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9. 19;00
비 소식이 없었는데 별안간 쏟아지는 목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배낭을 꾸리던 손을 멈추게 한다.
낙종물이 거세게 떨어지니 논에 심은 모가 신나겠다.
< 목비
겨우내 메말랐던 논에
낙종물이 고여 모판이 배부르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목비에
모를 낸 농부마음 배부르겠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여름을 재촉하고,
떠나지 않은 솔부엉이 소리치기에
하릴없는 백수는 보따리 싸다 말고
창가에 서성대다 우산을 꺼낸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정해진 곳 없으니
발길 따라 가는 게 백수의 인생이라,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숨겼던 나만의 비밀,
생각날 때마다 살며시
꺼내보던 추억을 반추하며
비오는 거리나 걸어야겠다. 석천 >
5. 30. 07;00
미지(未知)의 산이 기다리는 여행은 많이 설레는 일이다.
지도를 펼치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떠난 길,
텅 비었던 들판이 차기 시작하고 일정한 리듬으로 차는 흔들린다.
초록으로 변하는 산과 들을 보며 바쁜 것도 아닌데 조금 느리게 달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뒤편으로 사라진다.
주춤했던 비가 또 내려 와이퍼가 무심히 작동을 하고,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오늘도 내리니 우장(雨裝)도 없는데 난감하다.
10;43
망경대산 휴양림 직원의 공무원 말투에 질려 휴양림 코스는 아예 포기를 하고,
화원리 코스와 모운동 코스를 두고 고민하다 모운동에서 오르기로 한다.
만경사(萬頃寺)와 망경산사(望景山寺)를 혼동한 우매(愚昧)함으로 길 찾아 헤메다
마을주민에게 물어 만경사 길을 택한다.
만경사 입구에 핀 자주보랏빛 '매발톱꽃'이 제일 먼저 나를 반기고, 군데군데 흰 눈이
내리듯 '가는잎구절초'가 피었다.
책에서는 8~9월에 핀다는 구절초(仙母草)가 지금 피었다.
이곳이 해발 700m 가 넘어 어지간히 춥기도 하겠지만, 매발톱도 6월에 핀다고 했는데
일부는 벌써 시들기 시작했으니 두 꽃이 다 성질이 급한 모양이다.
제비꽃, 봄맞이꽃도 여름을 기다리지 않고 일제히 사라졌다.
아직 하고현상(夏枯現象)이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기온이 섭씨 25도 이상의 고온이 며칠 지속되지 않고 단발적(單發的)으로만 올랐는데,
민감한 봄꽃들은 생육이 정지되어 땅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백합과의 '무스카리'가
우아한 보랏빛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봄꽃으론 흰색, 빨간색, 주황색, 분홍색이 대부분인데 모처럼 신비한 보라색을 대하는
묘미도 솔솔하다.
< 하고현상(夏枯現象)
제비꽃 봄바람에
소리 없이 사라진 자리
고들빼기 노란 꽃이 주인 되었구나.
하고현상(夏枯現象)이란
거창한 이름에 사라진
제비꽃 다시 나타날까,
민들레 갓털 우글거리는 숲에서
두리번거리는 초로(初老)의 모습
봄바람이 다독인다.
하늘가엔 산딸나무 흰 꽃 가득하고
아카시 향 물씬 보내는
숲속 위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은
여름을 재촉하는구나.
빨리 순서를 잡으려는 여름에 쫓겨
덧없이 사라지는 세월
막을 길 없어라. 석천 >
산에 오르기 위해 배낭을 정리하며 지금 나에게 중요한 존재는 무엇일까,
사람과 사랑, 또는 일인가를 생각해본다.
이 나이에도 그런 것을 따질 수 있으니 아직은 살 가치가 있는가 보다.
세상을 살며 새로운 것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새로운 산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낯설고 어려워도 새로운 산을 가기위해 지도를 펼치고, 산에서 안내판을 보면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이게 바로 산다는 재미가 아닌가.
쭉 뻗은 산길은 이곳을 찾느라 애쓴 우리에게 즉시 보상을 해준다.
