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0. 10;00
하늘에서 함박눈이 떨어진다.
함박눈은 진눈개비가 되었다가 빗방울로 변하고 다시 함박눈으로 변한다.
세상사와 같이 하늘도 오늘따라 유난히 변덕이 심하다.
문득 눈 쌓인 광주향교(廣州鄕校)의 모습이 그리워 카메라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유장한 능선 한가운데 객산(客山 302m)이 우뚝 솟아 나를 내려다본다.
향교는 고려시대 중앙집권체재를 강화하기 위해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향학(鄕學)의
시초가 된다.
지난 11월 27일 베트남 최초로 설립된 대학교인 문묘에 다녀온 후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던 중 향교를 찾게 된다.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인 향교,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웠는데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500년이 넘은 수컷 은행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며 숭유억불에 대해 생각을 한다.
고려 말기의 사대부는 성리학을 받아들이며 불교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불교 행사가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치고, 승려들의 타락 등 불교의 폐해가 심해지며
비판은 물론 척불론(斥佛論)에 이어 폐지까지 진전되다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척불론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조선 태조 5년 이곳에 향교를 세울 때 한 지관이 이 땅이 거북이 형상으로 명당자리라며
은행나무를 심으라고 하여 심었다는 수은행나무(男銀杏木)는 향교 입구의 450~500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 네 그루를 거느리는 수호목이다.
이 나무도 용문산 은행나무와 같이 국가에 변고가 생기면 엉엉 울려나.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수상스러워 8m나 되는 나무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다.
배불정책의 두 가지 중 하나는 불교세력의 인적·물적 기반을 축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불교가 담당하던 상제례(喪際禮)를 유교식으로 바꿈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권위를
약화 시키는 것인데,
후일 불교는 여전히 종교로서 대접을 받지만,
유교는 종교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학문으로서만 대접을 받는다.
즉 불교는 극락과 지옥이라는 내세(來世)가 있고, 유교는 오직 도덕에 기초한 학문만 있기
때문이다.
눈이 빗방울로 바뀐다.
문득 내가 어려서 살던 동네가 생각난다.
진천 읍내에서 과자공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셋째인 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니 아직 전쟁 중였겠지.
어느 날 바람에 창문이 떨어지면서 나를 덮치지 않았기에 다행히 생명을 유지했고 놀란 아버지는
그 공장이 있던 집을 팔고 향교골로 이사를 하였다.
그 향교골에서 유아기에서 중학생인 소년기까지 성장하고 서울로 유학을 하였으니
나 자신 향교문화에 조금은 친근감이 남았고 반듯하게 살려고 했다.
눈과 비가 내리는 향교를 바라보며 잠시 흘러간 소년기를 되돌아본다.
거대한 은행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낙엽 몇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건 나비가 나르는 모습이지만
담쪽에 있는 회화나무의 말라비틀어진 낙엽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하게 한다.
백일홍은 선비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향나무는 인품에서 우러나는 향기를 상징하고,
회화나무는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던 어사화(御賜花)를 상징하는 나무인데
볼품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부귀영화를 팽개친 듯 괜히 쓸쓸해진다.
2017. 12. 14. 06;00
현재기온 영하 13도.
산천이 얼었고 한강도 결빙이 되었다고 방송이 나온다.
추위에 완전무장을 하였지만 종아리가 썰렁하니 겨울이 한참이나 머무르겠다.
사위는 간밤의 어둠을 밀어내 밝은 빛이 쏟아지고 동쪽하늘에 노을이 진다.
10;12
회색 빌딩숲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왔다.
16살에 떠난 고향,
정확히 반세기가 흘러 두타산을 찾는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들판이 텅 비었고 초록으로 꽉 찼던 숲속도 비었다.
텅 비어가는 자연을 따라 나도 버리고 비워야하는데 요즘 들어 마음이 심란하다.
맹자는 붙들면 보존되며 놓아두면 달아난다고 '조칙존 사칙망(操則存 舍則亡)'이라며
마음을 붙들어 매라고 했다.
마음이 나가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으니
요즘 영락없이 내가 그 꼴이라,
마음이 나간 자리에 쓸데없는 잡념이 들어와 잠을 설치기 일쑤다.
두타산의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가슴으로 스며든다.
아 ~어느새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겨울이구나.
