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51 금산 진악산(732m)의 봄

김흥만 2018. 5. 3. 17:41


2018.  4.  25. 06;00

밤새 웅웅거리며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은 붉게 타오르는 여명빛을 받자마자 사라졌다.

여명(黎明)이 사라지자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은 신기하게도 티없이 맑고 찬란하게

빛난다.


이번 봄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자연에서 정해준 순서도 마다하고 서로 앞 다퉈 핀 꽃들은 간다는 몌별(袂別)의 인사도

없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10;24

꽃 피고 지는 봄날이 고운 곳,

너른 들판이 사방으로 줄달음 치고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진악산이 보인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중 금산의 진악산 수리너머재에 도착한다.

대한민국의 이번 봄은 한꺼번에 핀 꽃들로 유달리 시끄러웠지.


진달래, 개나리, 벚꽃, 개불알꽃,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봄맞이꽃, 제비꽃이 한꺼번에

피어 우습게도 꽃 멀미가 날 정도였지.

아름답던 봄꽃들이 사라진 진악산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초록으로 변해간다.


4월의 어느 날엔 영상 30도 가까운 더위가 휘몰아치더니 오늘 새벽은 3도까지 떨어져

옷장 깊숙하게 넣었던 방풍재킷을 꺼내게 한다.


진악산 수리너머재에 차를 대니 어미 개와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긴다.


남쪽으로 불과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진악산 수리너머재,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의 냄새도 숲의 빛깔도 도시와 사뭇 다르다.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수리너머재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오른 후 다시 내려오기로 한다.

지도상으로는 정상까지 2km이니 왕복 4km가 되겠다.


여린 연둣빛은 끝나가고 초록의 향연이 시작되는 산행 들머리의 계단이 한가롭다.

오늘 산행을 하며 산벚꽃의 꽃비를 맞을 수 있으려나,

괜한 기대겠지만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자연의 시계를 따라 시간은 흐르고 계곡의 물소리는 나를 서둘러 산에 오르라 한다.


수많은 사람의 추억을 껴안은 산,

온갖 동식물을 품은 진악산 산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새해가 된지 4개월이란 세월이 흐르더니 모질었던 추위가 가시고 제법 더운 봄날이 되었다.

자연의 색(色)중 어느 색이 가장 아름다울까.

무지개 속에 있는 보라, 남색,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인가?


나뭇가지에 연두색 잎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신록(新綠)이 시작된다고 표현한다.

모진 삭풍(朔風)을 이겨낸 첫 번째 잎은 유약하게 보이지만 봄에 가장 먼저 나온 잎이기에

연두색 신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연악하고 강인한 색이 아닌가.


신록 가득한 산길을 오른다.

산 꼭대기에서 내려온 바람은 봄이라며 말을 건네고,

계곡을 타고 올라온 바람도 숲을 헤치고 나에게 다가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말려준다.


마음도 맑아지는 계곡을 오르며 파란 색으로 변하는 숲을 바라본다.

파란 숲은 칙칙했던 겨울 숲과 냄새부터 다르다.

싱싱한 풀과 나무가 자라는 숲속을 걷는 나도 덩달아 싱싱해진다.



자연의 변화는 요즘이 가장 심하다.

변덕스런 날씨도 용케 감당을 하는 산은 매일 달라지는 풍경을 연출하고, 그 속을 홀가분하게

오르기 시작한다.



흰색과 노란색으로 피는 제비꽃은 병아리를 닮아 병아리꽃이라고도 하는데 산길에 핀

'미국제비꽃'이 나를 반긴다.

60여 가지 제비꽃 중 내가 아는 태백제비, 서울제비, 남산제비, 졸방제비, 콩제비, 노랑제비,

흰제비, 고깔제비, 단풍제비, 둥근털제비, 뫼제비, 호제비, 낚시제비꽃이 생각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짇날부터 피기 시작해 여름까지 계속 피는 제비꽃,

꽃이 필때면 어김없이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해서 오랑캐꽃이라고도 하는 제비꽃은

매우 영리하다.


대부분의 식물은 봄이건 여름이건 한 번만 펴 열매를 맺어 한철 에너지를 집중하여

종족번식을 한다.