뻐꾸기, 종달새의 노래 소리에 묻어 나오는 싱그러운 숲의 냄새가 바로 보상품이구나.
수많은 광부들의 노고와 애환이 서린 길,
1987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폐광된 옥동광업소로 오르는 길은
침잠(沈潛)에 빠졌다.
망경대산을 오르기 위해 3년을 별렀다.
막상 계획을 잡으면 산불방지 입산금지에 걸려 다른 산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이번엔
제대로 왔으니 망경대산은 나에 무엇을 보여 주려나 은근히 기대가 된다.
안내판 아래 쑥밭의 '두메부추' 갓털이 금세라도 하늘을 유영(遊泳)할 차비를 갖췄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려나,
나도 날개가 돋는 신선이 되어 이 갓털 따라 하늘에 올랐으면 좋겠다.
생애를 마치며 자손을 퍼뜨리려는 갓털의 자태에 반해 번잡한 세상일을 잊으며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워지기에 내가 바로 우화등선이 되는 모양이다.
요즘 가슴이 답답하다.
번뇌로 가득 찬 마음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도 마음에 남은 티끌을 버릴 수가 없으니
망경사 길은 나를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자비란 용서와 배려인가라는 화두(話頭)를 허공에 던지며,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얻고자
산길을 걷는다.
낙엽송과 적송 사이로 뻗은 길은 환상적이고 혼자 걷기 좋은 길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바뀐 숲에 풍덩 뛰어들었더니 길바닥은 온통 질경이와 인진쑥,
그리고 야관문이 빼곡하게 자란다.
< 백수의 아침
파란하늘 샛바람이
살랑 살랑 걸어라며 유혹하는 아침,
길가의 간판도
스쳐 지나는 여인의 얼굴도
화사한 여인의 봄옷도 아름다운 아침.
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도
전파상에서 튀어나오는 음악도 싱그러우니
침잠(沈潛)에 들지 않은
백수의 봄날 아침은 평화롭구나. 2018. 5. 20 석천 >
영월에서도 오지로 손꼽히는 망경대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생소한 망경대산.
광부들이 오직 생존을 위해서 오르내리고 걸었던 길,
그 애절했던 삶의 현장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석탄을 채굴하는 광부들은 3교대제로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채굴했다.
한 번에 10명~20명, 많을 땐 70명까지 들어가 채탄을 했다는데, 갱도는 지하 수십~수백m 를
내려가서 다시 2~3갈래로 나누어 진입했다하니 개미굴이 연상된다.
지금도 인생이 막다른 길에 막히면 막장인생이라며 광부의 삶을 비하하는 표현을 하는데,
그 막장으로 가는 길에 서있는 이정표가 외롭다.
함박꽃에 카메라 렌즈를 대고 하나 둘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언제 꽃봉오리가 벌어질지 열을 세어도 기척이 없다.
이따 이 길로 내려올지 몰라 위치를 머릿속에 저장을 한다.
11;07
고즈넉한 산길을 걷던 평화는 깨지고 이제부터는 거친 산길이 시작된다.
길이 꽤 가파르다.
걸음 하나마다, 흐르는 땀 한 방울마다 나의 번뇌(煩惱)가 섞여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언제 이렇게 홀가분한 산행을 하였을까.
여느 산마다 오를 때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쓸까 궁리를 하며 머릿속에 암기를 하려 애썼지만
오늘만은 그냥 편하게 오르며 나무와 야생화와 대화를 하련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황반변성이라는 병 탓도 있지만 이젠 30분 이상 컴퓨터 화면을 보기 힘들고,
책도 5장 이상을 넘기면 눈이 금세 빡빡해지며 피곤을 느껴 슬그머니 내려논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말을 잘 안 들어 뺀질거린다는 말도 들었고, 최근에는 가는귀를
먹었는지 되묻는 경우도 자주 생긴다.
다행히 기억력은 퇴보하지 않았다고 생각 하던 중 '거꾸로 보는 자연'이란 책을
열심히 읽는데 책 중간에서 갈피지가 튀어 나온다.
예전에 거의 반이나 읽었는데 처음 읽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이다.
