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78 황간 월류봉(405m)에 석천 머무르다.

김흥만 2018. 9. 26. 17:34

 

2018.  9.  19.  07;00

먹구름이 몰려와 파란하늘을 지웠다가 금세 사라진다.

승합차엔 7명이 타고 황간의 월류봉을 향해 7시 정각에 출발한다.

절묘하게 7이라는 숫자가 겹치니 기분이 매우 상쾌하다.

 

아시안 게임 중 축구선수 손흥민의 등번호인 7번도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서양에서 7이 행운의 숫자라지만 우리나라에서도 7은 매우 기분 좋은 숫자이다.

 

아주 예전 축구의 포지션이 7번 센터하프, 9번은 센터포드로 기억난다.

대중교통 여건상 늘 7시에 출발하지만 7이라는 숫자가 우리에게도 매우 좋은 숫자임에

틀림 없다.

 

 

 

골목길에 핀 7송이 '사데풀'을 보며 일곱 가지가 달린 칼인 '칠지도'가 생각난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를 신(神)으로 모신다.

 

백제 사신이 칠지도와 칠자경을 왜왕(倭王)에게 주면서, 가는 데 7일 거리에 있는 광산의

철(鐵)로 만들었다고 설명을 했다.

 

칠지도, 칠자경, 칠일 등 7이 세 번 반복되며,

고구려에서는 주몽이 아들 유리가 찾아오도록 칼을 숨겨둔 곳도 칠령(七嶺), 칠곡(七谷),

칠릉(七陵)이라고 한다.

 

숫자 7은 고대 음양론에서 양기가 가장 강한 숫자이고, 고대 천문학에선 북두칠성을

나타내며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심으로 만물의 운행을 주관한다고 여겼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의 7이라는 숫자는 주술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기분 좋은

숫자임엔 틀림없으며,

 

바둑에서,

1단 수졸(守拙) 졸렬하나 자신을 지킬 줄 알고,

2단 약우(若愚)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름의 지모가 있다.

3단 투력(鬪力) 어느덧 싸울 힘이 붙었고,

4단 소교(小巧) 소박하게나마 기교를 부리는 경지에 올랐다.

 

5단 용지(用智) 기교를 넘어 지혜를 쓸줄 알게 되고,

6단 통유(通幽) 깊이 연구하고 세밀히 분석 할 수 있는 능력이 심원해졌으며, 

7단 구체(具體) 모든 장점을 두루 갖춰 거의 완성에 다다름을 말한다.

 

8단 좌조(挫照) 앉아서도 모든 것을 훤히 알게 되었으며,

9단 입신(入神) 신의 경지에 들어섬을 말하는데,

바둑에서도 7이라는 숫자는 모든 장점을 갖춰 완성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거다.

 

 

2018.  9.  19. 10;42

시간이 멈췄다.

내 시선도 딱 멈췄다.

 

저리 아름다울 수가,

절벽에 매달린 월류정(月留亭)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고 가슴이 떨린다.

이 풍경을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을까.

절묘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월류정이 사람이라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夏 唯我獨尊)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문득 단양 8경 중 도담삼봉(嶋潭三峰)의 정자가 떠오르고, 그 정자와 비교를 해보는 못된

습관이 시작되며 일상에서 무디어졌던 감각들이 튀어나온다.

 

               <       월류정

 

                  산(山)은 정(亭)을 품었고

                  정(亭)은 달이 정(停)하길 기다리네.

 

                  푸른 절벽 돌고 돌아

                  여울진 탄(灘)은

                  정(亭)을 휘감고

                  달빛 별빛 담을까. 

 

                  붉은 단풍잎 멀었건만

                  초강천 맑은 옥수(玉水)

                  소리 지르며 흐르고,

                  정(亭)은 침정(沈靜)에 묻혀

                  달과 우암을 기다리누나.                                 석천     >

 

 

한 달 전 지도상에서 월류봉을 찾는다.

