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33 강촌 봉화산(526m) 구곡폭포에서 신선이 되다.

김흥만 2017. 8. 23. 19:29


2017.  8.  18. 06;00

며칠간 호우가 땅과 창문을 두드리더니 개체수가 는 맹꽁이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장마가 끝났다는데 요즘은 장마 때보다 더 많은 비가 온다.


비가 온 덕분인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다.

입추도 지났고 많은 비가 땅과 하늘을 식혀준 덕분이겠지.


사람도 무상(無常)이지만 자연도 무상(無常)이다.

사람들은 허무하거나 덧없다고 느낄 때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 한다.


무상(無常)이라함은 본래 세상의 만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지나고 보면 세월이 찰나와 같이 사라졌으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아닌가.


나뭇잎이 떨어진다.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은 허무를 넘어 지금 이순간을 소중하게 사는

나의 미래에 대한 성찰과 상상을 이끌어낸다.


그것 참 미묘(微妙)하다.

달력에 표시된 입추(入秋)가 지나니 아침저녁이 시원하다.

낮에는 덥지만 아침저녁에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으로 시원하게 해주니 천수경의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을 떠올리게 한다.


극성을 부리던 매미 울음소리가 귀뚜라미 소리에 밀린다.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은 자연의 변화는 미묘함과 복잡함을 떠나서

자연 속에 숨은 궁극(窮極)의 진리를 말해준다.


07;50

비소식이 있는 하늘에 낮게 드리어진 먹구름은 마음을 둔중하게 한다.

한낮의 기온은 30도를 웃돌아도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계절의 변화는 무상과

미묘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공(時空)사이에 나는 미묘한 변화를 느낀다.

이래서 삼라만상은 오묘한 이치 속에서 돌아가는 모양이다. 


참 질기게도 비소식이 이어진다.

주간 예보를 보니 일주일 내내 비소식이고, 다음 주 화요일까지도 비가 온다고 한다.

월, 화요일에는 100mm가 넘게 쏟아졌고, 툭하면 앞이 안보일 정도로 폭우성 소나기가

쏟아진다.


장마 때보다 더 길게 비 예보가 이어지며 오늘도 예외 없이 20~70mm 강수량을 예보하는데

곳에 따라 소강상태도 있을 거라는 면피성 예보도 같이 나오니,

배낭에 우산과 스패츠를 넣었어도 비를 맞지는 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입추와 말복도 지난 시점에 반복해서 내리는 비는 막바지 폭염에 시달리던 나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로 고맙게 여겨진다.


작년 이맘때는 35도 이상의 폭염이 지속되어 많이 지쳤던 기억이 나는데,

뜨거운 해를 가리고 있는 두툼한 검은 구름이 은근히 고맙다.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방으로 팔려가는 군용열차를 탄 나 김흥만.

기차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칙칙소리는 아련한 옛 추억을 꺼내게 하더니 터널 속으로 스며든다.


휴!

어느새 44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오늘이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날이네.


며칠만 일찍 도끼 사건이 일어났어도 내가 제 날짜에 제대를 할 수 있었을까.

난 8월 3일 제대특명을 받았으니 제대를 한지 불과 이주일 만인 1976년 8월 18일 북한의

대형 도발사건으로 미군장교 두 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


제대명령은 단순한 군 인사명령인데도 사람들은 굳이 제대특명이라 하고, 암(癌)도 진단이라

하지 않고 선고(宣告)라 한다.

암은 특별한 병이라 선고를 하는데, 제대도 특별한 졸업이라 특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09;00

강촌역에 내려 관광지도를 바라본다.

며칠 전 경춘선 전철역세권에 있는 산을 찾다보니 봉화산이 눈에 들어온다.

굴봉산과 검봉산, 호명산, 삼악산, 삿갓봉, 축령산, 서리산, 석룡산, 연인산 등은 이미 산행을

하였으니 이번엔 봉화산이다.


묘하게도 작년엔 외연도 봉화산, 지난달엔 화성 봉화산에 올랐고 이번엔 강촌역의 봉화산이니

나에겐 봉화산과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전철의자에 스틱을 두고 내렸다가 황망하게 다시 올라탄 진후를 태우고 야속한 열차는

춘천을 향해 질주를 한다.