텅 빈 산속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초록으로 꽉 차 속내를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가 휑하고 천년고찰인 영수사의 주차장에도
인적이 끊겼다.
빛바랜 앨범을 찾아보니 1965년 중학교 2학년 때 이곳 영수암에서 찍은 사진이 나온다.
지금은 영수사(靈水寺)지만 그 당시에는 영수암(靈水庵)이라 불리었다.
고려 태조원년인 918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하였다니 무려 1,110년이라는 세월이 내려앉은
영수사 입구에 삼계대도사생안(三界大道四生安)이라는 푯말이 나를 맞는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를 삼계(三界), 즉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걸쳐
대자대비를 베푸는 성자(聖者)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라고 존칭한다.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는 일체 생령의 자비스런 어버이라는 뜻인데, 혹시 다른 해석이 있을까
묻기 위해 절 안을 기웃거려도 인적이 없다.
이곳까지 오르는 길이 별로 안 좋아 스님과 신도들이 없는지, 어느 절에나 다 있는 강아지도
보이질 않는다.
지금 내가 오르려 하는 두타산의 영기를 받아 만병통치를 한다는 약수가 흘러 영수사(靈水寺)라
하였다는데 물소리는커녕 사람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물맛을 보긴 글렀다.
산사(山寺)를 지나며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윽한 풍경이 마음을 붙들면서 잡념이 사라지는 거다.
적막이 쌓인 절간은 마음을 응집하여 고요하게 안정 시켜주니 보수정정(保守靜定) 지역이구나.
10;15
나는 두타산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언제든지 두타산에 부담 없이 오라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없는 초대장을 지도에서 읽는다.
산을 좋아하지만 고향인 진천지역엔 만뢰산과 안성 쪽의 서운산을 오른게 다였는데
전국 산의 지도를 펼치니 두타산이 눈에 들어오며 초대장을 나에게 보내는 거다.
두타산 정상까지 2.5km가 된다며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니 험한 산은 아니겠다.
산길 위에 서면 몸이 마음보다 몇 발짝 앞서가는 기분이 든다.
마른 잎들이 날려 산길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작은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나만이 가진 추억이 있지.
보릿고개를 보냈기에 동화처럼 밝은 어린 날의 추억은 아니지만 고향의 깊은 품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요했던 산중에 아주 작은 미풍(微風)이 분다.
파도의 노랫소리가 아닌 산중에서 들리는 작은 바람소리는 고향을 떠나본 사람만이 아는
향수를 느끼게 한다.
산길을 타박타박 올라간다.
모든 걸 버린 산중에서 느끼는 적막은 외로움이다.
적막을 느끼면 비로서 내 목소리가 들리고 내면의 내가 보인다.
겨울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산은 매 계절 다른 모습을 주여주는데 유독 겨울산만큼은 자기의 모습을 가리지 않고
속살을 보여준다.
숲속은 초목의 풍화하는 숨결로 가득하다.
나무는 빈 몸으로 다가온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걷는다.
숲 냄새가 싱그럽고 공기는 달다.
나무들이 다투어 빈 몸을 만든다.
회나무 열매가 무르익어 떨어졌고 팥배나무의 빨간 열매가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잠시 눈을 감고 산의 소리를 듣는다.
연말이라 계속 이어지는 송년회에 참석하다보니 쉼이 필요했지.
숲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살짝 부는 바람과 나뭇잎 소리는 숲의 교향곡이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 힐링(Healing)의 느낌이 온다.
하늘에서 전투기의 굉음이 들리고 흙냄새와 낙옆냄새가 내코를 자극한다.
이 숲에서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을 오래 유지할 수 있으려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물이 흘렀을 계곡에 두터운 얼음이 얼었고 물소리도 살짝 들린다.
오늘처럼 약한 바람이 불어대도 계곡의 물은 흘러가는 대로 담아두지 말고 고이 보내라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두타산은 골 때릴 정도로 험한 산이라는 두타산(頭打山)이 아니다.
두타(頭陀)란 버리고 또 버려야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라 불가에서는 즉 버림과 고행을
말하는 거다.
계곡의 얼음을 내려다본다.
수천만 년 쏟아지는 물길에 커다란 소반처럼 파여 초록물을 담았던 암반도 말랐고,
단풍 잎이 말라비틀어진 사이를 쉬엄쉬엄 오른다.
