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34 계요등과 사랑에 빠졌어요 <가평 운악산 937.5m>

김흥만 2017. 10. 4. 17:07


2017.  9.  28. 05;00

선탈(蟬脫)의 아픔을 노래하던 매미는 어느새 사라지고 풀벌레소리가 애잔하게 들린다.

지금 들리는 풀벌레소리는 한여름의 왕성하고 둔중하던 소리가 아니다.


찬 공기 사이를 조용히 미끄러지듯 나는 여린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곧 닥쳐올 겨울을

예감하는 비감(悲感)이 담겼다.


"승현이가 사랑에 빠졌대요"라며

막내 승현이가 피서에 동행했던 예쁜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졌다고 큰놈이 일러바친다.


9월은 사랑에 빠지는 달이라 나도 요즘 세 가지와 사랑에 빠졌다.

가을의 새벽공기를 마시려고 창문을 열면 왝♬~하며 솔부엉이가 소리치고,

새벽 산책을 즐기는 공원의 작은 연못에서 물고기로 아침 식사를 하던 아기 왜가리가

왝♩~하며 나를 반기기도 하지만,

객산에 오르면 풀숲에 숨었던 고라니가 왝♪~하며 쏜살같이 다른 쪽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왝~하며 내는 소리는 솔부엉이, 왜가리, 고라니가 비슷한 발음이지만 개체가 서로 다르니

자연은 신비함과 조화를 같이 담았구나.


8월부터 매일 보이던 왜가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공원의 연못에 이끼가 끼기 시작했다며 관계자가 물을 빼는 바람에 물고기들은 말라 죽었고

먹잇감이 사라지니 왜가리도 어디론가 사라진 거다.


이 작은 연못은 사대강(四大江)과는 무관하고 찬바람이 나면 이끼가 자연히 사라질 텐데

많은 생명을 외면하고 물을 뺐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왜가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작은 불빛이 보인다.

다가가니 뜻밖에도 '계요등'이 작은 공간을 환하게 해주는 거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계요등 씨앗이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여행을 했구나.


첫날 이십여 송이를 만났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 수백 송이로 불어나기에

이곳을 지날 때마다 점점 계요등과 사랑에 빠진다.


광속(光速)으로 빨라진 환경 속에 5살배기 아기도 사랑을 느끼는 세상이 되었으니

내가 1cm도 되지 않는 작은 꽃 계요등과 사랑에 빠지는 일도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07;00

운악산 산행을 하려고 집을 나서다 후문에서 꿀풀과의 꽃향유를 만난다.

며칠 전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났었는데 뜻밖에도 꽃향유는 살아남았구나. 



           <            꽃향유의 슬픔


                 깊은 산속에서 태어나 바람 타고

                 날아와 겨우 꽃을 피웠더니

                 풀 베는 예초기 소리에 종일 질려

                 내 얼굴의 붉었던 색이 보라색으로 변했구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 곳,

                 바람이 이 구석으로 날 데려와

                 새롭게 태어났는데

                 씨앗 성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싹둑 잘라질 뻔 했다오.


                 흔하지 않은 꽃이라

                 사람들이 날 몰라보고,

                 내 이름이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 자르려 해 소름이 끼쳤지.


                 구석에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않는

                 가을바람은 씨앗 성 그는 소리를 내라고 재촉을 하고

                 간밤에 내린 가을비는 이별을 재촉하는구나.

                

                 푸름에 물든 여름도 지났으니

                 보랏빛으로 물든 이 가을을 넘기면

                 나는 겨울바람과 함께 사라지리라.                                    석천   >



09;20

운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운악산(雲岳山)은 구름이 있어야 이름이 잘 어울릴 텐데, 맑은 하늘에 내리는 햇볕을 받은

바위가 번쩍거리며 빛을 발산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최대, 최고, 또는 삼신, 삼대, 오대, 사대천왕 등의 용어를 사랑한다.

운악산은 화악산, 관악산, 송악산, 감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으로 불릴 정도로 수려한 

산인데 주봉인 만경대를 둘러싼 경관이 5악 중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기 소금강으로

불린다.


악산(岳山)이 힘든 나이라 부드러운 육산을 즐기다가 웬일로 이번엔 운악산을 택했다.

무엇엔가 빚을 진 느낌이 드는 운악산(雲岳山)을 5번째 오르는 건가.