 

 

나만의 세상을 찾아 지도에서 헤매다가 가고 싶은 곳이 나오면 그곳이 그리워지고,

지도에서 눈을 뗄 때까지 나는 무한상상(無限想像)의 공간을 훨훨 날기에 지도를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달이 머무르고, 달도 쉬어간다는 월류봉(月留峰),

우리나라엔 월악산, 월출산, 추월산, 월봉산, 만월산, 월각산, 월영산, 월여산 등 이름에

월(月)자가 붙은 산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 산들은 하나같이 달의 형상을 산과 접목해 미화한 이름이라 달이 머무른다는

월류봉의 멋진 이름엔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상향(理想鄕)을 그리워한다.

나만의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일까,

나의 상그릴라(Shangri-La)는 어디에 있을까,

그 말이 다 비슷한 말이지만 나는 나만의 이상향을 늘 그리워하며 찾으려 애쓴다.

 

 

며칠 전 내가 잠시 갇혔던 엘리베이터 문짝에 법륜스님의 정토불교대학 안내문이 붙었다.

정토(淨土)라,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天堂), 도교에서 말하는

무릉도원이 내가 쫓는 이상향일까.

 

나만의 편한 마음을 즐기는 곳이 바로 이상향일 텐데, 여기 월류정이 바로 나의 이상향인지

첫눈에 반했다.

 

불교에서 중생(衆生)들의 세계는 번뇌와 더러움이 가득한데, 부처와 보살이 머무는

정토(淨土)의 세계에는 오탁의 번뇌가 없는 청정한 세계라고 한다.

 

이 견해에 대하여는 실제로 이 세계를 떠난 곳에 부처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와 마음의 청정함이 곧 정토라는 견해가 대립을 하지만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말싸움이겠다.

 

 

거대한 산과 강을 정원으로 삼은 월류정,

왕의 용상(龍床)뒤에 펼쳐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처럼 고결한 모습의 월류정,

 

달이 머무는 월류봉(月留峰)에서 달을 잡고 싶다.

월류봉 정상에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듣고 싶다.

 

산 이름에 월(月)자가 들어가는 산은 여느 산보다 더 아름답다.

다음엔 월출산, 월악산, 추월산, 월봉산, 월여산 중 어느 곳을 오를까.

 

충주의 월악산(月岳山 1092m), 영암의 월출산(月出山810m)은 오르다가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

 

월악산은 덕주사 마애불을 거쳐 정상까지 오르다 진도에서 만든 홍주(紅酒)에 취해 오르지

못했고, 월출산은 2002년 4월 5일 구름다리를 지나 정상을 향해 오르다 때 아닌 폭설이

내려 아이젠을 휴대하지 않았기에 위험해서 중도포기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건 교회(敎會), 모텔(Motel)과 시인(詩人)이라고 한다.

이런 풍경에서 누구나 시인(詩人)이 됨은 당연한 게 아닌가.

 

관광지라도 청정지역이라 교회와 모텔은 보이지 않고, 3백년 나이가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동구(洞口)를 지킨다.

 

 

월류1봉(365m)의 깎아지른 절벽이 나를 압도한다.

 

설레는 여정이지만 저곳을 무사히 오를 수 있을까,

예전보다 고소공포증이 많이 좋아졌기에 위험한 코스를 피하면 종주가 가능하리라.

 

 

한천팔경(寒泉八景)중 제1경인 월류봉 숲으로 스며든다.

요란한 물소리는 바람소리를 잠재우고, 허공엔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나른다.

 

 

뒤쪽으로 보이는 월류정은 기다림이다.

 

여름과 가을의 징검다리에서 누군가 머무르길 기다리는 월류정,

연둣빛 봄, 신록이 왕성한 여름, 단풍이 온 천하에 깃들 때 가을풍경, 흰 눈이 수북이 쌓이고,

매서운 북풍한설(北風寒雪)에 흔들리는 겨울풍경은 어떨까.

 

 

한천팔경(寒泉八景)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풍경을 보고 싶다.

제1경인 월류봉을 비롯하여,

사군봉(使君峯), 산양벽(山羊璧), 용연동(龍淵洞), 냉천정(冷泉亭), 화헌악(花獻岳),

청학굴(靑鶴窟), 법존암(法尊巖)이 팔경이라는데,

 

화헌악은 월류봉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든 모습을 말하며, 용연동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沼), 산양벽은 월류봉의 가파른 절벽을 말한다.