웅장한 물소리를 들으려 온 게 아니기에 그냥 내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두고 걷는 산.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니 무념(無念)의 걸음을 걸을 수 있어 나 자신을 보기에 알맞은
숲길이다.
마음이 달아난 자리에 잡된 생각이 잠시 들어와 논다.
마음을 붙들면 잡념이 사라지는 법인데 숲길을 한참 걷자 비로소 잡념이 사라진다.
숲으로 햇빛이 스며든다.
투명하게 빛나던 형형색색 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무들은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었다.
참나무 잎들은 암갈색으로 누렇게 변하고 몇 잎만 겨우 매달려 나풀거린다.
산길에 마른 잎들이 수북이 쌓였다.
제법 푹신한 길이 이어지고 마지막 남은 단풍잎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산을 다니다 보면 가끔 산의 등급을 매기는 버릇이 생겼다.
무릇 어느 산이던지 숲속으로 들어오면 다 좋지만 특별히 더 좋은 산도 있다.
산행이 궁극(窮極)에 도달하려면 영발산행(靈發山行)을 해야 하는 거다.
내가 그동안 영묘할 령(靈)자를 쓰는 산을 몇 곳이나 올랐을까.
월악산 영봉, 북한산 영봉, 두륜산 영봉, 주흘산 영봉 등을 떠올린다.
두타산은 영수사(靈水寺)를 품은 산이니 영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산이다.
삶에서 영(靈)이 빠지면 영혼이 빠지는 것이기에 바로 우울증이 온다는데 이 산에선
그럴 일이 없겠지.
신령한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받으면 세상 근심걱정이 사라지며 구원을 받는다.
누군가 바위에 쌓아올린 작은 돌탑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 산을 오르며 이름 덕분에 바위산의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싶었는데, 묘하게도
오히려 온화하면서도 장중한 기운을 주는 육산(肉山)의 모습이라 마음이 더 편해진다.
같은 산을 올라도 마음에 따라 행복함과 즐거움이 다르다.
오름길에 유일하게 만난 바위를 보며 기운이 뭉쳐 있는 영지(靈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삶과 늘 가까이 있는 산.
두타산은 내 할아버지, 할머니, 백부, 백모, 사촌형제들이 잠 들어있기도 하지만,
초평 사람들의 땔감을 대주던 산이기도 했다.
10;32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천천히 올라도 날씨가 추우니 호흡의 깊이가 다르다.
겨울 산을 오를 때는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간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인기척에 잠자던 나무들이 부스스 잠을 깨 몇 장 남지 않은 나뭇잎을 날려준다,
진했던 단풍들이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낙엽이 되어 산길을 메꿨다.
오늘은 숲과 연애하며 떨림을 느끼고 싶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외로움을 느낀다.
나약해질수록 숲에서 느끼는 마음을 무엇이라 표현할까.
깊고 긴 겨울 산을 오르는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설악산 단풍에 미친 듯이 홀려 허겁지겁 신선대에 올랐어도 무엇이 부족한지 항상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지.
껴입은 등산복 사이로 한기가 스며들고 낙엽 쌓인 길은 사람 없어 한적하다.
가파른 길은 좁고 옹색하지만 적막을 누릴 수 있어 좋고,
숲에서 맑은 공기를 머금은 겨울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 좋다.
11;03
1.5km를 올라와 갈림길에 선다.
정상까지 1km가 남았구나.
여기까지 오르며 칡넝쿨을 보지 못했다.
숲은 치열하게 생존경쟁이 있는 곳인데 묘하게도 칡넝쿨이 없으니 나무들은 올곧게 자랐다.
내가 다닌 산 중에 어느 곳에 칡넝쿨이 없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산청의 황매산에도 칡넝쿨이
없었음을 기억해낸다.
내가 그동안 올랐던 두타산이 이곳 포함 3곳이지.
2012. 9. 19일 정선의 두타산에서, 삼척의 두타산을 오르며 두타산성의 너덜지대에서도
칡넝쿨을 본 기억이 없다.
잠시 쉰다.
산에서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아 천천히 걷지만 겨울의 해 그림자는 나보다 더 빨리 따라온다.
나 자신의 그림자(影)와 발자국(跡)이 계속 나를 따라 붙는다.
