔잎이 누런빛깔이니 이 소나무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몸을 가진 모든 물체는 청춘이라는 성장기를 지나면 서서히 늙어간다.


소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신체와 정신이 심화되며 자기가 이룬 것을 세상에 돌려주려 솔방울을

많이 달았다.

소나무의 지혜로운 늙음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의 노화를 늦추려 애쓴다.


정상에 머물던 구름이 다 사라졌다.

석병(石屛)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려는 모양이다.


바위는 내리꽂기도 하고 옆으로 퍼지기도 하며 기기묘묘한 형상을 자랑한다.

점(點)이 만나 선(線)이 되고 그 선은 다시 거대한 바위공간을 만들었다.


거대한 바위절벽들은 여기에서 토르(Tor)니 애추(崖錐)니 하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큰소리를 친다.

연화봉과 봉우리 사이에는 맑은 산바람이 오가고 나는 하늘 끝에 다가선다.


오늘같이 맑은 날,

수 겹으로 겹쳐진 첩첩산중의 희미한 실루엣도 매력적이지만 오를 수 없는 저쪽 능선의

깊이 있는 선(線)에 내 멋대로의 색(色)으로 색칠을 하는 재미도 있다.


고즈넉한 대전사에서는 종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느 나무에 앉았는지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한다.


13;23

어느 날 술자리에서 친구가 설악산과 지리산 중 어느 산(山)이 더 좋으냐고 묻는다.

아기들에게 엄마가 더 좋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 하며 묻는 치기(稚氣)어린 문답을 하려니

좀 난감하다.


설악산은 설악산대로 지리산은 지리산대로 가진 멋과 매력이 서로 다르다.

답을 원하니 나는 "설악산은 바위산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고,

스케일이 크고 편안한 분위기와 육산을 좋아하면 지리산을 좋아하겠지."라며

답을 하는데, 설악산은 겨우 5회요 지리산은 고작 3회밖에 오르지 못했으니 어째 답이 영

궁색하다.


그러나 나는 주왕산 산행을 하며 비로소 답을 찾는다.

주왕산이야말로 규모는 작지만 설악산의 화려함, 지리산의 평안함을 다 가진 산이라는

것을 오늘 두 번째 오르며 느낀다.


거친 길은 철제 난간을 잡고 올라도 숨이 가쁘게 한다.

더위에 약한 체질이지만 오늘 따라 숨이 더 차고 힘이 든다.


체중계를 멀리 한 탓일까.

그동안 체중이 많이 늘은 모양이다.


산 곳곳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종달새를 시샘이라도 하듯 딱따구리가 산의 고요를 깨며 나무를 마구 쪼아댄다. 


땀방울을 흘리고 흘리며 오른 전망대를 쉽게 떠날 수가 없다.

높이 수 백m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도열한 석병(石屛)을 바라보니 감동이 진하게 밀려온다.


고요한 주왕산의 시간을 다시 누릴 수 있을지 모를 아쉬움 속에 다시 배낭을 둘러맨다.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더라도 영리해지지도 않겠지만 나의 발목을 잡지도 않을

주왕산이지.


그래도 소중한 땀방울을 흘리면 산행이 완성되겠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상을 향해 걷는데 인내가 쌓이면 지혜가 되는 거라고 연화봉과

병풍바위가 나를 보며 말을 한다.


거대 암군(岩群)이 지상으로 노출되면서 주상절리와 차별침식으로 병풍바위가 도열한

주왕산의 원래 이름은 석병산(石屛山)이었다고 전해진다.


점이 하나씩 이어져 선을 만들고 그 선은 다시 봉우리를 만들었기에 나는 저곳을

파노라마로 만든다.


우주의 무한공간속에 나는 하나의 점이다.

먼 훗날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저곳을 떠돌까.


우주라는 바다를 유영할까.

하늘과 초록이 만나 산을 만들고 바위가 더해져 주왕산의 여백(餘白)을 메꾼다.



두 번째 오르는 이 산에서 풍경의 완성도를 따지는 건 우습다.