이에 반하여 제비꽃은 봄철엔 꽃잎을 뒤로 활짝 펼치고 피어 곤충들을 불러들여

타가수정(他家受精)을 하고, 여름에는 오므려 피어 자가수정(自家受精)을 하는 생존전략을

택하는데 만약 자가수정도 실패했다면 뿌리를 씨앗처럼 활용해 자손을 주변에 퍼뜨려

새순이 뿌리에서 나오게 한다.


즉 종족 번식을 위해 타가수정, 자가수정, 뿌리의 3중장치를 가진 제비꽃은 씨앗 한쪽 끝에

개미가 좋아하는 단백질과 지방인 '엘라이오솜'을 묻혀 개미가 먼 곳까지 옮겨 퍼지게 한다.


밝은 초록의 신록이 눈을 편안하게 해주고 계단을 따라 고도를 올리니 험하지 않은 부드러운

산길이 이어진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다양하다.

동박새, 꾀꼬리, 종달새, 개개비, 곤줄박이 소리와 함께 까마귀가 허공을 크게 돌며 까악 거린다.


더 높은 하늘을 나는 제법 큰 몸집의 새는 독수리인지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저 새는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배달 할 수

있으려나.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인면조(人面鳥)가 등장하여 날개짓을 하며 춤을 추는 장면이

감동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령한 새를 숭배하는 신조(神鳥) 토템사상이 존재하였을까,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유목민이 조장(鳥葬)과 천장(天葬)을 치르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유목민은 새가 사람의 시체를 잘 뜯어 먹게 하거나 또는 작게 부숴서 새들이 먹기 좋게 한다.


같은 신조(神鳥)지만 까마귀는 독수리보다 훨씬 지능이 높아 삼족오(三足烏)로 신화의 새가

되었고, 이보다 지능이 약간 낮은 독수리는 영취(靈鷲)가 되었다.

 

백일승천(白日昇天)이라, 나도 까마귀와 같이 신선이 되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가니

나도 모르게 새를 숭배하는 사람이 된 모양이다.



숲에서 처음 만난 팥배나무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꽃의 향기는 나를 반기는 환영인사겠지.


나를 살린 산,

산에서 나무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숲을 지키는 나무는 산의 파수꾼이기도 하지만 이맘때 나무는 다채롭게 변한다.


산벚나무는 흰 꽃을 톡 터뜨려놓고는 며칠 벌과 사람을 유혹하더니 꽃잎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연두의 잎을 뾰족하게 내미는데, 온몸으로 모진 바람을 받아낸 팥배나무는 이제야 꽃을 피운다.


지금 오르는 산길이 묘하다.

길 위쪽으로는 소나무가 아래로는 참나무와 활엽수가 유난히 많다.

지절대는 계곡을 사이에 둔 것도 아닌데 순한 흙길에 키 큰 활엽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연두색과 연초록, 진한 녹색으로 병풍을 두른 산길에 나무가 주는 생명의 합창이 요란하다.


연분홍색 철쭉은 빛이 만드는 명암에 따라 모습이 바뀐다.


가을의 대명사는 추풍낙엽(秋風落葉)인데 바닥엔 떨어진 꽃잎이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니

봄엔 춘풍낙하(春風落花)가 제격인 모양이다.



벌어지지 않은 할미꽃의 솜털이 지나가는 바람에 미세하게 떨린다. 

바람이 할미꽃에게 무슨 소리를 하였을까.

잔뜩 오무리고 있는 꽃봉오리를 열라고 주문을 했겠지.


내가 떠나면 할미꽃은 외로워할까,

이 할미꽃송이에도 많은 사연이 있겠지.

어쩌면 꽃봉오리 열어지는 모습을 기다리지 못하고 산에 오르는 나를 미워할지도 모르겠다.


10;42

나뭇잎 사이로 봄 햇살이 스며든다.

자기 몸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황혼의 인생,

그래도 이런 산속이라면 무겁지 않다.


안내판에는 1,500년 전 백제시대의 효성이 지극한 강처사가 노모의 병 치료를 위하여

관음봉 관음골에서 기도하던 중 산신령의 현몽으로 인삼의 씨앗을 얻어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금산인삼의 발생지라고 써있다.


여기가 금산인삼의 개삼터(開蔘地)인 모양이다.


바람이 나무사이로 파고든다.