김유정역에서 거꾸로 타고 온다는 연락을 받고 구곡폭포 방향으로 트래킹을 시작한다.

T-map에서는 구곡폭포까지 약 1.8km로 나오는데 이정표는 3.5km로 되어있다.


어차피 백수의 시간이라,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걷는다.


검봉산 강선봉이 한가롭다.

이제 시간 따라 길을 따라 하루의 여정이 시작되는 거다.


강 건너 삼악산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비구름은 얼마나 많은 비를 뿌려대려나,

삼악산 쪽에서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아직은 덥지만 삼악산과 강선봉에서는 묘하게 가을 향기가 묻어난다.

단단히 서있는 이정표도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새벽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나뭇잎은 은은한 가을 느낌을 준다.


이제부터 당분간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려나.

그렇다면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고 다한증으로 땀을 많이 흘리는 내가 살판이 나겠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약간의 변화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정표를 체크하며 예상보다 폭염이 빨리 물러간다는 생각이 드니 가을이 더 기다려진다.


09;40

스틱을 찾기 위해 떠나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친구가 김유정역까지 갔다가 다시 합류를 한다.

잠시 멍했었지.


머피의 법칙은 아니지만 항상 곁에 머물러 있으면 소중하다는 걸 잊고 사는 법이라,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나 등산장비는 배낭에 잘 붙들어 매야 잃지를 않는다. 



매표소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자 환한 미소로 응대를 하는 직원의 얼굴에 복(福)이 내렸다.

직원의 친절 속에 신분증을 꺼내 든 내가 오히려 머쓱하다.


09;50

오늘 봉화산을 오르며 내가 비는 소원이 있다.


봉화산을 오르면서 집착(執着) 노추(老醜) 미망(迷妄)이라는 화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요즘 나를 괴롭히는 망념(妄念) 망상(妄想) 미혹(迷惑)에서 해탈할 수 있을까?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산,

순수한 자연의 길에서 무슨 사연이 튀어 나올까.

여름이라는 시간이 무수히 흘렀으니 아름다운 여름 꽃으로 나를 반기려나.

 

산길 모퉁이를 도니 어느새 벌개미취가 피어 가을의 전령사 노릇을 한다.

꽃을 보니 잠시나마 세속의 복잡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1km를 올랐어도 여전히 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편안하다.

어디선가 물소리 들린다.


물소리와 살짝 불어오는 바람소리,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깊은 숲의 시각적 상승감이란 

대단히 역동적이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산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스며든다.

카메라로 찍으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사라져 나를 바보로 만든다.


들어가기 힘든 원시계곡 위로 검봉산의 유장한 능선이 흐르고,

산길 귀퉁이에 개똥참외의 노란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이고 개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렸다.


복숭아 나무가 있으니 여기가 무릉도원이겠다.

봉화산에도 굴봉산처럼 동굴이 있으려나,

내가 아는 무릉도원의 요소는 깊은 산속과 계곡, 동굴과 복숭아 꽃인데 여기까지

오르며 동굴만 보지 못했고 나머지는 다 보고 있는 중이니 무릉도원이 맞다.


대추나무와 더불어 복숭이꽃은 영적인 열매를 상징하니 이곳은 신선이 사는 곳이겠다.

설령 살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신선이 되면 되는 거지.


사람들이 무릉도원이라 말하는 소금강 무릉계곡이나 지리산 청학동이 아니어도,

또한 동천(洞天)이 없어도 오늘 하루 속세를 벗어났으니, 나는 무위자연사상(無爲自然思想)

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은둔(隱遁)을 하며 내 이상향을 찾으련다.


좁고 깊은 계곡엔 숲이 깊어 접근하기가 어렵다.

흐르는 계류에 발을 담그고 탁족종식(濯足踵息)을 하면 좋으련만 오름길이라 물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대단한 숲의 깊이로 심한 가뭄이 와도 완전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계류의 소리는 웅장하고 물은 풍부하다.


                   <        물소리

                       

                        계곡이 흔들리는가,

                        아! 후련하다.


                        졸졸 줄줄 더위를 밀어내는 소리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소리 

                        계곡이 엎어지고 깨지고

                        바닥까지 뒤집어지는 소리.