은행생활 중 만든 주막산악회 활동이 왕성할 때,

40대 초중반시절 4번이나 올랐던 운악산이 오늘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설렘보다는 긴장과 떨림이 계속 될 운악산 하늘엔 흰 구름 한 송이가 떠돈다.


추분이 지나며 여름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계절이 가면 또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게 자연의 섭리라 불볕더위는 꺾였고 그토록 뜨거웠던

여름이 사라졌구나.


산행은 비가 내린 다음날이 좋다.

서울엔 약한 비가 내렸는데 운악산에도 산 깊이까지 울리는 물소리가 들리려나. 


친구와 함께 오른 봉우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얼마나 될까 기념촬영을 하며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숲속에 매미 울음소리는 사라졌고 그 자리를 풀벌레소리가 메꿨다.


산행 코스는 비교적 안전한

1코스 현등사~코끼리바위~절고개~남근석바위~정상까지 3.35km를 올랐다가

2코스인 정상~만경대~미륵바위~병풍바위~눈썹바위 3.06km로 내려오기로 한다.


소요시간은 인터넷에서 3시간 반~4시간으로 안내를 하나 내 걸음으로는 5시간이 넘게

걸리겠지. 


길은 산사(山寺) 사이로 열려 있다.

산사로 오르는 길은 무간지옥에서 헤매는 영혼을 달래느라 정적(靜寂)이 쌓였다.

나는 가끔 성당이나 절간에 들릴 때 천당이나 지옥을 생각한다.

사후내세(死後來世)란 정말 있는 걸까.


울릉도의 바닷가 바위틈에서 자라는 '섬기린초'를 만난다.

행운을 주는 '섬기린초'를 찍으며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기독교에서 천당과 지옥이 있으면 불교에는 극락과 무간지옥이 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란 빠져나올 틈(間)이 없는 지옥을 말 하는데,

그곳에는 쇠(鐵)로 된 매(鷹)가 눈을 쪼고, 쇠로 된 뱀(蛇)이 쇳물을 입에 붓고 몸을 칭칭

감아서 하루에 만 번 죽었다가 만 번 살아난다는 곳이다.


고즈넉한 산사의 일주문을 지나며 문득 장의사에 들렸던 꿈이 생각난다.

친구 둘은 길 건너편 장의사 가게로 보내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길을 건너기 전에

있는 장의사 가게로 들렸더니 예약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다고 문지방도 못 넘고 쫓겨나는

꿈을 꾸었지.


노도(怒渡)와 같이 흐르는 황천(黃川)을 배를 타고 건너기도 했고,

백아산 등반하는 날 새벽에는 길을 건너다 흰옷 입은 의사가 아들에게 잘 모시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으니 서서히 황혼(黃昏)의 삶이 시작되었구나.


천당과 극락, 지옥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도(道)를 깨우친 사람도, 독실한 종교인도

장담을 하지 못한다.

어느 스님은 "지금 여기서 잘 살아 있는 것이 천당이고 극락"이라고 잘라 말한다.


나는 가끔 길거리에서 또는 대중교통 안에서 스치는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경우가 있다.

이젠 사람의 얼굴만 봐도 잘 살아 왔는지, 마음속에 원망과 절망이 가득한지 그 사람의 일생이 

조금은 유추((類推)가 된다.


태백산 비단봉에서 동행하던 친구가 "오늘이 내 생애 최고로 젊은 날"이라고 했지.

맞다 오늘이 지나면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면 오늘을 못 산다.

또한 오늘이 힘들다고 불평을 하면 내일도 불평해지기에 오늘 살아서 두 다리로 이렇게

험한 산을 오를 수 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면 내일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겠지.


배롱나무 붉은 꽃잎은 아직도 왕성한데 그 위에 걸친 능소화는 지쳤는지 더는 피우기를

멈췄다.

산국과 감국이 가을 향기를 뿜어내고 벌개미취와 쑥부쟁이가 초록의 빈 자리를 메우는데

물 없는 백년폭포에는 허무(虛無)가 흘러내린다.


백년소에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소음에 지쳤던 귀를 씻어주는 호강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가끔 가출(家出)과 출가(出家)를 꿈꾸는데 가출과 출가는 엄연히 다른 뜻이다.

나이가 들며 이성으로 축적된 것은 점점 사라지고 감각으로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건

수직의 인간관계로 익숙해진 삶에서 가급적 탈피하고 수평으로 살려고 노력을 하가 때문이다.