눈이 안 좋으면 안경을 쓰면 되고 귀가 안 들리면 보청기를 끼면 되는데, 기억력도
퇴보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난다.
며칠 전 농협은행에 들려 인터넷 뱅킹을 신청하며 이름과 주소를 쓰는데,
불편한 손으로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악필(愕筆)이 되어 젊은 직원보기가 민망하다.
이 나이라면 시(詩), 서(書), 화(畵)를 보편적 교양으로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마비되었던 오른손으로 글을 쓰려니 참으로 남감하다.
수십 년 전 받았던 21사단 '제일의 헤드(head)'라는 별명도 이젠 반납을 해야겠다.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자연의 소리, 나의 숨소리에 이어 나무의 숨소리를 듣는다.
시력은 안 좋아도 다행히 청력이 좋으니 들리는 소리를 수행의 도구로 삼아야겠다.
산골짜기로 들어서니 바람이 고요하다.
숲의 빈자리에 종달새소리 하나 들어와 살포시 앉는다.
이제부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고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야겠지.
이정표가 없어 잠시 길을 잃었다.
족적이 뚜렷하다가 사라져 잠시 방향을 잡지 못했다.
어쩌면 길을 잃기 위해 여기까지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슬며시 스며든 산안개는 세상의 모든 길을 지웠다가 새로운 길을 낸다.
취나물이 지천이더니 국화과의 우산나물은 비탈을 점령하였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또는 술을 담가 마시기도 하는데
주로 신경계, 운동계의 통증을 다스리는 약초로 알려졌다.
느린 걸음으로 오르면서 늦게 찾아온 봄에 태어난 꽃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마음이 끌릴 때는 걸음을 늦추고 때론 멈추며 포커스를 맞춘다.
초록 잎이 하늘을 가득 메운 가지에 허공(虛空)이 사라졌다.
허공이 참 좋았는데 허공은 나뭇잎이 다 메우고 소리는 새가 메웠다.
11;58
가파른 골짜기를 50여 분 오르다 만난 '은난초'는 내 무릎을 꿇게 한다.
야생화의 보물창고라는 금대봉에서 만난 은난초에도 뒤지지 않는 청초한 꽃잎은
끝내 내 무릎을 꿇린다.
꽃대가 잎보다 위로 올라가면 '은난초'요, 잎의 길이가 꽃대보다 길면 '은대난초'로
구분하고, 줄기나 잎이 껄끄러우면 은대난초요, 이 꽃과 같이 줄기나 잎이 매끄러우면
은난초라, 해발 900m가 넘는 고지에서 만난 은난초는 그런 것을 구분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순결한 은난초에 경배를 하며 잠시 세상사를 잊었으니 은난초는 나에게 적멸(寂滅)의
경지에 오르게 해준 거다.
낙엽 쌓인 비탈길을 겨우 지나 고갯마루에 올랐다.
더위에 육신은 점차 지쳐가고, 힘들 땐 쉬어가는 게 나의 산행 버릇이라 잠시 쉰다.
잠시 쉬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웅크리고 닫혔던 마음이 열린다.
이래서 인생은 쉼이 필요한 모양이다.
내가 올라온 까마득한 저 길이 박무(薄霧)속으로 사라진다.
참나무에 기대서서 이정표를 바라본다.
문득 내가 기대고 있는 참나무와 같이 맑은 수액(樹液)이 흐른다는 느낌이 드니 산속에
묵묵히 서있는 참나무와 같이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구나.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땅을 보며 오르다 은난초를 또 만난다.
산마루에서 텅 빈 하늘을 바라봐도, 땅에 핀 은난초를 바라봐도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해지니
이 시간 이 장소에 피어있는 은난초에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오염된 세상에서 올라온 나에게 은난초가 말을 건다.
금빛으로 내리던 햇살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초록 잎에 닿은 안개도 초록이 된다.
내 심장도 지금쯤 초록으로 물들었겠지.
12;13
1033m봉에 두둥실 올랐다.
구름이 나를 데려다 줬을까, 아니 바람이 내 등을 떠밀어 올려줬나 보다.
바람은 풍경의 호사를 실컷 누리라며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한다.
