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68 산 자가 만든 죽은 자의 공간 <동구릉 東九陵>

김흥만 2018. 8. 15. 20:21


2018.  8.  11. 10;00

강동역에 아주 작은 공원이 생겼다.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코 바라본다.


팬티 정도 겨우 가리고 희멀건 허벅지를 흔드는 여인,

휴대폰을 보며 걷는 스몸비 여인,

애들이 공공질서를 어겨도 사랑스럽게만 보는 맘충여인,


조금 전 담벼락에서 만난 '계요등'같이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단순호치(丹脣皓齒) 여인,


손톱발톱에 온갖 그림을 그린 여인,

천태만상의 여인 중에 허벅지에 슬쩍 문신을 한 여인에게 유독 눈길이 간다.

언제인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예전 살짝 스쳐간 여인도 문신의 흔적을 보였는데,

첫사랑의 여운으로 착각을 한다.


하늘엔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가을을 재촉하는 산들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아침,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11;20

푹푹 찌는 무더위가 계속된다.

그래도 입추(入秋)가 지났다고 나무그늘에선 시원한 바람기를 느낀다.


성을 중심으로 서쪽엔 서오릉(西五陵)이 있고, 가까운 곳에 있어 늘 궁금하면서도 찾지

못했던 동구릉(東九陵)에는 조선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총 9기의 왕릉이 있다. 


묘(墓)는 신분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통상 능(陵)은 제왕(帝王)과 왕후,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

무덤을 말하며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은 묘(墓)라 불리는데,


조선 임금의 묘는 대부분 능이라 부르고, 왕에서 군(君)으로 격하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만 일반인과 같이 묘로 불린다.


조선 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당대의 내 노라 하는 풍수사를 동원하여 길지를 잡으려

노력했고,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고르면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최종 선택했다.


왕은 당대의 시대적인 여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선정하고,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시설만을 설치하였다.


현재 서울 근교에는 왕릉 40기, 원은 13기가 보존되고 있는데 40기 중 한꺼번에 9기나

볼 수 있는 동구릉에 들어선다.


왕의 무덤 길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끝나기도 하는 곳에서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잠자리가 낮게 떠 달려든다.

어쩌면 무더위에 지친 육신을 쉬면서 가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신과 함께 2'영화를 보았다.

1편에선 사람들이 죽으면 삼도천을 건너야 하고 사출산(死出山)을 지나야 한다.

2편에선 천륜지옥, 삼도천, 나태지옥, 거짓지옥, 배신지옥, 불의지옥, 폭력지옥, 살인지옥

등이 리얼(real)하게 펼쳐진다.


동구릉은 죽은 왕들의 무덤인데 왕들도 그런 지옥을 거쳤을까,

능에 들어선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인데 지옥은커녕 이상향인 샹그릴라

(Shangri-La)라는 생각이 드니 내가 착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홍살문을 들어서면 세상을 다 가졌던 왕들의 공간이다.

산자(生者)와 사자(死者)가 함께 공존하며 내 사유(思惟)의 공간이기도 한 숲을 걷는다.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채웠다.

수 년 전 조선 제26대 고종임금과 명성황후 민씨의 능인 금곡의 홍유릉에서 거대한

'독일가문비나무'에게 반했는데 오늘은 동구릉 소나무에게 홀딱 반한다.


왕들의 삼혼칠백(三魂七魄)이 서린 숲에 쏟아 붓는 강한 햇살은 나무들도 늘어지게 한다.

삼혼(三魂)은 천혼, 지혼, 인혼을 말하며,

칠백(七魄)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말(言)을 말한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삼혼칠백에 의해 유지가 된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선(線)을 넘으면 혼(魂)은 가벼워 위로 뜨고 백(魄)은 무거워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백성의 생사여탈권과 절대 권력을 누렸던 왕들의 혼백이 남아있는 공간을 거대한

소나무들이 지킨다.


동구릉은 풍수학 상 무슨 형(形)일까.

비룡승천형일까, 금계포란형일까, 아니면 장군대좌형인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동구릉은 뒤에 있는 검암산을 능을 보호하는 주산(主山)으로 하여 중턱에 봉분을 만들었으며,

좌우의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묘의 맞은편에 있는 남쪽의 안산(案山)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었는데 면적은 1,969,675㎡로 약 596천평 정도가 된다.