요즘은 가끔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나,

남자는 늘 카리스마를 풍기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하는데,

앞서 가는 친구의 뒷모습에서 한없이 넓었던 등판이 쪼그라드는 걸 본다.


생물학적인 황혼의 나이라 등도 서서히 굽기에 일부러 시선은 하늘을 향해 15도 각도를 올려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야겠지.


물길이 숲길과 나란히 하는 곳에서 나타난 무우폭포(無雩瀑布)도 물길이 서서히 말라가니

어제 이쪽엔 비가 내리지 않은 모양이다.


구한말(舊韓末) 궁내부대신 민영환 선생이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걱정하던 곳으로 민영환이라는 암각서(岩刻書)가 바위상단에

남아있다는데 주마간산(走馬看山)을 하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옛날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금강산을 찾아 가던 중 이 무우폭포를 구경하고는 금강산에 가지

않고 돌아갔다는 전설을 가진 바위와 폭포는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바위를 타고 간신히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슬프다.

요즘 돌아가는 나라꼴을 보니 나도 언젠가는 저곳에 누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10;30

신라 22대 법흥왕(514~539년) 때 인도에서 온 마라가미(摩羅呵彌)라는 중을 위해 세웠다는

천년고찰 현등사를 지난다.


백팔계단이 있는 불이문을 피하고 현등사 옆길로 들어선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떠오르는 상념(想念)이 오늘은 싫은 거다.


우리나라 대부분 절이 그렇듯이 현등사도 운악산과 한 몸인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하다.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이 외로운 산길을 지킨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인 이 탑은 1411년 현등사를 중창했던 함허조사의 사리탑으로

세종대왕의 명을 받은 효령대군이 사리를 수습해 탑을 조성했다는 안내문이 서있다.


3단의 팔각형 기단 위에 옥주형 탑신은 조선 초기 부도의 중요한 자료가 되며, 부도 앞에 있는

석등으로 세종의 왕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문경 봉암사, 황해도 연봉사, 강화도 정수사에도 함허당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이곳 현등사의

부도탑이 으뜸의 품격을 갖추었다고 안내판에서 설명을 한다.


청초한 모습의 가는쑥부쟁이에 함허조사의 정령이 깃들었을까,

부도탑 옆에 핀 쑥부쟁이 한 송이가 소슬바람에 파르르 떨며 멋진 조화를 이룬다.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나무들이 그리 굵지 않은 젊은 숲엔 참나무들이 빼곡하다.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가 시야를 푸르게 만들더니 후각도 감미롭게 한다.


한여름 치열하게 살은 나무들은 더 이상 초록빛을 탐하지 않고 서서히 시드는 일만 남았다.

신갈나무에 붙은 싱싱한 이파리도 이글거리지 않고 빛에 초연해지며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눈썹바위를 거쳐 만경대로 오르다가 호되게 고생을 한 추억이 있어 현등사를 거쳐

절고개로 오르지만 이곳도 거친 등산로임엔 틀림이 없다.


갑자기 길의 기세가 사나워지더니 난간조차 없는 길이 나온다.



다시 숲속으로 빨려들어 집중을 한다.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거대한 암벽에는 소나무가 거북이처럼 붙어있고,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식혀준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던 숲에 바람이 인다.

등허리와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잠시 벗겨진 숲 사이로 열어주는 시야는 이 산이 주는 선물이다.


산은 올라가면서 느긋하게 바라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올라온 높이만큼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득하기에 눈으로 담고 가슴으로 안는다.


솔숲을 빠져 나오자 산자락을 에도는 바윗길이 숲을 가르고, 안전을 위해 설치한 밧줄을 잡고 

천천히 오른다.


금강산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운악산의 멋진 풍광 속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긴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 형상을 한 코끼리 바위를

줌(Zoom)으로 당긴다.


이런 형상의 바위를 학술적인 용어로는 토르(Tor)라 한다.

코끼리 바위는 중생대인 2억 년 전 형성되었으며 절리의 발달과 풍화에 의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껏 본 백령도의 코끼리 바위와 울릉도의 코끼리 바위보다 더 절묘하게

닮았다.


절고개가 아직 멀었는지 하늘 금이 보이지 않고 간간이 골바람이 불어와 젖은 몸을 식혀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쁜 숨을 쉬며 오로지 정상을 향하여 올라야겠지.