                        그래도 뭇 생명은 기쁘게 깨어나서

                        좋다고 소리치는구나.                             석천     > 




울창한 수림 속 딱총나무에 사위질빵 넝쿨이 머무르고, 초록이 난무하는 산길은 나를 침묵과

명상으로 이끈다.

숲속의 세상에서 바람과 새소리 물소리는 땅과 하늘의 소리다.


10;17

1.6km를 올랐는데 봉화산 정상까지는 아직도 2.5km가 남았으니

내가 지도를 잘못 판독한 모양이다.


숲속에서 새들이 시끄럽다.

이놈저놈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지저귀니 무슨 새가 우는지 도통 모르겠다.


숲속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는 새들의 함성이 비명으로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비구름은 삼악산을 감싸고 칡넝쿨은 숲을 둘렀다.

숲은 초록 위에 또 초록으로 겹겹이 쌓였으니 대단히 단단한 색이구나.

초록이 이렇게 단단한 색이었나 나는 초록의 싱그러움에 푹 빠진다.


여름 숲이란 그냥 짙푸른 색으로만 알았는데 짙은 여름이 녹아든 숲은 초록이 절정이다.

여름의 땡볕은 숲속의 나뭇잎을 단단하게 단련 시켰다.


나를 지글지글 태울 태양도 숨었다.

너덜도 없는 산길의 풍경은 평화롭고 급하게 빨리 갈일도 없으니 천천히 걷는다.


너덜도 없는 임도에는 문배마을로 오가는 SUB차량이 수시로 지나간다.

고갯마루까지 편승을 하면 쉽게 오를 수 있을 텐데, 기왕에 강촌역에서부터 걸어왔기에

힘이 들어도 그냥 오른다. 


땡볕이라면 더위로 체력 소모가 엄청 날 텐데 다행히 해는 구름 속으로 꽁꽁 숨어

버거운 날씨는 아니다.


모퉁이를 도니 왼쪽으로 산의 경사면을 깎은 절개지가 많이 나온다.

요즘 꽤 많은 비가 내렸기에 절개지의 중간에서 지하수가 새어 나오는지,

산울림이나 땅울림으로 웅웅 대는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나무가 흔들리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는지 세심히 관찰을 한다.

이런 산길에서 산사태를 만나면 피할 방법이 없기에 미리 유의해서 보는 거다.


가래나무가 여기저기에 서서 넓고 촘촘한 잎으로 하늘의 열기를 막아준다.

가래가 익어서 떨어졌을까 길가를 살펴도 없다.


가래나무 껍질엔 독성이 있는 화학물질이 있어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게 해주는데,

때죽나무의 마취제와 비슷한 효력이 있다고 한다.


누리장나무의 구수한 냄새는 시장기를 느끼게 한다.

하늘엔 검은 구름이 오가고, 초록이 뚝뚝 떨어지는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탈속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잠시 꽃에 코를 댄다.

서늘한 고요를 품은 숲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아주 좋다.


기막힌 냄새와 막 피기 시작하는 꽃의 신비로움을 나는 무엇이라 표현할까,

유불도(儒佛道)를 통달하고 선계(仙界)를 넘나드는 신선이라면 이 대목에서 어떻게 표현할까,

그들도 그냥 맛있는 냄새로만 표현을 할지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든다.


10;53

산허리를 타고 이어지던 임도를 한참 오르니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온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880m,

아직 체력적인 부담은 없이 컨디션은 양호하다.


지난번 화성 봉화산에서는 더위로 애를 많이 먹었는데 다행히 땡볕을 면한 임도로

오르다보니 체력이 비축되었다.


숲으로 스며들자 물기 젖은 소나무의 수피(樹皮)가 시커멓고,

굴참나무, 산초, 단풍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활엽수가 다채롭게 여름을 빛낸다.


특히 단풍나무 개체수가 많아 풍부한 햇살과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온다면 황홀한 단풍으로

가을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기대감을 주는 산길이다.


향긋한 솔 내음이 풍기는 산길,

걸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능선이 이어지고 숲속에 노란빛이 반짝인다.



마음이 저절로 편해지는 산길을 걸으며 슬쩍 지나는 산들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나는 숲속 깊은 곳에 숨은 보물을 찾아낸다.

노랗게 핀 각시원추리는 자연이 주는 기쁨이지.