오늘은 조선 2대 정종대왕의 왕비 정안황후의 제향(祭享)이 있는 날이다.

제향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로 높여 이르는 말이다.


정종대왕의 4왕자 선성군 17대손으로 대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영접을 한다.



11;30

개울엔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신의 세계에선 이런 도랑도 삼도천(三途川)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물은 최대한 숨을 죽이고 고요하게 흐른다.

덩달아 내 마음도 고요해지며 안온(安穩)을 찾는다.



가장 먼저 만난 수릉(綏陵)의 하늘이 한가롭다.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매미소리 요란하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과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통상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으며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이 마련되었다.


다양한 석물과 문, 무인석이 자리 잡아 엄숙하게 능을 지키기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워

먼 곳에서 Zoom으로 풍경을 당긴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하며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箭)을 박았는데 절의 당간지주와는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르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지만 절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당근지주에 깃발을 달면 

잡귀가 범접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수릉'은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능이다.

문조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22살에 요절하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문조로 추존되었다.


중학교 시절 조선왕조 임금의 이름이 역사시험에 자주 나와 외운 때가 있었지.

"태정태새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으로 머리글자만 외웠기에

문조는 기억되지 않았는데 수릉의 기록을 보며 이해가 된다.


조선의 임금에게 붙은 명칭은 조(祖)와 종(宗), 그리고 격하되었을 때 군(君)으로 불리는데,

재미있는 건 고려시대의 왕은 태조 왕건을 제외 하고는 전원 종(宗)이 붙었다.


2대 혜종부터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화종, 강종, 고종, 원종으로 추존되었고,


25대부터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무왕, 창왕, 공양왕으로

조(祖)가 붙은 임금은 태조를 제외하곤 한 명도 없다.


난 학창시절 제일 싫어한 과목은 수학이다.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물리학자나 수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미분, 적분을 배워 사회에서 써먹을 거도 아니기에 머리 쓰는 게 싫었다.


반면에 역사나 지리과목은 매우 흥미가 있었고, 암기에 자신이 있었기에 더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먼 옛날 중학교 때 딸기코라고 별명이 붙은 '구관서' 역사 선생님에게 조선임금의 호칭에

붙은 조(祖)와 종(宗)에 대해 질문을 한다.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를 묘호(墓號)

하는데,


구 선생님은 조(祖)가 붙는 경우는 나라를 세운 임금과 집권기간에 외국의 침략을 받거나

내란이 생겨서 나라가 불안하였지만 그 위기를 잘 넘긴 임금에 붙이는 묘호이고,


그와 반대로 태평성대를 이루거나 큰 업적을 이루었던 임금에게는 종(宗)이라는 묘호를

썼다고 명쾌하게 설명을 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君)의

묘로 불리며, 왕(王)의 기록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일기(日記)로 표현한다.


능(陵) 위로 시간이 흐르고 구름도 흐른다.

여기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닌 왕의 시간이다.


조선 제5대 임금인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인 '현릉(顯陵)'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영역인지

신의 영역인지 분간하려하지만 아무도 이 영역의 성격을 말하지 않는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공간엔 천년 태고의 시간이 고였다.

무릇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죽으면 태어난 데로 돌아간다는데 문종도 칠성신에게 갔을까.


11;45

속세와 성역의 경계인 금천교(禁川橋)를 지나 건원릉(健元陵)에 들어선다.

건원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에서 2대 정종대왕의 왕후인 정안왕후의 제향이 한창

진행 중이다.

도열한 자손들은 국궁4배를 하며 제례의 절차에 따라 제향을 엄숙하게 진행한다. 


태조 이성계는 서기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나 1356년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함주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고, 홍건적· 원나라·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어 벼슬이

1388년 수문하시중까지 올랐는데 종일품 우정승에 해당한다.


이후 이성계는 1392년 요동정벌을 나가 북진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워 서울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6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말년에는 이방원 등 왕자들의 왕위쟁탈전으로 마음의 짐을 안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조선 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는 게 아니다.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제례의식은 조선 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한다.