어느 어부는 늘 바쁜 공자에게 "그늘에 들어가야 그림자가 쉬고(處陰以休影), 고요한데
머물러야만 발자국이 쉰다(處靜以息跡)."라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
휴영(休影)과 식적(息跡)이라,
바쁘게 헐떡거리며 사는 것도 아닌 백수의 삶이지만 그래도 좀 쉬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련다.
무위의 자연은 오늘도 생(生)~육(育)~성(盛)의 과정을 지나 멸(滅)의 시간 속에
침잠(沈潛)을 하고 있다.
이 멸(滅)의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 하겠지.
잠시 시간이 정지한 숲,
늘 이 자리에 있는 소나무 숲을 오롯이 우리만이 걸으며 잠시 시간을 잊었구나.
한기(寒氣)를 품은 바람이 지나자 솔잎이 자유낙하를 하다가 땅 위로 쏟아진다.
11;16
전망대가 500m 남았다.
눈 녹은 물인지 낙엽을 보내며 서러워 우는 나무의 눈물인지 머리 위로 한 방울 떨어진다.
오랜만에 지난 시간을 꺼내본다.
떠나보낸 시간과 추억을 회상하며 젊음이 참 빨리 흘러갔음을 실감한다.
다시 돌아온 12월,
며칠 후면 나이를 한살 더 먹는구나.
빈 가지에서 소리를 지르던 검은등지빠귀는 어디론지 날아갔고, 나무들은 나이테를 하나
더 늘렸는데 나의 얼굴엔 주름살이 늘어난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며,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라고
시인묵객들은 말했지.
노년이라는 말이 점차 익숙해지고, 눈가에 느는 잔주름이 제법 친숙해진다.
매서운 바람이 잠잠해진 숲은 우리만의 공간이다.
세상의 잡다한 일도 잊고 맑은 기를 흠뻑 마시며 앞으로 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생각한다.
철갑껍질을 두른 금강송이 전망대 주변에 빼곡하다.
근사한 노송이 점잖게 앉은 바위 턱에서 숨을 고른 다음 전망대에 오른다.
소나무가 용트림을 하는 특급 전망대 앞에는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전혀 없고
덩치 큰 산봉우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섰다.
멀리 박무(薄霧) 사이로 2014. 8. 21일 올랐던 만뢰산이 솟았고, 갈미봉, 봉화산이 보이더니
초평저수지는 어느새 숨었고 미호천이 유유히 흐른다.
능선 너머로 미호천 평야를 굽어본다.
단군시절 7년간 비가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에 잠겼을 때 신하인 팽우가 배를 타고 사람을
구하던 중 한 섬(島)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기에 배를 대고 이들을 구해주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섬이 두타산의 머리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두타산 정상을 가리도라고 불렀으며 배를 댄 잘록이를 배너미고개라고 하고
머리 두(頭)와 섬 타(陀)를 써서 두타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전설을 가진 두타산에 내가
올랐다.
우리나라에 비슷한 전설을 가진 산이 여러 곳이지.
양평의 해협산(海峽山)과 지리산 고리봉도 비슷한 전설을 가졌으니 옛날 옛적에 한반도는
비가 많은 지형이었다고 유추해석을 해본다.
잘못된 이름의 두대산이 아닌 두타산은 마치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했다.
전망대에서 두타산의 전체적인 형상을 볼 수 없이 유감이지만 유장한 능선은 어느 정도
닮았다.
문득 해남 두륜산 능선의 와불(臥佛)형상이 생각난다.
중심봉과 방송용 송신탑이 외롭고 하늘엔 구름이 허허롭다.
증평 보타사 쪽에서 오르면 암벽과 제법 험준한 지형으로 두타(험할 陀)라는 이름에 걸맞지만
오늘 영수사에서 오르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평범함을 보여줬다.
능선상에 솟아오른 봉우리에 통신안테나가 하늘을 찌른다.
1973년 37사단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다가 아마도 10월말쯤으로 기억이 난다.
두타산의 통신부대에서 사용할 월동용 기름통을 짊어지고 올랐는데,
수백 명의 훈련병이 탄띠와 배낭끈을 이용하여 20ℓ짜리 기름통을 짊어지고 오르는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었지.
힘도 들었지만 매섭게 몰아치는 조교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올랐던 곳의 안테나가 한가롭다.
참 편안한 산길이다.
최근에 다닌 산 중에서 가장 편안한 길이니 두타라는 이름이 무색하고,
산길을 오르다 조금만 힘들다고 생각이 들 때면 여지없이 쉼터와 의자가 있다.