숲에서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가수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생각난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은퇴 후 마음속에 높은 벽이 세워지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이 엄습해 올 때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점점 작아지는 노구(老軀)로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를 때 이번이 끝이 아니겠지라며

마음에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


고추나무의 흰 꽃이 바위에 매달려 몸부림을 친다.




능선에 오르니 찬란한 풍경에 눈이 시원하고 숨통이 터진다. 


아 하늘이여!

대둔산과 천등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닦아주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벅찬 감동이

되어 가슴을 울린다.




수많은 민초(民草)들이 땀을 흘리며 걸어오른 산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때로는 내가 만든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뻐꾸기가 운다.

초록색으로 온 세상이 바뀌는데 자산홍(紫山紅, 영산자映山紫)의 붉은 꽃잎이 새로운

우주를 하나 연다.

박무(薄霧)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사이로 인간세상이 살짝 보인다.


푸른 생명들이 여기저기에서 우쭐우쭐 키를 재며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변해 가는데

유독 이 자산홍만은 봄의 한 때를 활활 태운다.


             <        꽃비


                흘레비람 타고 온 도둑비가

                심술부려

                온 땅에 꽃비가 내렸구나.


                떨어진 꽃잎 밟을세라

                발걸음 조심하는 초로(初老)

                하늘 쳐다본다.


                춤추는 꽃잎을 십일이나 볼까 했더니

                과한 욕심인가.

                산속을 뒤흔드는 강쇠바람에

                꽃 아기 놓칠세라 꽃나무 마구 떠는구나.


                싸리비 비질하지 못한 산길에

                나의 발길에 밟히던 꽃잎들이

                바람 따라 사라지려 몸을 사린다.


               계절의 갈피에서 벗어나고파

               속절없이 사라지는 꽃잎을 감추려

               무애(霧靄)가 스며드는구나.                          석천   >



바람이 머무는 산자락에서 짝짓기철을 맞은 온갖 산새가 암컷을 유혹하고 그 위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하늘은 푸르고 세상은 점점 파래진다.

푸른 거와 파란 거는 어떻게 다른지 암봉의 하늘과 소나무는 그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린 연두 잎이 초록을 향해 점점 더 짙어지며 솔의 향기도 비례하여 진해진다.


11;11

한 시간 가까이 꼬박 올라 도착한 작은 봉우리엔 신선(神仙)과 가까운 친구인 소나무가

솔 향을 뿜으며 우리를 환영한다.




따라오며 계속 울어대던 동박새가 사라지자 산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지나는 바람의 여운이 사라지면서 고요는 속세와 강제로 이별을 시킨다.


편한 것을 추구하지 않은 삶이 된지 오래지만 몇 시간만이라도 속세와 이별을 하며 

지금 내가 제대로 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지 생각을 한다.


몇 번의 된비알을 치고 올랐어도 기진맥진하지 않았으니 체력이 조금 나아진 모영이다.

주릉에 펼쳐지는 기암괴봉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낭떠러지는

소름이 오싹할 정도로 장엄한 풍경을 만들었다.


암릉에 오르니 시야가 막힘이 없다.

충남에서 가장 높은 서대산(904m)이 우뚝 솟았고 평지는 온통 인삼밭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趙憲)과 영규(靈圭)가 이끄는 700명의 의병이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해 시체를 모아 만든 700의총(七百義塚)이 있고,

고경명, 고인후 등 의병장의 위패가 봉안된 충절의 도시 금산읍을 내려다본다.


여름에도 서늘한 고원성 기후라 인삼의 생육에 적합하기에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삼의

산지로, 5일마다 열리는 인삼장(人蔘場)은 강화나 포천의 인삼장과는 규모가 커 견줄 수

없으며 전국 인삼의 80% 정도가 금산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목이 마르다.

잠시 주저앉고 싶을 때 정상의 모습이 서슴없이 나타난다.


사방으로 포개진 능선이 일렁거린다.

여긴 섬일까 산으로 둘러싸인 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계절과 세월이

내려앉았다.


지난여름에 올랐던 천등산이 하늘 금 끝자리에 아슬아슬하게 한자리를 차지한 풍경을 보며

숨이 막힐 듯 하다가 다시 숨이 터진다.


이곳은 속세(俗世)의 경계선을 벗어난 선계(仙界)이다.