 

 

장미과의 '쉬땅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개쉬땅나무라고도 하며 평안도 사투리로 수수깡을 쉬땅으로 부르는데,

꽃 피는 모습이 수수이삭을 닮았다고 해 쉬땅으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개쉬땅나무, 수크렁, 여우오줌, 노루오줌, 말똥비름, 며느리배꼽, 미치광이풀,

개불알꽃, 송장풀, 소경불알꽃, 애기똥풀, 중대가리나무, 쥐똥나무 등 특이하고 지저분한

이름이 붙은 식물이 상당히 많다.

 

 

숲에 핀 '범의꼬리'가 화사한 연분홍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벌을 유혹하는데,

나의 인기척에 놀란 벌이 멀리 사라진다.

 

 

월류정과 월류봉이 물속에 잠겨 만든 반영(反映)은 나를 침정(沈靜)의 세계로 이끈다.

 

 

꿀풀과의 '석잠풀'도 느긋하게 가을바람을 즐긴다.

석잠풀의 추출액으로 급성 및 만성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신약 개발을 한다고 알려졌다.

 

 

내가 잠시 석잠풀에 한눈을 파는 사이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술 한 잔을 마시고 있을까,

월류정을 줌으로 당겨본다.

 

기암절벽아래 정자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정적(靜寂)만 흐른다.

이럴 때는 고요가 맞을까, 적막(寂寞)이 좋을까,

참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평화를 찾았다.

 

 

원촌교에서 석천과 만나 합류한 초강천(草江川) 물이 여울져 흐르며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수천만 년 흐르는 물길은 군데군데 소(沼)를 만들었고 누군가 땀 흘려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월류5봉에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투명하게 비치는 강물에 손을 담그니 몇 초도 못 견딜 정도로 차갑다.

이래서 초강천 물을 한천이라 하여 찰 한(寒) 샘 천(泉)자를 쓰는 모양이다.

 

 

 

11;22

산길은 너무 가팔라 빨리 갈 수도 없는 길이요, 빨리 갈 필요도 없는 길이다.

천천히 가야만 하는 길은 삶의 무거운 보따리를 풀어놓고 가라고 한다.

 

그거 참 묘하다.

오름길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은 1봉에서 5봉으로 넘는데 우린 거꾸로 5봉에서 1봉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속에 5개의 봉우리를 넘고 넘어야만 월류봉 정상에 오르겠지.

 

 

잠시 오르다 조금 전 건넌 징검다리를 뒤돌아본다.

나에게 익숙한 지네다리 형식의 징검다리인데, 진천의 농다리(籠橋)와 많이 닮았다.

 

진천의 농교 교각은 별자리 28수(宿)를 본 따 28개로 만들었다.

여기 징검다리도 그런가싶어 궁금하여 세다가 포기를 한다.

물은 구불구불 흐르지만 결국 금강을 향해 흐르고 바다에서 만나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다.

 

 

산안개도 없다.

대신 물소리와 새소리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물먹은 이끼마저 아름다운 곳을 달과 함께 머무르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쉰다.

 

 

5봉으로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된비알이다.

더위에 시달리며 늘은 체중은 들머리부터 숨을 헐떡이게 한다.

 

 

5봉까지 820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갑다.

이정표를 없애 많은 고생을 하게 한 각화산과 대비된다.

여기엔 자기만의 수행을 목적으로 한 욕심장이 중(僧)이 없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도심이나 산에서 중을 만나면 도반의 길을 걷는 수도자에 대한 예의로 목례나

합장을 하였는데, 각화산의 중에 대해 실망을 하고 더 이상 예(禮)를 드리지 않는다.

 

 

월류봉은 높지가 않아서 오르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낮은 산이라도 가파른 경사로 여기까지

오르기는 녹녹치 않다.

 

'붉은병꽃'이 사람도 없는 심산유곡에 홀로 피어 나를 반긴다.

늦게 핀 아름다운 꽃에 무서리 된바람이 쌓이면 속절없이 생을 마감할 텐데,

홀로 피어 떨고 있는 붉은병꽃이 안쓰럽다. 

 

이 '붉은병꽃'은 지금 필 시기가 아니고 5월에 피어야 맞는데 9월에 피었으니 꽃말처럼

'전설'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11;42

울창한 소나무와 활엽수가 생명의 맥박소리를 들려준다.