다시 길은 가파르게 하늘을 향하여 솟구쳤다.
정상으로 이어진 짧은 길이라 경사도 그만큼 급했다.
이후 조금 편해지는 길을 따라 숨을 고르며 오른다.
첩첩이 늘어선 능선의 등성이엔 나무들이 빼곡하고, 가쁜 숨을 몰아쉴 사이도 없이
500m 를 걷는다.
얼마를 올랐을까
정상이 가까워지는 거 같아 바로 비탈길을 오르니 순식간에 숲을 벗어나고 앞에 평지가
나타난다.
598m의 높지 않은 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홀로 우뚝한 두타산에 올랐다.
11;40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화산리에서 보던 정상에 올랐다.
이 산 저 아래에 할아버지가 사시던 큰집이 있었지.
제사 때나 명절 차례를 지내러 오면 아버지는 누런 들판을 보며 담배를 피우셨지.
철없는 나는 사촌형제들과 뛰어 노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이 산이 두타산이라고
가르쳐 주신 거에 대해 정확히 기억을 한다.
한 발짝 한 발짝의 걸음이 쌓여서 오른 정상,
두 다리가 타는 듯한 고통이 없이도 오른 정상의 침묵은 정신을 깨우치고 열반에 들라고 한다.
금년 한 해도 불과 보름이면 지나가고 새해가 온다.
자연의 시간도 세상의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가겠지.
위엄을 갖춘 두타산 정상의 넉넉한 품의 암반지대에 정자와 정상석이 3개다.
삼국시대 석성(石城)인 두타산성의 흔적은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자취를 감춰간다.
정상의 정자는 초록을 유지하는 소나무와 멋진 조화를 이뤘다.
자료에는 삼국시대의 석성(石城)과 샘터가 있다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샘터는 보이질 않고,
통일신라의 토기편 기와조각과 고려시대 유물도 출토되었다는데 아무데도 표시가 없다.
주위 1km, 높이 1.2m의 규모의 석성터를 밟으며 다시 두 개의 우물터를 찾다가 하산을 한다.
살짝 미풍이 분다.
바람은 어디에서 올까.
어느 시인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이라 했는데, 하늘엔 엷은 구름이 흘러간다.
눈이 아닌 마음의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흘러가는 구름 따라 내 마음도 따라갈까.
12;12
조금 전에 지나쳤던 갈림길이구나.
갈림길마다 잠시 숨을 고르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다시 걷는 이 길은 행복이기에 천천히 내려간다.
인디언들은 빨리 달리다가도 중간에 멈춰 선다고 하는데 자기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기다린다는 거다.
나도 잠시 서서 내 영혼을 기다린다.
그동안 너무 빨리 지나가 극락을 지나쳤을 수도 있다고 나무들이 말을 건넨다.
이 길은 겨울이 아니고 늦가을의 모습이다.
낙엽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산길은 꽁꽁 얼어붙은 황량한 대지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은 긴 겨울의 침묵 속에 빠졌지만 곧 가냘픈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겠지.
오를 땐 이렇게 가파르다는 생각을 안했는데 길은 제법 가파르고 찔레나무의 푸른빛이 남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외로이 한겨울을 떨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 마지막까지 곱게 물들이고
불태우던 단풍나무가 차마 잎을 떨구지 못하고 바르르 떤다.
우리의 인생도 이 겨울처럼 마지막 가는 길인가, 짊어진 배낭에 인생의 황혼을 담았구나.
산은 열심히 비운다.
봄여름에 열심히 채웠다가 가을에 혼신의 불을 태우고 비워낸다.
자연은 사람과 달리 많이 담고 채운다고 해서 넉넉해지거나 풍족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비우는 거다.
그저 때가 되면 비워내는 것이 담아두는 것보다 편하기도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비우는 건 자연의 법칙이다.
나 또한 가슴 시린 겨울의 낙엽처럼 청춘이 사라졌기에 오는 대로 담지 말고 흘려보내리.
저무는 인생길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이 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기가 어려워진다고 한다.
새로운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산에만 오면 무엇이든 다 수용이 될 거 같으니 그 무엇은 내 마음속에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람쥐가 꼬리를 세우고 빈 길을 뽀르르 앞서가며 따라오라 하고, 나무 위에서 쉬던 콩새가
나를 놀리다가 어느 틈에 사라진다.