오름의 고단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선경(仙景)속에 들어서니 나의 순수한 감정이 살아난다.


잠시 머무르는 이곳에서 선경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지금의 내 감정을 쓰고 싶지만

머리 속으로 벅차오르는 감동을 기억만 해야겠지.


자연이 만든 완벽한 세상에서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


이근원통(耳根圓通)이 되었는지 땅의 소리도 들리고 저 아래 아득한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소리도 올라온다.



땀 흘리며 힘들여 오르면 산은 귀한 선물을 준다.


이 꽃은 '각시붓꽃'이라 참 예쁜 이름이다.

우리나라 야생화와 야생초는 조상의 해학도 담겨있지만 일본인들이 등록한 이름 포함하여

듣기도 부르기도 민망한 이름이 많다.


개불알꽃, 소경불알, 며느리밑씻개, 중대가리풀, 미치광이풀, 선개불알꽃, 쥐오줌풀 등이

민망한 이름인데, 다행히도 개불알꽃은 봄까치꽃, 복수초는 얼음새꽃, 중대가리풀은

애기구슬꽃, 소경불알꽃은 너도더덕꽃 등으로 개명하자는 신선한 의견이 많이 나온다,


지금 쓰는 식물 이름 대부분은 1930년대 일본 강점기 시대 학자들이 전국 팔도를 다니며

식물명을 채집해 가장 적합한 이름을 고른 것이라는데,

식물 이름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고 조상과 학자들의 정서가 담겨 있기에 이름이 밉다고

예쁜 이름으로 고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반대론도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조만간 개명이

되리라 생각을 한다.


천등산(807m), 만인산(537m), 서대산(904m), 천태산(714m), 월영산(529m)이 진악산을

에워싸고, 대둔산(878m), 인대산(666m), 오대산(569m), 금성산(438m)이 지척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천등산, 칠갑산, 대둔산, 계룡산을 올랐으니 많이도 올랐구나.


11;52

충남의 산 중에 세 번째로 높은 진악산(進樂山 732m)에 올랐다.

금산 사람의 가슴속에 금산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자리 잡은 진악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계룡산(845m), 저 앞에 바위로 병풍을 두른 대둔산(878m), 콩밭 매는 노래로 유명한

칠갑산(561m), 충남에서 가장 높다는 서대산(904m)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산 반열에 올랐다.


우리나라 최초 인삼재배지인 개삼터를 품은 산,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은 다 인삼밭인 금산의 서남쪽 산에 오른 거다.

정상석에는 732.3m로 되었으나 지도에는 737m로 표기되었으니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군립, 도립,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에선 금주(禁酒)가 시행되었다.

여긴 지정되지 않아 약간의 음주는 가능하지만 그래도 안전산행을 해야겠지.


정상주 한잔을 하며 산의 이름을 음미 한다.

진악산(進樂山)의 악자는 큰 산 악(岳)자가 아니고 풍류 악(樂)자를 쓴다.


'깊고 큰 풍류가 있는 산'이란 뜻을 가진 진악산 정상에서 복숭아꽃 향기를 맡으며

진가를 맛보니 여기야말로 진정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산새가 우짖는 정상에서 한잔 술로 배고픔과 시름이 사라졌으니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Utopia)에서 망중한을 즐긴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로 보이는 저수지를 줌으로 당긴다.




12;28

              <              세월의 갈림길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건만

                   수없이 나타나는 갈림길은 인생의 갈림길이라,

                   덧없는 세상

                   갈림길에 무애(霧靄) 사라지고 복숭아꽃 피었구나.

                  

                   부귀 명예 사라진 후 산 정상에 서니

                   말없이 한가롭다.


                   산봉우리 에두른 갈림길에 서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니

                   애써 생각을 지우지 않아도 되겠다.


                   한가로움이 더하며

                   연둣빛 물들어가는 세상을 한눈에 가득 담고

                   잡념 사라지니 피안(彼岸)의 세상 간 곳 없어라. 


                   우주는 절차를 밟아 절기의 순서를 새롭게 하는데,

                   내 흰머리 순서는 하늘에서 정하는 모양이라,

                   산꼭대기 핀 도화(桃花)에게 황혼 설움 들킬까봐

                   갈림길 벗어나려 발걸음 재촉하누나.                               석천   >





멀리 대둔산이 하늘 금을 그리고 그 앞에 선다.