봉우리의 돌무더기(cairn)가 외롭다.
케언은 특정 루트를 나타내는 이정표도 되지만 누군가의 무덤 위치 표시도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령탑이 될 수도 있다.
암튼 인적이 끊긴 산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만난다는 건 매우 반가운 일이다.
1033봉을 지나자 산길이 없어졌다.
잡목으로 가득 찬 등성이를 헤쳐 나가며 갈등을 느낀다.
여기에서 되돌아 나가 하산을 할까,
아님 험난한 길을 악착같이 뚫으며 정상에 오를까,
뚜렷하지 않은 산길을 막아선 나무들을 헤치며 느끼던 두려움은 몇 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묘한 쾌감을 주며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욕구를 더욱 거세게 만든다.
1050봉에서 노랑칼퀴꽃을 보며 숨이 가빠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다
'민백미꽃'을 만난다.
화야산에서 만났던 민백미꽃을 여기에서도 만나다니 우선 반가운 생각이 든다.
온몸을 찔려가며 능선을 타다가 겨우 길다운 길을 만난다.
정상까지 600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이상하다.
아까도 500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었는데 내가 잘못 본 걸까.
갑자기 내 머릿속에 혼돈이 온다.
며칠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막걸리 네 병을 마시고 3천 원×4병을 8천 원이라는 생각으로
돈을 냈다가 어이가 없는 실소(失笑)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길을 건너 다시 숲으로 간다.
야생화들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나를 반긴다.
야생화가 와글거리는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쭉쭉 뻗은 낙엽송과 전나무 아래 작은 공간으로 들어서니 숲은 서늘한 품으로 나를
맞이한다.
풀과 꽃들이 향기를 흘려보내고 나무들은 일제히 피톤치드를 발산한다.
다시 숲 사이로 흐르는 길을 걷는다.
야생화의 향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산길은 내 발을 포근하게 감싸주기에 숲길을 걷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다.
제 것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주는 산은 민낯을 당당히 들어내기에
나도 가장 자연스런 나를 들어내고 싶다.
거친 고요(孤寥)의 길에 음악이 들린다.
여기에서 음악이란 자연이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다.
이틀 후면 6월이니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부지런한 여름이 밀고 들어온다.
12;34
고도계를 확인하니 해발 1000m가 넘었다.
잠시 후면 내가 걸어서 오른 망경대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파란하늘가에 유영(遊泳)을 하는 흰 구름이 북쪽으로 흘러가니 남풍이 부는구나.
숲을 벗어나는 순간 가슴 저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안개 속에 숨었던 정상이 실루엣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야생화는 산길 곳곳에 숨어서 피어있고 보기 힘든 꽃들은 나무 그늘 속에 몸을 감췄다.
숱한 광부들의 애환이 서린 산,
정상의 모습은 말없이 의연하고 포근함을 느낀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산세는 후덕해 보이고, 대부분의 산 정상은 기암괴석이나 암릉이
위압감을 주는데 전형적인 육산의 망경대산은 세 시간을 걸어 오른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
저곳에 오르면 막힘없는 사방조망이 되려나,
안내서에는 가리왕산, 태백산, 선달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물결치며
장쾌한 파노라마를 펼친다는데, 박무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좀쥐오줌풀, 쥐오줌풀, 동골나무, 미나리냉이, 넓은잎쥐오줌풀, 벌깨덩굴, 풀솜대, 둥굴레,
광대수염, 쥐손이풀, 졸방제비 등 카메라로 다 담기가 어려워 눈으로만 담는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에 핀 꽃이라서 더 아름다운 걸까.
하나같이 예쁜 꽃들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각기 개성이 다른데 다시 만난 '은난초'는
꽃대보다 잎의 키가 더 크니 '은대난초'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벌과 나비들이 주둥이에 꽃가루를 묻히고 '민백미꽃' 사이를 유영한다.
애당초부터 숲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이 미물(微物)들의 것이라 조금이라도 곤충이
다칠세라 조심조심 걷는다.
은대난초와 민백미꽃을 찍느라 나는 잠시 지체를 하고 일행은 앞서 정상을 향해 오른다.