11;56

절 고개 삼거리에 올라선다.

이제부턴 조금 편한 길이 나오겠지.


길은 순하고 좁아졌다 다시 넓어진다.



주능선으로 오르니 넉넉한 햇살과 바람을 마신 나무들은 굵어지고, 참나무가 빼곡한 숲 가운데

드물게 선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 그늘을 만든다.


겉으로 보기엔 우악스러운 악산(岳山)이지만 이곳은 부드러운 능선 길이다.


느림의 미학이라며 졸필이나마 끄적거린 게 어느새 333회나 썼구나.

글을 잘 쓰는 문인들이 보면 얼마나 유치할까.

난 그냥 생각 나는 대로, 쓰고 싶은 대로 쓰는데 나의 이야기가 전설이 될까.


어느 노래가사에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 했다.

내가 발로 딛는 곳, 걸어서 오르는 산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물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기에

내 삶의 이야기는 산이라는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며 시작하고 끝을 맺는 거다.


요즘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이가 들면 난청이 오는데 때로는 안 듣고 잊으며 사는 것도 좋다.


전망대에 올라 모처럼 나도 함께 사진을 찍는다.

늘 동행하는 친구들 위주로 사진을 찍다보니 막상 내 사진은 드물다.


나는 내 사진을 볼 때마다 어색한 생각이 든다.

거울에 얼굴을 가깝게 대고 칼 면도를 할 때 보는 느낌과 사진으로 볼 때는 다르다.


거울은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며 꾸미고 덧칠해도 금세 알아보는데 사진으로 볼 때는

간혹 낯설 때가 있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체질이라 봉화산 등 여름 산행을 하며 곤혹을 치뤘지.

더위로 몸과 마음이 지쳤으니 오늘은 운악산에서 쉬고 싶다.


일상에서의 탈출이라,

자주 탈출을 하지만 오늘만큼은 타인의 시선과 번거로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보자.

이성과 논리도 필요 없이 '쉼(休)'만을 생각하고 싶다. 


파노라마로 인간세상을 내려다본다.


화악산, 석룡산, 귀목봉, 명지산, 연인산의 거대한 능선이 꿈틀거리고,

명지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한 조종천이 사행천(蛇行川)의 모습으로 북한강을 향해 내달린다.


12;15

산비탈에 선 남근석(男根石)이 포경수술까지 하고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곧추섰다.


운악산에는 각종 형상의 바위가 즐비하다는데 오늘 코끼리 바위에 이어 두 번째 만나는

형상바위구나.


정상이 가까워지니 단풍나무가 붉은 빛으로 타오른다.

산은 깊이 들어갈수록 높이 오를수록 한걸음 먼저 가을을 만나는 거다.


빼곡히 들어찬 숲속의 나무 중에서 붉게 빛나는 단풍나무는 가을이다.

전 세계의 인구는 얼마나 되고 지구상의 나무 수는 얼마나 될까.


미국 예일대 토머스 크라우드 박사 연구팀은 2015년 9월 '네이처'지에 전 세계에 나무가

약 3조 그루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일이 셀 수가 없으니 추상적인 숫자겠지만 우리나라의 나무 숫자도 만만치 않겠다.


휴!

하늘이 터진다.

이 계단만 오르면 정상이겠지.


12;29

출발한지 세 시간 만에 운악산 비로봉 정상(937.5m)에 올랐다.


산을 잘 타는 산객이라면 이미 하산까지 마쳤을 시간을 썼어도 이렇게 험한 산의 정상에

올랐으면 잘한 게 아닌가. 


정상의 단풍나무는 빨갛게 물들었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곳에서 9년이나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노인은 정상석에 대하여,

가평에서 세운 거대한 정상석은 산객에게 인기가 있으나 포천에서 세운 정상석은

인기가 없다고 설명을 해 이 정상석이 더 외로운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돌이 실질적인 정상이라며 얼마 전 이곳에 올라 사진을 찍던 여인이 실족하여

많이 다쳤다고 하는데, 암각으로 새겨진 글자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나의 산행 버킷 리스트에서 운악산을 지울 거 같아 정상석을 한 번 더 가슴에 담고 하산을

시작한다.


산에서는 속도가 아닌 방향이 중요하다.