바위를 바라보면 눈에 번쩍 띄는 설악의 화려함도 있고, 끝없이 펼쳐지는 능선에선 지리산의

푸근함도 느껴진다.


칙칙한 빛깔의 바위절벽들은 산의 깊이를 더해주고, 나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매료되어 감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줄 수가 없다.


골바람(谷風)이 불어와 땀에 젖은 몸을 시원하게 해준다.

골짜기의 사면(斜面)을 타고 오르는 바람은 영락없는 골바람이다.


강렬한 햇빛은 산의 비탈면과 골짜기를 가열(加熱)하고,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는

밀도 차에 의해 부양력(浮揚力)이 생겼는지 제법 시원한 골바람을 만들었다.


힘이 들어도 천천히 걷고 또 걷는다.

주저 없이 걷는다면 또 다른 길도 만날 수 있을 거고, 이런 소나무도 만났으니

즐거움이 아닌가.


뿌리가 길게 튀어나온 와송(臥松)을 다른 한 그루의 소나무가 받치고 있기에

수령이 50년을 넘는 소나무는 뿌리가 드러났어도 푸른 잎을 틔우고 건강한 삶을 유지한다.

땅 속 뿌리로 영양분을 서로 나눠주니 숲은 경쟁의 땅이자 공생의 땅이구나.


14;23

장군봉 정상(687m)에 서자 조망이 없어도 안도감을 느낀다.

나만 느끼는 안도감인가.


막강한 초록의 숲은 끊임없이 맑은 공기를 뿜어주고, 침엽수와 활엽수가 골고루 섞인 숲은

세월의 자연미를 품었다.


정상에 서면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기에 외로운 무덤을 뒤로 하고 정상을 떠난다.


아기자기한 산길에서 이따금 보이는 암릉이 재미를 더하고, 숲 속에는 개망초가 삼삼오오

피어서 숲을 빛나게 한다.


고개를 들어도 배꼼이 보이는 하늘과 나무뿐인 거대한 산속에 덩그러니 우리만 있다.

더할 거도 감출 거도 없는 산길, 저 숲 속엔 무엇이 있을까.


15;00

꼬리가 긴 여우라도 만나면 인사를 할 텐데 곳곳에 멧돼지가 땅을 움푹 파 흔적을 남겼다.

멧돼지들은 칡뿌리를 즐겨 끊어 먹기에, 그 옆의 나무들은 칡 줄기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자랄 수 있어 자연의 순리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대전사에서 장군봉을 거쳐 3.2km를 걸었어도 금은광이 삼거리까지는 2.1km가 남았다고

이정표가 안내를 한다.  


세 번째로 나오는 봉우리를 오른다.

수십 년 전 일제 강점기 때 껍질을 벗기는 아픔을 당한 소나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구나.


구비 구비 시간이 빚은 곳,

상처는 아물지 않았어도 계절이 흐르더니 이곳도 예외 없이 여름이다.

지금 어느 산인들 다 초록이 있겠지만은 여기 초록은 더 특별하다.


맑은 하늘과 숲의 공간에 겨우 난 길은 사람이 걸어야 살아나는 법이지.

자연에서의 걸음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찾는 길이기도 하기에 잠시 길 위에 서서

물끄러미 숲 속을 바라본다.


봉우리를 오르다 만난 옹골진 바위에서 야무진 기운을 느낀다.


15;40

장군봉에서 1.5km를 걸어왔고 금은광이 삼거리까지는 1.5km가 남았다.

초록물이 묻어나는 숲,

바람에 흰 바닥을 드러내는 나뭇잎의 춤사위를 보며 길을 재촉한다.


모처럼 나온 완만한 능선에서 가쁜 숨을 진정시킨다.


신갈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가 교대로 나타나고, 숲의 변화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는

서어나무가 숲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기에 이 숲도 이젠 서서히 늙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16;22

장군봉에서 출발한지 두 시간 만에 금은광이 삼거리(812m)에 도착한다.

달기폭포를 경유하는 월외 코스로 올랐더라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을까.