산 정상에 저 텅 빈 하늘과 같이 잔잔한 여백(餘白)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사람에게도 여백이 없으면 삶의 탄력을 잃고 시들어졌을 텐데 말이다.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숲의 소리는 일상에 때 묻고 속진(俗塵)에 찌든 나의 육신을 씻어주며 나 자신을
회복시켜준다.
꽃이 피어나고 새잎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신록의 숲은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입 다물고 마음으로만 보라고 한다.
고사목(枯死木)이 쓰러지지 않고 숲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문득 2010년 1월 27일 올랐던 평창 백덕산 정상아래 N자 형태의 나무를 생각나게 만든다.
몇 년을 살다 갔을까.
고사목 아래에는 자손격인 나무가 자라니 소멸(消滅)과 탄생(誕生)이 각각이 아니구나.
불교에선 생사일여(生死一如), 생사불이(生死不異)라 했다.
불교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에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같다'라며
모든 존재의 무상(無常)함을 직시하고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 현재의 순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거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맥락을 같이하니
생겨나지도 않고 죽어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오묘한 말로
자연과 사람의 진리를 말한다.
뉴질랜드에서 친구의 문자가 온다.
고사리가 풀(草)인지 아님 나무(木)인가를 묻는 내용인데, 뉴질랜드에서는 고사리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사리는 풀(一年草)이요 나물이며, 공작고사리나 관중(貫衆) 또한
양치식물인 여러해살이풀로 분류한다.
관중은 전 세계에 약 150종이 자라고 우리나라에도 20여 종이 자라는데 관중의 원산지는
우리나라이다.
마음이 치유되면 정신이 맑아진다.
햇살이 스며든 산은 아름다운 산이기에, 아름다운 산에 숨은 '쥐오줌풀'도 아름답다.
숲속에 숨은 야생화는 오래보고 자세히 봐야 예쁘다.
초록물이 묻어나는 산에서 붉은 색이 감도는 쥐오줌풀은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고
바로 옆에 핀 둥굴레의 흰 꽃과 대비가 된다.
둥굴레에 흰 종(鐘)이 스무 개 넘게 매달렸다.
마파람이 불며 종소리가 맥놀이 치는 환청(幻聽)을 듣는다.
나는 대한민국의 교회, 성당, 절에는 하나님과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곳에는 돈, 세습과 권력이 판치고, 신(神)이 아닌 목사나 신부, 승려에 대한 믿음만
있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다.
둥굴레 꽃을 찍으며 문득 신(神)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느낌이 저절로 드니 산은
큰 덕(德)이라, 산에서 자라는 야생화가 나의 본성(本性)을 회복시켜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구나.
바스락 대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큰꽃으아리'를 만난다.
벌 한 마리가 나의 인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꿀을 빤다.
이곳을 오르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 나오겠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맑은 바람에 펄럭거리는 마음 자락을 걸어놓으면 축축하게 젖어
지냈던 날들이 마르겠지.
5.11일 술자리에서 친구가 진심(眞心)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진심을 모르겠다고 한다.
물론 나의 진심을 묻는 건지, 친구 자신의 진심을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나의 진심을
모르기에 5.16일 느림의 미학 354편에서 진심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나의 진심은 무엇인가,
나의 진심에도 거짓의 그림자가 일렁이는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엉터리 자작 시(詩)를 나중에 보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나의 마음에 담긴 진심이었으니까
고치기가 싫다.
나중에 내가 쓴 엉터리 시를 읽으며 진심은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바람이 그치면 숲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진다.
따라서 시간은 진심을 거짓으로 몰아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기를 쓰고 몇자라도 쓰는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 시간
시간이 많이 남았었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사랑도 하려고 했지.
때가 되면 사랑도 하고
때가 되면 에베레스트도 오르고
때가 되면 책도 낼 줄 알았지.
바보처럼
남은 시간 몰라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시간은 훌쩍 넘어 황혼이 되었다네.
처진 볼떼기
늘어진 배때기가 거울에 비치던 어느 날
남은 시간 많은 줄 알았는데
내 시간만은 비켜갈 줄 알았는데
남은 시간 아쉬움에
소름이 끼치더이다.