소나무는 활엽수한테 지기에 피톤치드로 승부를 걸려고 피톤치드를 무한정 뿜어낸다.

 

 

세퍼트를 데리고 내려오던 등산객이 미끄러지며 살짝 구른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고 견령(犬齡)이 일 년 미만인 강아지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으니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산세로 썩 쉽지만은 않은 길이라도 이 길을 걸으며 누군가는 지친 영혼을 위로

받았겠지.

계단이 끝나자 돌 많은 너덜겅이 나오고 오름길은 사람 없어 한적(閑寂)하다.

 

 

가파른 길은 좁고 옹색하지만 적막을 누릴 수 있어 좋다.

진동모드로 설정한 휴대폰이 부르르 떤다.

 

은행 대선배가 연휴 때 모이자고 호출을 한다.

언제였더라, 춘천 삼악산을 오를 때였구나.

IMF외환위기로 전 국민이 신음하는 시기인 영등포역 지점장으로 근무할 때,

춘천 삼악산 번개 등산 팀이 대부분 부행장과 본부장급이니 지점장은 서열상 제일 말석이다.

 

무거운 막걸리와 술안주를 혼자 짊어지고 험한 삼악산 길을 힘겹게 올랐는데,

그 사람들 중 일부는 타계(他界)를 했고, 남은 사람들이 만나자고 연락이 온 거다.

 

꿈이란 무엇이고 세월이란 무엇일까,

꿈과 세월이란 기억은 있는데 실체가 없다.

지나간 세월, 지나간 사람, 말없이 지나간 꿈을 돌이켜 보며 정주성(定住性) 거미가

집을 완성하고 그물에 걸릴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12;15

전망대에 올라 마음 넉넉한 자연풍경, 오래된 풍경에 잠시 넋을 잃는다.

시간마저 쉬어가는 곳에 서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가파르게 올라와 전망대부터 5봉까지는 평지와 다름없는 소나무 숲길이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는 값진 여정이 될 수 있게 도와준다.

 

 

12;23

월류봉에서 가장 높은 5봉(405m)에 올랐다.

5봉은 상봉으로 월류봉에선 가장 높은 봉우리니 실질적인 정상이겠다.

 

소나무로 둘러싸여 조망은 전혀 되지 않고, 흔한 정상석도 없이 플라스틱 방향표시판만

외롭게 봉우리를 지킨다.

 

 

경사도가 60도가 넘는 오름길,

왼쪽으로는 천길만길 헤아릴 수 없는 단애(斷崖)라 눈길을 주기가 겁나 애써 오른쪽만

보며 4봉으로 향한다.

 

'쇠물푸레나무'가 금년의 마지막 꽃을 피우고, 나는 숨을 죽이고 포커스를 맞춘다.

아직 무서리, 된서리가 내리지 않아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쇠물푸레꽃은 비장한

모습이다.

 

 

12;36

5봉에서 13분 만에 가파른 4봉(400.7m)엘 올랐다.

 

 

4봉도 활엽수가 빙 둘러 서있어 하늘만 빼꼼이 보인다.

 

 

12;37

저 아래 어디선가 수탉이 목청을 높인다.

해발 400m라 건너온 초강천의 징검다리가 희미한데, 닭 울음소리가 들리니 저아래

지상(地上)과 지금 내가 서있는 천상(天上)세계의 중간에는 거추장스런 게 아무 것도

없는 모양이다.

 

암튼 지금시각이 12시가 넘었는데 목청을 높이는 수탉은 시간개념이 없는 놈이다.

 

 

일행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걷는다.

숲의 냄새는 싱그럽고 공기는 달다.

 

한반도 지형을 닮은 산, 초강천과 계곡은 분명 공진(共振)으로 진폭을 크게 하여

공명 현상을 만들었다.

공명 현상으로 소리가 증폭되어 산꼭대기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닭이 우는 소리는 머리를

맑게 한다.

 

 

고양이가 따라오며 다리를 툭툭 치더니 피하지도 않고 배를 내밀며 만져달란다.

배가 고픈 모양인데 빵은 앞서간 친구의 배낭에 있고 내 주머니엔 비상용 초콜릿 한 개와

사탕 세알이 전부라 난감하다.