산에서 이런 꽃을 만나면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내 눈으로 포착을 하고, 귀와 오감이 이 꽃을 보며 내 바탕의 풍광으로 삼으려 한다니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다 너 자신의 것이라고 원추리 꽃이 말을 전한다. 


11;32

안간힘을 쓰지 않고도 올라선 봉화산 정상(536m)에서 새로운 세계를 기대했더니,

기대만큼 비구름 속에서도 다른 산보다 빼어난 조망을 보여준다.


서둘러 정상 표지석 앞에 서니 바람이 수고했다며 다독인다.

거친 숨을 서서히 가라앉히고 주변을 조망한다.


정상은 다른 산객 없이 우리만 있어 한가하다.

자연을 벗 삼는 일에는 한가함이 최고다.

괜히 마음이 바쁘면 한가함을 놓칠 수 있어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한잔 술로 갈증을 달랜다.


내 고향 진천에도 있는 봉화산,

작년엔 외연도 봉화산에 올랐고, 지난달에는 화성 봉화산에 올랐지.


봉수대가 있는 봉화산은 춘천에만 3곳이 있다고 한다.

춘천 북산면의 봉화산,  남면에도 봉화산이 있고 이곳 강촌에도 봉화산이 있다.

그만큼 춘천지역은 국방과 수도권 방어에 중요한 전략거점이 되는 모양이다.


가닥 진 여러 봉우리가 북한강을 감싸고 먹구름은 화악산과 삼악산을 감춘다.

얼마나 쏟아지려나.


기상청에선 20~70mm를 예보하였는데 그 정도 비라면 온몸이 흠뻑 젖겠지.

다행히 아직 천둥번개는 치지 않지만 비가 오면 흠뻑 맞는 것도 좋겠다.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구름을 벗어나는 삼악산을 바라보며,

어쩌면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고 하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첩첩청산(疊疊靑山)의 사이를 뚫고 흐르는 남한강, 굽이치는 산줄기는 어디로 흐를까,

숱한 삶의 시간이 흘러 과거라는 추억을 만들었고 앞으로의 시간은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가 무너진 곳.

이곳에서 유구한 자연의 시간은 찰나와 같은 삶의 시간을 비웃는다.


멀리로는 천마산이 가물거리고 검봉산과 강선봉의 유장한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꿈틀거린다.

산 너울을 멍하게 바라보니 젖었던 등판이 시원한 바람에 마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 맛에 뜨거운 여름에도 정상에 오르는 거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보내도 되지만 고생을 사서하는 산행은 거친 숨과 고통 끝에

맞는 산바람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더위를 잊게 하는 바람과 꿈틀거리는 유장한 능선은 짜릿한 희열을 주니 이거야말로

진짜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잠시 앉아 산의 소리를 들으니 늘 세속의 소음에 지쳤던 귀가 맑아지고 정상주도 한잔 했으니

천천히 하산준비를 해야겠지.


12;23

요즘엔 산에 와도 개체수가 줄었는지 뱀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임도의 한가운데서 버티던 살모사 새끼가 꿈틀거리며 길을 가로질러 아래 풀숲으로 사라진다.


뱀은 비가 많이 오면 먹이를 찾아 저지대로 내려오는 습성이 있으며,

변온동물이라 폭우로 내려간 체온을 높이기 위해 햇볕으로 달궈진 임도를 찾은 모양인데,

이 뱀은 우리의 인기척에 많이 놀라고 당황한 모양이다.

보기 흉측한 미물(微物)이라도 아껴줘야 하고 또한 아껴주면 자연을 더 사랑하게 되겠지.


옆의 도랑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낮은 바람이 지나간다.

물기 머금은 푸름이 생기를 넣어주니 안구건조증도 사라졌다. 


숨었던 햇살이 계곡을 살짝 비추니 계곡은 감춰 놓았던 빨간 물봉선으로 화답을 하고

숲은 초록이 묻어난다.


귀를 가까이 대면 '물봉선'은 무슨 말을 나에게 건넬까,

자기를 뜯어다가 아가씨의 손톱에 붙이라 하겠지.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나 둘 세는데 빗방울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차피 땀으로 옷이 다 젖었기에

후드득 후드득 숲을 때리는 시원한 빗소리를 기대하지만 내 희망은 사라진다.