일제 강점기 시절 골짜기 안에 금은(金銀) 광산이 있었다고도 하고,

내원동에서 바라보면 아침에는 은빛, 저녁에는 노을빛에 금빛으로 빛난다는 금은광이

삼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오늘은 장군봉 코스를 선택한 게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군봉을 거쳐 5.3km를 걸었구나.

용연폭포까지 1.9km가 남았는데 언제 3폭포의 이름을 용연폭포로 바꿨을까.


거칠었던 호흡이 편안해진다.

맑은 물이 흐르던 계곡은 물 한 방울 없이 다 말랐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은 죽음의 계곡이건만 어디선가 물기를 흡수한 나무들은

초록으로 빛난다.



예전에는 1, 2, 3폭으로 이름이 붙어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3폭포는 용연(龍淵)폭포라는

멋진 이름으로 변신을 했고, 2폭포는 절구폭포, 1폭포는 용추폭포로 개명을 했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어우러지는 폭포의 물소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가물어도 너무 가물어 물소리는커녕 폭포는 아기들 오줌줄기가 되어 겨우 흐른다.


용연폭포를 지나 주왕산에서 야생화론 처음 '기린초'를 만난다.

상상속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의 이름을 딴 기린초를 찍으며 로또복권이 사고 싶어진다.


17;30

참나무와 소나무가 연리목(連理木)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부부금슬을 좋게 하기 위해 자귀나무(합환수)를 심었으며,

그래도 금실이 좋지 않으면 일부러 연리목을 만들어 부부금슬이 좋도록 시도 하였다는데

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산이니 김주원이 시도한 연리목인지도 모르겠다.


대개는 서로 가까이 살던 유전자가 같은 두 나무가 한 나무로 연리목을 이루는데,

특이하게도 서로 다른 나무가 연리목을 이루었으니, 이 연리목도 물과 영양분을 서로

나선형으로 공급하는 모양이다.


물이 길을 낸 용추계곡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저 강인한 자연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그냥 나타나는 풍경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라면 시라로 한 수 읊을 텐데 그런 재주가 없으니 그냥 눈으로 보며

풍경에 감탄만 해야겠다.


산은 가뭄 속에 겨우 남은 물을 부지런히 쏟아낸다.

계류의 맑은 물은 옥빛 계곡을 만들더니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전설도 만들어낸다.


어느 선녀인들 저 물빛에 넘어가지 않을까.

나 또한 뉘라서 안 넘어갈까, 가던 길 멈춰 발을 물에 담그고 세파의 먼지를 털어내고 싶다.


이리저리 휘 돌아치는 계곡의 미는 수수한 곡선(曲線)의 미(美)이다.

내가 재주가 있으면 즉석에서 시(詩)라도 읊고 싶다만 그런 재주가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물이 흘러내리며 우렁찬 포말음을 내고 그 소리는 내 귀를 통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적셔준다.


계곡엔 또 다른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지고, 아름다움에 취한 내 발걸음이 더뎌진다.

화려했던 계곡은 점점 좁아지고 비경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들며 한곳에 집중하게 한다.

주왕산의 산신령은 특히 이곳에 집중하여 풍경을 만들었나 보다.


주벙천의 압도적인 협곡은 하늘에 닿을 듯 뻗어있다.

주왕은 주방천 주왕굴에서 마 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데 어디에 있을까.

주왕이 죽을 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붉게 물들였다는데 지금은 시퍼런 물이 전설을 말한다.


성을 내며 거칠게 내려오던 계곡물은 이곳에서 순해진다.

이미 많은 물이 바위틈으로 파고들어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잠시 옥빛의 물을 보고 있으려니 내속의 부질없는 욕심이 잠시 나타난 햇볕에 반사되며

산산이 부셔진다.


협곡은 차분하고 정갈하다.

현란한 기술을 보여주던 물줄기도 가늘어지고 내 몸은 검푸른 깊이의 소(沼)에서 천천히

멀어진다.

산자락으로 엷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가 협곡을 울린다.