내 체력에 맞는 속도는 느림이고 소중한 속도는 바로 이 순간이다.


가벼운 휴식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인의 조언으로 스틱을 배낭에 수납하고 만경대에 오른다.

한 가닥 밧줄만 걸렸던 암벽에 쇠줄로 안전장치가 되었다.


정년이란 명분으로 백수가 되자 처음에는 아파트 경비원 등 사람의 시선이 버거워 껴안기

힘든 삶이었지만,

이사를 하고 적당히 시선을 피하며 말없이 살았더니 몇 년이란 세월이 슬그머니 흘러갔지.


살다보니 백수의 삶도 특별히 다른 인생이 아니기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았더니

세월은 무심히 잘도 흘러간다.


무위(無爲)의 삶이든 유위(有爲)의 삶이던,

백수의 삶이지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뭔지 모르게 조금씩은 달라지는 거 같다.

허긴 계속 똑같으면 지루해 어떻게 살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비록 달라지지 않더라도 조금씩은 다를 거라고 생각을 하며

살았더니 어느새 9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숨 가쁘게 이 암벽을 오르면 내리막길도 나오고 그 내리막길을 걸으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온다.

오를 때는 죽을 듯이 힘들고 아팠는데 그런대로 살만한 몸이 만들어졌는지 오늘은 신이 난다.


바람이 분다.

바위와 나무가 운다.


나도 오늘은 바람이다.

나는 만경대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이다.


13;10

운악산 산신령이 머무는 곳,

나무의 울음은 자연의 가르침이다.

바위가 운다고 만경대의 관음송(觀音松)이 이야기를 한다.


바위의 울음과 나무의 울음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친다.

아주 먼 옛날 이곳에 올라 막걸리 한잔을 부어주고 조용히 껴안으며 나무의 마음을 얻었는데

오늘은 긴장이 되어 바위에 오르기 싫다.


만경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기 주봉인 만경대를 중심으로 웅장한 기암괴봉들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았다고 해

이름이 붙은 운악산의 만경대 너른 반석을 지난다.


이제부터는 살 떨리는 하산 길이다.

기다시피 낮은 자세로 매달려 내려가야 하는 암릉 길에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아~그녀의 이름은 김혜경이었지.

2003년도인가?

지점장으로 발탁 승진하여 영등포시장역 지점을 인수하러 온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당찬 모습이었다고 기억이 된다.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이곳 운악산에서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미스테리(mystery)를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역본부 점포장 단합대회로 본부장이 인솔하여 운악산 등반 도중 기진맥진(氣盡脈盡)한

그녀를 혼자 먼저 내려 보내고 등반을 마쳤다는데, 김 지점장이 약속장소로 합류를 하지 않기에

사고의 낌새를 알아 건장한 직원들을 다시 산에 투입하는 등 사고를 수습하려 했다.


시간이 흘러도 찾을 수 없어 119등 관계기관에 신고를 한 후 수일 만에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구조대원 말로는 사람이 접근 불가능한 지역에서 찾았다며 그 후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규명이

되지 않은 채 위로금과 직원성금으로 사고처리가 완료 되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직원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평소 심장이 약해 집합장소에 남편이 태우고 와서 본부장에게 신경 써달라고 직접 부탁을

하였으며, 딸도 엄마가 소복을 한 꿈을 꿨다며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본부장의 리더십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지점장 외 지역본부에 소속된 다수의 직원이 동행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라도 딸려 보냈으면

엄청난 사고가 생겼을까.


남편의 복잡한 여자관계로 평소에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심장이 안 좋았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내려 보낸 리더십에 대한 미스테리도 같이 생긴 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의 절벽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름이 끼친다.

저 아래로 추락했을까?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소나무가 도래솔처럼 느껴진다.


연인산 등산을 마치고 운악산 옆을 지나며, 언젠가는 운악산에 올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명복(冥福)을 빌겠노라고 마음을 먹었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오늘에서 명복을 빌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빚을 졌기에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거다. 


영등포역지점을 그녀에게 인계하고 새로 부임한 효령로 지점에서 점포 확장공사를 벌이고,

지점명도 방배서 지점으로 바꾸는 등 새로운 영업망 확충을 하느라 한동안 낮과 밤이 바빴지.