정종대왕과 정안왕후의 후릉은 북한의 개성에 있기에 건원릉에서 제향을 지내는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어도(御道)라

하기에 일부로 어도를 밟으며 이성계의 영역을 침범한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으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연 이성계의 능에서 제향이 계속 진행된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사대정책과 농본주의(農本主義)를 통하여 농업을 장려했던

태조 이성계의 봉분이 특이하다.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건원릉 봉분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람도 잠잠하다.

푹푹 찌는 무더위는 상의는 물론 팬티까지 땀으로 젖게 한다.


매미소리를 들으며 '목릉(穆陵)'으로 향한다.

소나무와 서어나무가 공존하는 숲길을 걷는다.


뙤약볕아래 홍살문이 외롭다.


12;00

배치도로 봐서는 '인목왕후릉'이다.


조선 제 14대 임금인 선조와 인목왕후의 목릉(穆陵)이 한가롭다.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심각한 당쟁으로 정치는 불안정했고,

임진왜란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보물 제1743호이다.

다포형식(多胞形式)은 목조건축 양식인 공포(拱包)의 일종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방(昌坊)과 평방(平坊)을 걸고 그 위에 포작(包作)을 짜 올린 형식이라는데

우리나라 목조 건축 양식 중에서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구조와 형식이라고 한다.


그동안 맞배지붕과 팔작지붕,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에 익숙한 나에게 다포형식의

목조건물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은 나에게 새로운 안목을 키워주며,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에서 나의 사유(思惟)는 점점 깊어진다.


바람이 분다.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산 능선에서 용오름 형태의 흰 구름이 하늘로 승천한다.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 부중강 인목욍후 부좌강"이라,

전서체(篆書體)로 쓴 선조대왕 목릉 비문을 읽는다.


한가로이 있는 능(陵)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멈춘다.

발자국소리는 물론 숨소리 내는 것도 참는다.


이곳에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묵언수행(默言修行)이 되기에 경건한 마음으로 능을 응시한다.


절도 없는데 종소리가 들린다.

잠시 환청(幻聽)이 들렸나 보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종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리니 그 소리는 가 닿지 않는 데가

없는 해탈(解脫)의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해탈에 가 닿기 위해서는 있는 것을 버려야하는데 무덤 속에 있는 왕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들이 죽음을 예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


죽음과 이별이라,

왕이나 범부들의 삶에서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기에 나 또한 그냥 버리고 떠나는 무

(無邊)의 삶이 되고 싶다.


잠자리 낮게 날아다니고 매미는 선탈(蟬脫)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한다.

너무 강렬한 폭염에 지친 나무들도 잎사귀를 늘어뜨렸다.


12;14

조선왕조 제21대 왕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능인 '원릉(元陵)'에 도착한다.


조선의 왕 중 52년이란 가장 긴 재위 기간에 탕평책, 균역법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붕당정치에 아들 사도세자가 희생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원릉의 비는 세 기로,

첫째 비는 1776년 정조의 어필로 조선국영종대왕원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1890년 건립된 둘째 비는 고종의 어필로 "조선국영조대왕원릉'이라고 새겨져 있고,


마지막 하나는 정순왕후의 비로 '조선국정순왕후부좌'라고 새겨져 있다는데 그냥 지나친다.


'원릉'은 쌍릉이다.

왕릉은 봉분 형식에 따라 유형이 다양하다.


왕이나 왕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單陵)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으로 명종, 인순왕후의 강릉,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으로 세종, 소헌왕후의 영릉,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同原異剛陵)으로 예종, 인순왕후의 창릉,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위 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경종,

선의왕후의 의릉이 있고,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세 기를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으로 현종의 경릉이

있으니 오늘 참 많은 걸 배운다. 


519년의 역사를 지난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과 주자학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지만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募)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삼았기에 조선의 역대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여 42기 능 중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제자리에 보존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는 64기다.

42기의 능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는데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완전하게

보존된 사례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조선은 왕릉 보존도 잘했지만, 왕에 대한 역사 기록물도 세계적으로 드문 방대한 자료를

자랑한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물은 한국이 가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3245책,

기록일자 10만4000일, 기사 수 180만 건, 글자 수 2억4300만자로 팔만대장경 목판본의 5배,

중국 이십오사의 6배 분량이라고 한다.