멀리서 포성처럼 아련히 들리던 천둥소리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참 건강한 숲이다.

키가 30m 를 훌쩍 넘을 거 같은 잣나무가 도열을 했다.


바람과 비가 만든 초여름의 산,

자세히 봐도 오래 봐도 사랑스런 숲과 내가 걷는 길은 마음에 새겨도 좋은 길이다.


풍경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여정의 끝에 도착하기 직전이다.

자연에서 축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늦추면 오는 거다.

자연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자연의 시간에 앞서지도 맞서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벌개미취는 혹서의 날씨에 피로해진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구나.




하산을 하며 만난 빨간 우체통엔 무슨 사연이 담겼을까 슬쩍 들여다보니 텅 빈 우체통이다.


산(山)의 나라에서 인간과 자연이 어울려 사는 동네의 우체통은 세속과 연결해주는

통로이면서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된다.


13;23

구곡폭포로 오르는 계곡물에 물안개 피어오른다.


근사한 바위벽과 물과 숲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인간의 길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만나러 가는 블랙홀이다. 


13;36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

산에서 떨어지는 옥류는 여름이 전하는 선경(仙景)이다.


하늘아래 물보다 더 단단한 것은 없는 법, 50m 높이에서 아홉 구비를 돌아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만물은 물로 하여 하늘에 이른다하는데 나의 마음도 하늘 끝까지 이를까.

폭포는 속세의 소음을 덮고 마음속에 쌓인 세속의 때를 벗기라 명령을 하기에

보는 눈이 없다면 옷을 입은 채로 폭포 아래로 내려가 오장육부를 씻고 싶다.


구곡폭포는 용이다.

구곡폭포의 용은 이무기가 아니다.

구곡폭포에서 나는 용(龍)을 보며 신선이 된다.


하늘로 승천(昇天)하는 용이 아니라 땅으로 하강(下降)하는 거대한 용이다.

나는 용을 보았기에 내가 거친 숨을 쉬며 올랐던 계단은 이곳 천국(天國)으로 오르는

행복의 길이었구나.


물은 대자연과 생명의 근원이다.

물의 상징인 용이 용틀임을 하며 하강을 하니 저항하는 바위도 없이 사람을 홀린다.


용이 울부짖는 듯 강력한 물소리를 내는 폭포로 들어가 물세례를 맞으면 세파에 찌든

귀와 입이 씻어지고 가슴이 후련 하려나.


잠시 서있으니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다.

떨어지는 물방울은 하얗게 부셔지고 옥빛으로 바뀌어 계류로 흘러들며 세 시간의 산행으로

고단해진 몸에 생기를 넣어준다.


14;18

하산주를 마시며 두 번씩이나 스틱을 잊은 사연을 이야기 한다.

우리 나이에 잠시 잊음은 치매가 아니다.

잠시 찾아온 건망증에 불과하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령 잊었다 해도 길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기억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잃음이 아닌 잊음은 삶을 흐르게 하는 하나의 경로요, 과정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너무 분명하고 똑똑한 사람보다 조금은 어리바리하고,

명쾌하지 않아도 여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이라, 한 때의 해프닝으로 웃자고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늙으면 작아지고 마르며 자주 잊고 잃는다.

잊고 잃으면 비운다고 좋게 해석을 해야 무덤덤해지고 지나가는 것에 담담해진다.


세상사 다 부질없는 것을,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한잔 술을 마시며,

세상을 살며 더 편하겠다고, 더 깨끗하겠다고 아등바등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닫는다.


온다는 비는 끝내 내리지 않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성한 빗줄기를 기대했건만 다시 습해지며 더워진다.

비를 내리게 하는 건 하늘의 일이기에 나는 그냥 세속으로 돌아가야겠지.


에필로그(epilogue)

왼손 중지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지난 2월 통증치료를 받아 6개월 정도 편안했는데 트리거 증후군이 재발한 모양이다.

봉화산에선 아픈 줄 몰랐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손가락이 많이 아프다.


잡다한 세속의 아픔에서 언제 벗어나려나,

창밖엔 천둥번개와 함께 호우가 무섭게 쏟아진다.


                                                          2017.  8.  18.  강촌역 봉화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