당시 효령로 지점은 주택은행과 통합한 국민은행 1,000여 개 지점 중에서 950등 이하를 맴도는

최하위 점포로 내 전임 지점장이 보직대기를 받는 등 꼴찌 점포로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중이라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은행원으로서 불명예인 명예퇴직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김 지점장이 수시로 내가 섭외하던 거래처에 대하여 동행요청이 들어오고, 실적을

나눠달라고 요청을 한다.

영등포역 지점의 직원과 예산을 들여 확보한 거래처는 다 넘겨주었는데도 계속 요청이

들어오기에 나는 김 지점장에게 "이제 지점장이 되었으니 스스로 독립하라"고 매몰차게

거절을 한다.


나는 이름을 바꾼 방배서 지점에서 고군분투를 한 대가로 최하위 점포에서 벗어나 2년 연속

수퍼(S)등급을 받아 국민은행 지점장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국은인상'을 수상하는 등

전성기를 보내며 그녀를 잊었다.


말(言)과 말(言)이라,

사람은 지인으로부터 말(言)로 상처를 받기가 싶다.


친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던지는 말,

가볍게 던진 말이 상처가 되고 그 상처를 준 사람을 원망하기도 하는데,

대개 상처 준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는 형국이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속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매몰차게 했던 말이 김 지점장에게 상처가 되지나 않았는지 괜스레 미안했는데

늦게나마 명복을 비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설저유부(舌底有斧)라,

사람은 다 입에 도끼를 물고 태어나며, 남을 헐뜯는 어리석은 자는 그 도끼로 자신을

벤다라는 말이 있다.


말을 뱉은 사람은 쉽게 잊지만 그 말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두고두고 못 잊는다.

부처님은 사람 입속에 생태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인성의 숲이라는 거다.



30m 절벽을 겨우 내려와 숨을 몰아쉰다.

보이는 것보다 매서운 게 운악산이다.

운악산은 이름과 같이 달콤한 자연이 아니기에 낭만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으로 멀리 펼쳐지는 풍경은 나의 거친 숨을 보상해준다.

운악산은 낭만적인 산은 아니지만 내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는 산이다.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풍경은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가만히 지켜보면 더 아름다운 풍경이라 쇠 난간을 잡고 잠시 선다.


자연에선 모든 게 새롭게 보이는 법,

세월은 쉴 사이 없이 흐르고 자연의 시간 앞에 내 삶의 조각과 욕망이란 허망하지.


예전에 오르내렸던 20m 직벽의 사다리엔 녹이 슬고 옆에 48개짜리 철 계단이 생겼다.

겁 없이 오르고 내렸던 사다리에 내 청춘이 녹았는지 오늘은 보기만 해도 떨린다.


여기에서 중심을 똑바로 잡지 못하면 권력을 가졌던 재물을 가졌던 높은 지위를 가졌던

순식간에 저승행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출세하면 세상을 더 가지려하고, 더 가지게 되면 더 허기지고,

잃을 게 많으면 많은 대로 근심과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라,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난간을 잡으며 뒤로 내려가니 마음이 허기지지 않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일행은 내 눈 앞에서 사라졌고 혼자 조용한 산길을 걸으니 세상사가 티끌처럼 보인다.


기묘한 바위 군상들은 만물상을 만들었고 절벽의 소나무들은 고절한 풍광을 만들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직으로 세워진 바위들의 향연을 보며 마음이 평온해지기에 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13;25

물개의 뒷모습을 닮은 바위에 올라서며 백수라도 바쁘게 살아온 몇 년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등바등하던 순간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이라도 이렇게나마 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

이런 순간이 바로 행복이구나.


현기증을 느끼며 긴장을 하는 하산 길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절벽을 내려서면 정상에서 겨우 260m만 내려온 건데,

예전에는 힘도 들지 않았고 이렇게 떨리지도 않았으니 청춘과 황혼의 차이인가 보다.


바람이 운다.

골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앞으로 내려가지니 긴장이 되어 뒤로 돌아 로프를 잡고 내려간다.



13;40

휴! 260m 를 내려오는데 무려 40분이나 걸렸다.

아직 일몰이 4시간이나 남았으니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소나무 사이로 병풍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합장을 하고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미륵바위는 이미 용화의 세계가 되었으니

미륵이 그리는 극락정토구나.


미륵바위는 일몰이 그리운 곳이다.