조선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임금을 수행하며 온갖 일정과 대화와 읽은 문서를

낱낱이 적은 일기는 지금까지 번역률이 22.8%로 완역은 2051년에야 이뤄질 전망이라고

하는데 AI(인공지능) 번역기가 도입되면 30년 정도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기사도 나왔다.


12;21

삶에서 인생과 여행은 항상 미완성이다.


여행에서 보고 싶은 것을 다보면 여백(餘白)이 사라진다.

삶에서 여백이 없다면 너무 빡빡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경릉, 숭릉, 혜릉을

다음 일정으로 미루고 탐방을 끝낸다.


은일(隱逸)의 숲에서 보낸 한나절,


광릉수목원에서도,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에서도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의 진한 감동은

내 삶에서 오랫동안 여운이 되어 남겨지리라.


세상을 다 가졌어도,

절대 권력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던 왕들은 땅속으로 사라졌다.


삶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끝없는 권력과 욕망에 집착하여 발버둥 쳤던 왕도,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왕도

다 삼혼칠백이 되어 사라졌다.


임금의 무덤은 삶의 허망함을 말해준다.

남은 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고, 크게 세상을 보면

온갖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고 참다운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지.


13;00

상촌 신흠 선생은 인생삼락(人生三樂)을 이렇게 꼽았다.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 열고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맞는 것,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 했는데

오늘 그 세 가지 즐거움을 다 맛본다.


오래 걷던지, 장시간 산행을 하면 피곤의 회복이 예전과 같지 않게 느껴지기에 그늘에

잠시 앉아 숨을 가다듬는다.

나이 듦의 서글픔보다는 아직도 버텨주는 나의 팔다리가 고맙기만 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도 없지만,

죽음은 불행이 아니고 삶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애써 위안을 갖는다.


내가 사후(死後) 장기 및 사체기증서를 쓴 게 10년이 넘는다.

화장 후 유골을 뿌리면 남는 게 없어 묘지를 쓸 필요도 없으니 묘비도 당연히 없겠지.

그러나 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원 없이 세상을 즐기며 살았다'라는 마음속의 묘비를

갖기를 원한다. 


왕(王)들의 삶의 마침표는 왕릉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과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멋진 쉼터가 되었다.


등 굽은 노인이 앞서 길을 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을 하염없이 걷는 모습은 내 아버지가 아닌 나의 모습이다.


두(話頭)를 사용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간화선(看話禪)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에 등 굽은 노인을 따라가며 동구릉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머릿속을

정리한다. 


여행이 삶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정답을 주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진 않지만

그래도 지친 삶에 영양소가 되는 건 분명하기에 오늘도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은 거다.


18;00

골목길 작은 수로에 백로 한 마리가 먹이 활동을 하다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         한운야학(閑雲野鶴)


             골목 수로에 선 백로 한 마리 외로운데

             흰 구름이 깔리더니

             먹구름이 우르릉 거리며 흰 구름 아래를 삼켰다.


             먹구름이 세상을 삼키고 나도 삼키려나,

             금세라도 비가 오면 저 학(鶴)은 어디로 갈까.

             먹구름 따라 흘러가면 나는 어디로 흘러갈까.


             한운야학(閑雲野鶴)의 삶 어언 십년,

             금세 하늘이 갈라지며 천둥이 내려치고

             세월 내린 목 잔주름에 굵은 빗방울 뿌려대면 좋으련만

             야속한 먹구름은 검단산 너머로 도망을 치는구나.                      석천   >


'계요등'을 밀어낸 '박주가리'가 바람에 마구 흔들린다.



계요등과 박주가리의 치열한 싸움판을 바라본다.

작년에 완승을 거뒀던 계요등이 박주가리의 기세에 눌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다.


박주가리 덩쿨을 몇 가닥만 없애주면 계요등의 세력이 왕성해지겠지만 이 또한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행동이라 그냥 발길을 돌린다.


                                            2018.  8.  11. 동구릉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