주왕의 피가 꽃이 되었다는 수달래(철쭉) 즉 수단화(壽丹花)가 바위틈 여기저기에 자리 잡았다.


늘 인파에 분주히 시달렸던 협곡은 한가하다. 

사람이 많아야 할 곳에 다른 사람들은 없고 오직 우리니 오히려 처음 온 것처럼 낯설다.

나는 잠시 서서 고고한 평화로움을 깨지 않고 멋진 협곡을 파노라마로 음미한다.


수없이 길고 지난한 시간을 보낸 영원한 풍경 속에 내가 지나는 걸음마다 추억이 쌓이고,

산의 높이만큼 길고 깊은 계곡은 계속 이어진다.


계곡에 바람이 분다.

시간은 바람에 흩어지고, 목소리를 높여 크게 소리치니 금세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주왕산의 산신이 알아들었을까.


                 [       주왕의 혼


                      군사들이 울어쌓던

                      좁디좁은 협곡가에

                      붉디붉은 수단화는 꽃을 다 토해놓고,


                      피울음을 토하던

                      주왕의 비명마저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내 고함소리 메아리 되어

                      떠날 줄 모르는구나.


                      주왕 간지 억겁의 세월

                      주왕의 붉은 피는 시퍼런 물이 되었고,

                      주왕의 혼(魂)은 메아리 되어

                      협곡을 맴돌다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석천  ]


협곡의 유순한 길은 좁아졌다가 넓어진다.

바위틈으로 스며들었던 물소리도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주왕산은 '모두 돌로써 골짜기 동네를 이루어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산'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기암과 이곳 협곡의 수려함에 놀랐다.


주왕산에 이렇듯 큰 암봉들이 서서 협곡을 이루게 된 것은 거듭된 화산폭발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의 암질은 화산 폭발 시 고온의 화산재가 용암처럼 흘러 내려 굳은 바위인 회류응회암으로

여러 차례 거듭된 폭발로 켜켜이 쌓여 높은 절벽과 암봉을 이루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 한다.



주왕이 마지막 전투에서 자살을 했는지, 마왕의 화살에 맞아 죽었는지 지금에 와서

팩트(Fact)를 가릴 수는 없지만, 탐욕과 부패에 찌든 정권을 뒤집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주왕의 전설은 내가 가도 영원히 남겠지.


급수대는 억겁세월 눌러앉았던 칙칙한 분위기를 벗어 던졌다.

바위 모서리와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신록의 빛이 오히려 날카롭게 느껴진다.


청학(靑鶴)과 백학(白鶴) 한 쌍이 둥지(巢)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 바위절벽은 땅을

누르는 기세로 서있는데 높이는 몇 m나 될까.


어느 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히자 짝을 잃은 청학이 날마다 슬피 울면서 바위 주변을

맴돌다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전설을 가진 학소대를 올려다본다.


저 위에 지금도 학의 보금자리가 남았을까.

거대한 바위절벽들이 도열한 협곡을 걸으며 슬픈 전설을 생각한다.


천야만야(千耶萬耶)한 바위벼랑의 풍경은 천지창조의 비경이다.

이곳에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어온다면 그 바람을 타고 저곳에 오르고 싶다.


천의 얼굴을 가진 봉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모습은 어떨까.

문득 겨울의 흰 눈꽃 핀 모습은 신비로움을 넘어 장엄한 풍경이 상상된다.


거인의 근육을 닮은 바위들이 쉼 없이 오래된 전설을 말한다.

이 바위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고 해서 시루봉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내 눈에는 사람얼굴을 한 큰 바위얼굴로 보이다가 정면으로 보니 귀면(鬼面)으로 보인다.


한 도사가 겨울에 이 바위 위에서 도(道)를 닦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의 시루봉,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하니

차마 불을 피울 수는 없고 안개가 낀 날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오르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코발트빛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진다.

험상궂은 바위 거인이 "속세의 악한 마음을 다 두고 내려왔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7년 전 이곳을 지날 때에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묘사한 큰 바위얼굴로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두려운 마음이 드니 그동안 내가 많이 사악해졌나 보다.