 

초콜릿을 까서 주니 처음엔 먹지를 않다가 조금씩 핥아 먹는다.

들고양이, 산고양이로 살며 털에 윤기가 흐르니 새나 짐승을 많이 잡아먹었던지,

아니면 지금 같이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애교를 부려 음식을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다.

 

월류 1봉에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니 내가 잘못했고 한다.

개나 고양이에게 단 음식은 치명적이라는데 강아지를 20년 넘게 길었어도 그런 사실을

몰랐으니 내가 무식한건지 암튼 냉정하지 못해 실수를 했구나.

 

사실 이 산으로 결정은 오래 전에 했지만 어제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사육사의 실수로

푸마가 탈출하여 마취총을 맞고도 사라졌다는 뉴스를 접하고 여기도 대전에서 가까워

푸마 같은 맹수는 능히 올 수 있는 곳이기에 조금 망설였다.

 

신경이 쓰여 산행중간에 인터넷 검색을 하니 사살을 하였다는 기사가 뜨며 내 앞에 있는

고양이에게도, 죽은 푸마에게도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         달맞이꽃

 

          넘고 넘어도 끝없는 산 고갯길엔

          달맞이꽃이 지키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엔

          지켜주는 이 아무도 없더이다.

        

          달맞이 준비 아쉬운 하늘

          회색빛은 냉정함인데

          달맞이꽃은 희망을 주는구나.

 

          등판에 낡은 인생의 짐 짊어지고

          넘어야 하는 고갯길.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또 넘으련만,

         

          두손 모아 합장하던 부처꽃

          어디론가 사라지고,

          달맞이꽃 배웅 받으며

          나는 인생 고개 넘어 사라진다.                       석천>

 

 

4봉을 거쳐 3봉까지 진행을 하며 쇠물푸레꽃, 붉은병꽃을 만났으나 월류봉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은 달맞이꽃이다.

구름이 끼고 내가 밤까지 월류봉에 머무르지 못하여도 달맞이꽃은 달을 맞아 환히 웃겠지.

 

고양이와 노닥거리는 사이 선두는 3봉으로 치고 올라간다.

나도 3봉으로 오르기 위해 4봉에서 로프를 잡고 가파른 길을 내려간다.

 

 

직박구리 울어 뒤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저 험한 봉우리를 다 지나왔구나.

 

 

묘하게 돌이 빨갛다.

철분이 많이 섞였을까 살짝 찍어 혀에 대보니 역시 철분성분이 많다.

지도상에 월류정 뒤쪽과 5봉인 상봉 오름길에 두 군데나 폐광산이 있던데 철광산이었나.

 

 

12;57

고양이와 이야기하며 이곳저곳 사진을 찍다보니 선두와 거리가 많이 벌어졌기에

친구가 월류3봉(394m)에서 나를 기다린다.

 

 

13;08

전라도 순천에서 떼로 몰려온 노인들의 게걸스런 목소리가 산을 더럽힌다.

개중에는 소주병을 들고 마셔가며 전라도 사투리로 욕을 해대고 음주산행을 한다.

복장은 오렌지색으로 통일을 했는데 너무 시끄럽고 냄새가 진동을 해서 빨리 지나가길

기다린다.

 

산에서 짜증나는 전라도 늙은이들, 옆에 있는 할망구들도 덩달아 시끄러우니

하산을 하면 귀부터 씻어야겠다.

 

 

2봉에서부터 한반도 지형이 보이기 시작한다.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발원하여 물한계곡을 거쳐 초강천을 만든 강물은 금강으로 들어가기 전

멋진 한반도 지형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사행천(蛇行川)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는 곳,

푸른 솔과 맑은 물이 보이고 무성한 거목의 군락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니

어떤 친구는 드론으로 찍었느냐고 묻는다.

 

맞다.

지금은 기계드론이 아니고 인간드론이 400m 상공에서 셔터를 누르는 거다.

 

 

거친 길은 사라지고 편안한 계단이 나온다,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라는 건 분명히 있다. 

산에서는 빛과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나타나는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오늘은 내가 나를 찾는 날이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에 나만을 생각하며 천천히 걸으리라.