12;58
다시 만난 영수사는 여전히 적막에 쌓였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이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두타모종(頭陀暮鐘)이라 하여 진천
상산팔경(常山八景) 중의 하나라 친다는데,
시간이 맞지 않으니 들을 수도 없고,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보물 제1551호 괘불을
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이 시간에 종소리를 들을 일도 없고,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니 괘불을 보지 못하는 것도
모든 걸 버리라는 두타의 섭리구나.
맞다 이 산에서 기본은 버림이었지.
12. 15. 08;00
술에 떨어져 고향의 밤하늘도 제대로 보지 못한 죄스러움에 새벽의 하늘을 본다.
어디선가 날아온 전투기가 비행운만 남기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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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다리 하류에 대백로 한 마리와 해오라기 한 마리가 물속을 응시하며 도하청장(淘河靑莊)을
연출한다.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다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에 올랐다.
웬만한 다리는 미끈한 조형미를 자랑하는데 이 다리는 참 못생겼다.
지네의 다리와 닮아서 지네 농(또는 대그릇 籠)자를 쓰는데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았다.
동양철학 사상 중 별자리 28수(宿)를 참조하여 교각은 28이고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로 교각 사이의 내폭은 약 80cm 내외이다.
28수란 천체의 별자리를 동서남북(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4방으로 나누고 각각의 방위는 7개의
기운 즉 일월화수목금토의 소우주로 구분한다.
따라서 사방의 일곱 별자리를 모두 합해 28수를 우주로 보았다.
석회를 사용하지 않고 쌓았는데도 견고해 큰비가 와도 유실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다는데,
이번 여름 장마에 약간의 유실이 있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고려 초기의 실세 임연 장군이 놓았다는 돌다리는 규모도 상당히 크고 축조술도 특이하다는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이다.
농다리(籠橋)는 재미난 전설이 있다.
임장군이 세금천에서 몹시 추운 어느 날 세수를 할 때, 건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川)를
건너려는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사정을 물으니 여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임장군은 여인의 효심과 모습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만들었고, 힘에 겨워 쓰러져 죽은 용마의 끈이 끊어져 떨어진 돌이 용바위(쌍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임연의 오누이 힘내기 설화도 전해진다.
옛날 굴티 임씨네 집안의 아들 딸 남매가 훌륭한 장사라서 서로 죽고 사는 내기를 한다.
아들인 임장군은 굽 높은 나무신을 신고 목매기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했고,
딸은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는데, 아들이 늦을 것을 염려한 어머니는 딸에게 뜨거운
팥죽 등 먹을 것을 해다주며 일을 늦추게 한다.
결국 아들이 먼저 돌아와 화가 난 딸은 치마에 있던 돌을 내려치고 죽는데 그 돌이 지금도
박혀있다고 한다.
딸이 마지막 한 칸을 놓지 못해서 나머지 한 칸을 일반인이 놓았는데 일반인이 놓은 다리는
장마가 지면 떠내려간다는 재미난 전설이 전해진다.
이 다리는 재앙을 예고하는 다리이다.
큰 구렁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해는 6.25전쟁이 일어났고, 동학혁명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예고하였다고 전해지며, 장마 때 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과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데
금년 장마로 일부가 훼손되었다니 걱정이 된다.
6.25 전쟁 때 봉화산 문안산의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어젯밤 머무른 멍심이와 이곳 굴티
지역은 인민군이 안 들어와 진천사람들 상당수가 피단을 왔다는데 이곳 서낭당의 보살핌이
있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생사의 갈림길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세 종류의 기도노선이 있는데 산신과
바다의 용신, 그리고 하늘의 칠성신이다.
그중 서낭당은 대개 단군신을 모신다.
1961년 흙댐으로 완공되었다가 콘크리트댐으로 바뀐 초평저수지는 유역면적 약 50㎢에
저수량이 1,400만 톤에 이르는 대형 저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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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야외음악당은 힐링의 공간이라 소리를 질러본다.
물속에서 유영을 하는 새소리를 들으며 잠시 동적명상을 하였으니 명상과 치유의 공간이구나.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 고요함에 젖어 때 묻지 않은 호수를 걷는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이 되는 백수의 인생이 지루해질 때 찾은 힐링의 공간을 오늘은
마음껏 누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