하늘금을 머금고 석양빛에 물든 바위는 시공간을 넘어섰다.

저곳은 금단의 땅인가,

바위 위에 붙어있는 몇 그루의 나무도 예사롭지 않고,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바위는

황홀하게 빛난다.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고 이곳 급수대 바위 위에서 대궐을 짓고 살았다며,

바위 위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물을 길어 올렸다는 급수대가 빛난다.


주왕산의 많은 응회암질 단애(斷崖) 중 주상절리가 가장 뚜렷하게 발달한 곳으로

두껍게 퇴적된 화산재가 온도와 압력에 의해 용결되고 식는 과정에서 수축이 일어나

만들어졌다고 안내판에서 설명을 한다.


세월은 켜켜이 쌓이고 가만히 지켜보면 더 아름다운 곳.

내 삶의 조각들과 자연이 오버랩(Overlap) 되며 모든 게 새롭게 보인다.


아들바위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바위를 보며 웃음이 나온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을

가진 바위라는데, 이미 손자가 둘이고, 돼지가 새끼를 나도 수놈만 나는 집안 내력을

생각하며 실소(失笑)를 짓는다.


18;15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에 이르는 반란의 한(恨)이 맺힌 주왕산을 떠난다.


진정한 명산은 계절에 구애 받지 않는다.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눈이 부신 주왕산에서 보낸 하루,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 백수의 일상이 지속되겠지.


중국 당나라 때 후주천왕을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켰던 주왕(주도 周鍍)이 패전하여

병졸 1,000여 명을 이끌고 숨어들었던 기암이 석양빛에 빛난다.


주왕은 기암에 이엉을 씌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지만 토벌군 신라의 마장군은

화살을 쏴서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일거에 공격 주왕의 군사를 격파한 뒤

대장기를 꽂았다는 기암이 전설을 안고 빛난다.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대전사 뜰엔 고승 한 명, 지나는 과객(過客) 한 명도 없이 적막만 흐른다.


저 봉우리를 만든 것은 신(神)의 기적일까.

주왕산을 만든 신은 조화로움을 좋아한 모양이다.


하늘로 솟구친 봉우리와 산,

이 땅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왔고 사람들은 전설을 만들고 그 전설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마 장군이 주왕을 토벌하고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旗岩)의 배웅을 받으며 산을 떠난다.


해가 한껏 늘어진다.

낮이 길어지면 한 해의 절반이 날아가는 거지.


어느새 6월 중순

문득 지나온 시간과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본다.

새해가 되면 세상의 음영(陰映)이 없어져, 반대쪽의 어두움도 사라질줄 알았지.

그러나 세상의 음영은 여전히 남았고 시끄럽다.


아직은 어둡지 않아 뜨거운 태양과 함께 여름 길을 다진다.

남은 시간을 헤아리지 않고 나보다 더 긴 나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재미가 있다.


18;30

산행 후 뒤풀이 술 한 잔은 그리움의 술도 아니고 외로움의 술도 아니다.

목표를 달성한 후 마시는 환희의 술잔이고,

숨이 목전까지 다가와 겨우 내뱉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마시는 한잔 술은 행복의 술잔이다.


오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어차피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으니 한잔 술로 달래야겠지.


여름 하루해의 뜨거웠던 햇살도 식어간다.

황혼인생의 아쉬움을 술잔에 녹여 마시며 애써 세월을 붙잡지 않으련다.


인생의 3막에서 1단계인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3단계인 미래는 아직 남았으니 오늘은 현재라는 2단계를 즐겨야겠다.


21;00

어둠속에 신작로를 돌자 숲속에 자리 잡은 숙소가 나온다.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나에게 영원의 노래를 가르쳐주는 거다.


산속에서 감동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별빛 쏟아지는 산속에서 별을 희롱하며 술잔을 기울이니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한 편의 시(詩)겠지.


                                        2017.  6.  15.  주왕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