저마다 산길의 풍경은 다르겠지만 태양이 저 미륵바위에 걸쳤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미륵바위에 내려앉는 노을빛은 어떨까,

달빛은 어떨까 궁금해 폰의 달력을 보니 음력으로 8월 9일이라 달이 성글지는 않았겠다.


미륵바위가 내려다보는 인간세상을 나도 따라 내려다본다.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인가,

갈등, 부조화, 부조리가 가득한 인간세상의 못난 모습이 파란하늘 아래 그대로 보이니

여기는 화엄(華嚴)의 세계이기도 하다.



고달픈 산행을 하면 세상사를 잊어버리고 비워진다.

아무 생각 없이 나 혼자 동떨어져 내려가기도 지루해 앞서가던 친구를 부른다.


산행도 인생도 더불어 함께 해야 된다.

더불어 사는 게 인생이라 별로 위로를 받을 일도 없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 미안함과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말을 하면서 함께 하산을 한다.



또 나온 가파른 절벽이 호흡의 깊이를 시험한다.


나의 사연은 다 튀어나왔는데 순수한 자연의 길에서 무슨 사연이 또 튀어나올까.

시간이 내려앉은 고사목의 뒤틀림은 신비롭다.


한 골 한 골 새겨진 세월의 나이테는 시간과 공간을 정지 시킨다.


산속은 적막이다.

바람소리도 사라지고 혼자 터덜터덜 걷는다.


그래 이렇게 걸으며 사는 거야라며 혼자서 넋두리를 한다.


나무 사이로 거대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            병풍바위


                  하늘의 구름바다는

                  햇볕이 내려 산산이 부쉈구나.

                 

                  바람에 흩어지는 시간은 잡지 못하고

                  거대한 절벽은 강인한 근육을 보여주는데

                  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숨쉬기조차 부담스런 파란하늘가에

                  흰 구름 떠가다 사라지고,

                  잠 못 이루던 여름날도 다갔구나.

                 

                  초록으로 왕성한 기운을내던 산

                  서서히 내려놓을 준비를 하는 차에

                  바람마져 숨 죽이던 숲속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니

                  나무 밑에서 숨을 붙이던 억새가 흐느끼며 운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나무들은

                  큰 파문을 그리며 출렁거리고

                  병풍바위를 걷는 내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텅 빈 가슴에 긴 여운으로 맴돈다.                                        석천   >


파란하늘 아래 보이는 운악산의 속살은 서서히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말하고,

나에게 보여주는 풍경은 내 작은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내 작은 눈으로 보이는 웅장하게 펼쳐진 풍경은 순식간에 세상을 압도한다.

파노라마로 찍어야하는데 한손으로 밧줄을 잡고 있어 파노라마 셔터를 누를 수 없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사진을 찍는 거 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만경을 담은 만경대인지 경관을 바라보는 망경대인지 모르지만 내 카메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장엄한 풍경은 운악의 절창(絶唱)이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설악산 만경대와 북한산 만경대가 떠오른다.


유리알 같이 빛나는 만경대 위 하늘을 본다.

어제 내린 빗줄기와 바람이 쓸어 낸 하늘은 거울과 같다.

저 하늘에 나를 비춰보면 내 존재의 얼굴이 보일까. 


14;13

병풍바위 전망대에 오르는 길에도 어김없이 가는쑥부쟁이가 피었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의 고승 마라하미가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를 오르다 미끄러져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행을 하다 죽었다는 수직절리가 일품인 병풍바위를 본다.


병립한 바위봉우리들이 협곡을 박차고 하늘에 우뚝 솟았다.

어느 봉우리들은 앞으로 나오다가 뒤로 숨었고, 방향을 조금 바꾸니 숨었던 봉우리가

앞으로 튀어 나온다.


천길 벼랑에 다닥다닥 붙은 소나무가 수를 헤아리기 어렵고 기암절벽마다 기개가 서렸으니

여기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만경(萬景)의 세계로구나.

운악산이 펼친 금강의 세계는 진경산수화를 그렸고 산수화 속에는 평화와 고요를 담았다.


14;20

정상에서 900m를 내려오는데 1시간 10분이나 걸렸으니 이 코스는 느림의 미학을

진정으로 실천한 길이다.


문경새재에서 만났던 디딤돌바위와 비슷한 바위를 이곳에서도 만난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발로 밟으면 금세라도 방아를 찧을 태세이다.


15;00

수평의 세계가 그립다.