 

 

계단 아래 미운 시어머니와 가련한 며느리를 대표하는 '며느리밥풀꽃'이 하얀 혀를 내민다.

이래서 자연은 무심하지 않은 모양이다.

 

며느리밥풀꽃을 찍느라 장갑을 벗었더니 산모기가 날라와 손등을 문다.

참 빠르기도 하다.

장마가 짧고 폭염이 계속되면서 모기가 자취를 감췄다고 하더니 요즘 자주오는 비에

개체수가 많이 는 모양이다.

 

모기는 톱날침으로 코끼리 피부까지 뚫는다는데 내 손등을 물고 1초에 800번이나

움직이는 날개로 잽싸게 순간이동을 해 도망을 간다.

 

영국 런던대 리처드 봄프리 박사팀은 초고속카메라로 모기가 나는 과정을 촬영해

분석했더니 1초에 800회의 바른 날갯짓을 하고 다른 곤충에 비해 날개가 움직이는

각도가 작아 비행속도가 빠르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조금 전 한반도 지형이 마지막으로 생각했는데 1봉으로 오르며 굵은 소나무 사이로

한반도 지형을 다시 보는 행운을 누린다.

 

자연은 기대하지 않았던 나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구나.

 

 

소나무를 빗겨나 초강천이 빚은 한반도 지형을 다시 보며 감탄을 한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초강천과 송곳처럼 세워진 봉우리 5개가 펼쳐진 사이에 있는 한반도

지형은 가히 선경(仙景)이다.

 

한반도 지형은 영월 선암마을, 진천 초평저수지에도 있는데 지난겨울 진천 두타산에

올랐어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

 

 

내가 저 험한 곳을 다 오르고 여기까지 왔는가.

굴곡진 삶처럼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다시 올랐구나.

 

 

깎아지른 절벽 위로 지나온 길이 위태롭게 존재한다.

지날 때는 몰랐는데 아찔한 순간들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13;22

신선이 달맞이를 하며 놀던 곳,

가슴속에만 담아두기엔 너무 벅찬 풍경인 월류1봉(365m)엘 올랐다.

 

달이 머물던 곳에 서니 선인들이 시조를 읊던 소리가 들려오고, 한줄기 바람에 솔 향이

실려 오니 여긴 별유천지(別有天地)로구나.


 

 

골 첩첩 물 겹겹 둘러싸인 곳을 벗어난다.

1봉에서 하산하는 길은 5봉으로 오르던 길보다 훨씬 유순하다.

 

초강천에서 만난 동네주민은 에넥스에서 시작하는 1봉~5봉 코스가 힘드니

5~1봉의 역코스로 진행하라고 조언을 했는데 실제로 종주해보니 1~5코스의 순방향이

오히려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극심한 가뭄, 물러갈 줄 모르던 폭염,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열매를 맺은 산딸나무가 대견하다.

 

이 산딸나무는 자기의 조상이 예수를 못박아 매달던 십자가 나무로 쓰였다는 것을 알까.

 

 

14;09

어느 멋진 가을날 꿈속을 헤매듯 월류봉 종주 산행을 끝낸다.

 

 

숲속을 벗어나니 풀숲에 1cm도 되지 않는 선이질풀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이질에 특효가 있어 일본에 이질약재로 많이 수출되기도 하였던 이질풀은 항암성분이

많아 자궁경부암, 폐암, 직장암, 전립선암, 유방암, 백혈병 등에 쓰인다고 한다.

 

 

벌개미취, 구절초도 여기저기 피었으니 가을이 제대로 오긴 온 모양이다.

 


 

오늘밤 저 봉우리에 달이 걸려 머무르려나.

음력으로 8월 10일이니 아직 만월(滿月)은 되지 않았을 거고, 상현달이라도 저 봉우리에

걸렸으면 좋겠다.

 

며칠 후면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이 월류봉에 걸려 신비롭고 고즈넉한 풍경을 볼 수

있을 텐데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머릿속에서 미리 상상을 해본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이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다는 한천정사(寒遷精舍)

맛배지붕의 유려한 곡선이 깎아지른 월류봉 절벽의 직선과 대칭이 된다.