화살과 같이 사라진 시간,
유수와 같이 흘러간 시간이
거울 속 내 얼굴에 고스란히 쌓인 날.
못 다한 사랑이 있거들랑
서두르라며
째깍째깍 초침 분침 시침은
허공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시간 쌓인 때를 벗기려
흰 수염 밀어내고
흘러간 시간을 반추한다. 석천 >
13;00
가슴이 터질듯 숨이 차오르는 순간 풍경이 꽉 찬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오름은 정복이 아니다.
땀 흘려 정상에 오르는 순간은 마음속에 충만(充滿)을 느끼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에
적멸(寂滅)의 경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세속의 욕심과 모든 번뇌를 순식간에 태워버린 경지는 바로 충만(充滿)이기 때문이다.
망경대산(望景臺山)이라, 직역을 하면 사방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큰산이다.
백두대간상의 함백산에서 가지를 친 능선에 우뚝 선 망경대산은 함백산~백운산(1,426m)~
두위봉(1,466m)~질운산(1,172m)~예미산(989m)~수라리재(590m)를 거쳐 솟구쳤다.
나는 산의 이름을 생각할 때 선조들의 혜안(慧眼)을 생각한다.
수백 년 전 미래를 내다보고 예언 하듯이 작명을 한 지명과 산명이 전국에 수두룩하다.
여기 망경대산도 그저 아무렇게나 함부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당한다.
조선 태종 때 한성부윤까지 올랐다가 낙향한 추익환은 단종의 소식을 듣고
수시로 이 산에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회한(懷恨)의 눈물을 흘렸다는데서 유래된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추익환은 정성껏 준비한 머루와 다래를 싸들고 단종이 머물던 영월 관풍헌(觀風軒)에
찾아가 단종을 위로해 주기도 했으며,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자 영월로 향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곤룡포와 익선관을
쓴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어 가는 길이오."라는 말을 듣는다.
이후부터 태백산에서는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고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온다.
누가 노래했더라,
♬달빛 부서지는 강둑에~~어느새 내마음 민들레 홀씨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가수는 민들레 갓털을 홀씨라며 노래를 부른다.
홀씨는 이끼류나 곰팡이처럼 포자가 퍼져 번식하는 것을 말 하는데, 민들레 홀씨는 포자가
아닌 갓털이라 씨앗이 멀리 날아갈 때 수분공급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입으로 훅 불면 어디로 갈까,
가까이 다가가 내 마음 담아서 민들레 갓털을 허공으로 날린다.
정상엔 짧은 생애를 마친 할미꽃 잔해(殘骸)도 널 부러졌다.
안개로 꽉 찬 하늘이 우울하다.
망경대산에서 그동안 각지고 힘들었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어진다.
무거운 등산화도, 어깨를 짓눌렀던 배낭도, 옷들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서서 울고 싶다.
두 명의 전직 왕(王)이 감옥에 있으니 나도 단종을 기리는 추익환이 되어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싶다.
그냥 울고 싶으니 덧없이 흘러간 허망한 세월에 눈물이 나는 걸까.
산에 얽힌 추익환의 얘기들이 마음속 한편에 우울함을 심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현자(賢者)는 행복을 쫓지 말고 괴로움이 없으면 행복이라고 한다. 괴로운 일이 없으면 행복이라는데, 괴로운 일이 없어도 아무 일 없이 무미건조한 삶이 이어지는 그 자체도 행복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 초록바다 산은 바다다. 산은 초록 바다다. 능선은 출렁이는 파도고 저 산봉우리는 산이라는 바다에 풍덩 빠진 섬(島)이다. 바다를 보는 내눈에 초록물이 배더니 눈가로 흐르는 눈물에도 초록물이 배었구나. 석천 >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풍경은 올랐어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만을 바라보며 올랐던 산, 가리왕산, 예미산, 두리봉, 매봉산, 선달산, 소백산, 태화산이 보인다는데 나무와 산안개에 숨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렁거리는 능선을 바라보며 정상주 한잔을 마셔야 신선이 될 텐데 조금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