여기가 레펠코스로는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장갑을 끼어 손바닥은 괜찮지만 스틱을 접고 로프에 매달려 내려왔기에 어깨도 아프고

수시로 돌에 부딪힌 양 무릎 사이가 까져 쓰리다.


운악산에는

천년고찰인 현등사, 백년폭포, 다락터, 오랑캐소, 눈썹바위, 코끼리바위, 만경대, 무우폭포,

큰골내치기 암벽, 노채 애기소 등이 운악 8경으로 유명한데 그 중 지금 눈썹바위를 만난다.


여기도 선녀와 총각의 설화가 있는 눈썹바위이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는 사이 총각이 선녀 옷을 감추었다가 옷을 내주니 그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그리워하던 총각이 눈썹바위가 되었다는 진부한

전설을 읽는다.


오늘 운악산에서 현등사, 코끼리 바위, 남근석, 만경대, 무우폭포, 눈썹바위를 보았으니

웬만한 건 다 본 셈인데 묘하게 눈썹바위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15;35

거대한 암석의 계곡에서 벗어나 현등사에 오르는 임도에 내려서며 가을 국화의

대명사인 가는잎구절초를 만난다.


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소경불알, 중대가리풀, 광대나물, 송장풀 등 부르기도 듣기도

민망한 이름이 많은데


오늘은 꽃도 예쁘지만 이름도 예쁜 꽃을 만나는구나.

계요등, 기린초, 구절초, 쑥부쟁이 등 이름은 평범하면서도 조상들의 해학과 지식이 담겼다.



6시간 만에 수직의 세계에서 수평의 세계로 탈출한다.


아침에 이곳을 지날 때 험한 코스를 제대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만경대 아래 절벽엔 옛날 사다리가 그대로 있을까.

일행들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운악산을 벗어날 수 있을지 온갖 상념 속에 마음이 무거웠지.


숱한 걱정을 안고 이곳을 통과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운악산의 속살을 알고 나를

알게 된다. 


힘들고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산행이라는 성스런 의식이기도 하기에

운악산이라는 자연에서 삶의 허기가 메꿔진 거다.


소실점으로 친구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저 소실점은 인간세계로 나가는 세계로구나.


나는 잠시 산에 들린 손님이지만 산에서 보낸 시간만큼 산을 더 알아가고

아는 만큼 산과 더 인연이 깊어진다.


이 길을 벗어나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황홀한 노을이 숨 막히게 아름다울까.


'꽃범의꼬리'가 어두운 숲속을 밝힌다.

서울 근교에선 붉은 빛과 연분홍색이 섞인 꽃범의꼬리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흰 꽃범의꼬리를

만나니 반갑다.


산행을 하면 나도 모르게 변화를 한다.

아침에 나설 때와 들어갈 때가 다르니 나도 모르게 작은 변화가 온 거다.


16;00

일주문을 벗어나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로 밤이 떨어진다.

아람이 벌어지자 밤송이에서 밤 한 톨이 성급히 튀어나와 내 머리를 때린다.

밤나무를 보니 둘레가 제법 굻어 수령이 오래된 고목이다.


밤나무는 유가(儒家0에서 특별히 중시하는 나무로 그 열매인 밤은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조율시리(棗栗枾梨)로 진설하던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조율이시로 진설하기도 한다.


밤나무는 밑을 파면 신기하게도 뿌리 밑에 처음 밤나무를 심었을 때 심은 씨인 밤이

안 썩고 뿌리에 남아 있다.

따라서 출발과 근원을 잊지 않는 밤나무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선조들은 생각했다.


백로(白露)와 추분이 지나면서 저녁 바람은 제법 스산하다. 

휴양림숙소 앞에서 만난 '곽향(藿香)"이 꽃향기를 흘린다.


밤사이 차가워진 공기는 내일 아침 영상 3도까지 온도를 끌어 내린다고 예보를 한다. 



18;00

서쪽으로 노을을 만들며 해가 저문다.

하루를 밝히던 해가 저무는 순간은 해가 뜰 때보다 더 아름답다


22;00

하늘엔 총총한 별들이 빛나고 나는 술 향에 취한다. 

오늘밤 상현달이 떠오르면 술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마시며 하염없이 가슴을 적시려

했는데 술에 취한 몸은 약조차 먹기를 거부하는구나.


                                                   2017.  9.  29.  운악산 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