이틀간 봄비가 한바탕 쏟아졌지.

진달래, 철쭉마저 사라진 자리에 각시붓꽃 한 송이가 외롭게 피었다.


오름길에서는 소담하게 핀 각시붓꽃을 만났는데 지금은 한 송이가 외롭게 산자락을 지킨다.

꽃은 피었다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데, 나는 각시붓꽃에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라고 주문하는 욕심쟁이가 되었다.



동두천 마고산 기차바위가 이랬던가,

호명산 기차바위와 비슷한 바위를 잡고 하산을 하며 아래 낭떠러지를 보지 않으려 애쓴다.




무덤가에 핀 '조개나물'이 바람에 출렁이기에 잠시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그냥 자연에 취한 하루,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조개나물의 신비한 보라색은 나를 취하게 하는구나.


산행은 끝나가는데 나 자신에 이르는 길은 멀고 먼 길이구나.


오늘 하루를 그냥 무덤덤하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기에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며

두 눈과 마음에 새겨진 풍경을 기억하려 애쓴다.


밤나무는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애기똥풀에게 우산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잿빛인데 유독 이 나무는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제일 늦게 잎이 피는 느티나무라면 이해가 될 텐데 이 밤나무는 그렇지 않으니

애기똥풀의 화사한 노란색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름다운 모습에 시(詩) 한 편이 떠오르니 내 삶도 덩달아 아름다워진다.


             <        흔들리며 피는 꽃


               새파람 하늬바람에 흔들려 잠이 깼지.

               세상은 흰색 보라색 붉은 색으로

               향연을 펼치더니 초록으로 변해가는구나.


               눈을 비비며 배시시 뜨니

               눈부신 세상이 나를 환영한다.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데

               줄기가 흔들리며

               애기똥풀의 노란 꽃봉오리 열라고 안달을 떤다.              석천   >


13;35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 오니 아침에 만났던 진돗개가 아는 체를 한다.

나랑 같이 산행을 했던 복주산 진순이와 칠보산 검둥이 뭉치는 지금도 살아있을까.


올해는 개의 해, 무술년(戊戌年)이다.

무술년을 파자(破字)하면 다섯째 천간 무(戊)자에 비해 개 술(戌)자에는 목줄 하나가 더 있다. 


인간과 분류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는 늑대에서 갈라져 나온 동물이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일부 늑대가 지금의 개로 진화하였다고 과학계에서 결론을 냈지만 그 결론과

관계없이 나는 개를 참 좋아한다.


빵을 주자 꼬리를 뒤로 감추고 맛있게 먹는다.

잠시후 꼬리를 흔들다가 위로 향해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우리와 소통을 한다.


80년 전통의 양조장에 놓인 90년 된 항아리 앞에 서서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인삼 점포가 1,200개나 된다는 금산시내를 누빈다.


19;00

저녁이 되니 해가 떨어지고 보랏빛 노을이 산꼭대기에서 번져온다. 

서산에 남았던 붉은 낙조가 사라지며 전투기의 비행운이 하늘을 가른다.


죽음과 같은 낙조(落照)앞에 삶은 유한하기에 나의 존재와 가치를 생각한다.

주변에 시한부 삶을 사는 지인(知人)이 여럿이다.

'키스 먼저 할까요'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감우성이 시한부 삶을 살고,

'라이브'에선 경찰 지구대장인 배우 성동일이 대장암 선고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한 때 뇌종양 선고(宣告)를 받고 휘청거릴 때가 있었으니까.

이 시간에도 죽음과 사투를 하면서 고생하는 지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인간에겐 재산과 권력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끊임없이 찾아든다.

다 버리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게 무엇일까.


자기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애기애타(愛己愛他)라는 글이 생각난다.

우선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해야겠지.


먹이가 필요해 찾아온 고양이 손님에게 먹태포를 주고 숙소의 등불을 끈다.

조용히 눈을 감으니 마음이 고요해진다.


요즘 들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니 마음이 감정을 따라다녔나 보다.

잠을 자면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수많은 생각을 하며 뒤척였지.

욕심과 성냄, 고집부리는 생각의 불을 끄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2018.  4.  25.  진악산 산행을 마치고

                                                      금산 남이휴양림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