 

1910년에 건립되었으니 10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어 내 앞에 나타났구나.

소라천, 장교천, 중화령의 물이 이 부근에서 합류하여 월류봉과 어울려 선경을 이룬

장소라,

우암 송시열대감이 글을 가르치던 한천정사에서 지금이라도 시를 읊는 낭랑한

목소리가 나올 것만 같기에 송시열 유허비(遺墟碑)를 끝까지 읽는다.

 

우암(尤菴) 송시열 선생은 옥천 사람이다.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고 실천하였으며,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 활동하였다.

명(明)을 존중하고 청(靑)을 경계하는 국가정책을 고집하며, 효종의 북벌(北伐)계획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키기도 한 인물이다.

 

오로지 명에 대한 사대정신으로 살다 남인에게 몰려 82살에 사약을 받고 죽은 송시열,

명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하자 창덕궁에 명 황제 사당인 대보단을 짓고 제사를 지냄은

조선이 중화정통성을 이어 후계자가 됐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는,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을 즉 내각 책임제를 중요시한 삼봉 정도전,

인성물성동론(人性物性同論)자로 인간평등사상을 주장하며 실학사상으로 성리학을

완성시킨 외암 이간이 있는데, 이들은 명(明)나라에 대한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던

송시열과 많은 대비가 된다.

 

 

14;50

순수한 물빛에 취해, 산빛에 취해 천천히 걸어야만 행복해지는 길이 끝나간다.

한더위에도 물이 차다는 한천(寒泉) 초강천이 월류봉을 휘돌아 흐르고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2006년 세워진 월류정은 기막힌 진경산수화를 만들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건물의 격은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의 순서에 의해

엄격하게 부르는데,

연못가나 개울가 또는 산의 경관이 좋은 곳에 지어 휴식이나 연회를 여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집인 월류정,

세상에 어떤 대궐이나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어 나를 부럽게 한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늘에 뜬 달도 비경에 넋을 잃고 머물러 간다는 월류봉에서 나는 달에게 머무를 기회를

주고 스쳐 떠나간다.

 

 

15;19

와인 시음장에 들린다.

며칠 전 지인이 부부는 취미가 같으면 좋고, 여행도 같이 하는 게 좋다고 한다.

은퇴 후 서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취미를 맞추라는 조언인데 다 맞으면서

틀린 말이다.

 

때로는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일부로 똑같이 맞출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들면 혼자 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미리 혼자 놀고 혼자 시간 보내는 연습도 필요하다.

 

늘 붙어있으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때로는 부부싸움의 원인도 되기에 혼자 있는 기회를

만들고 서로에게 숨통을 터주는 것도 삶의 지혜이다.

 

 

20;00

어둠이 깔린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은하수를 찾으려던 꿈은 사라졌다.

 

오늘은 나의 인생삼락(三樂)을 바꾸련다.

낮엔 멋진 월류봉의 경치 속에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산을 올랐고,

밤하늘에 별이 사라졌으니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한잔 술에 취해 담소를 하는 게 오늘의 인생삼락이겠다.

 

 

 

                    <         추색(秋色)

 

                         밤하늘 비구름에

                         북두칠성, 상현달 사라지고

                         간다, 간다.

                         북망산 어디인가.

 

                         한잔 술 취해 몸 흔들리는 신동

                         가을빛 깊은 밤

                         시 한수 읊으려 애쓰는데,

 

                         풀숲에 숨어 울부짖는 귀뚜라미

                         애써 등 떠미니 내갈 곳 어디인가.

                         지친육신 떠도는 이 몸 애처로워라.                         석천   >

 

 

 

2018.  9.  20. 08;00

비 내리는 하늘이 우울하다.

산마루에 비구름이 잔뜩 걸터앉았고 온도는 19도까지 떨어져 쌀쌀하다.

 

산허리를 잘라 태양광 패널을 깐 곳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개중에는 산사태가 심해 보기 흉한 흉물이 되었으니 얼마나 더 이 산하를 망쳐야 멈출 건가.

한심한 사람들의 멍청한 정책에 나도 국민들도 한결 같이 멍청한 사람이 된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지고,

제각기 다른 목표를 향해 달리는 차량이 물보라를 만들며 질주한다.

 

하늘엔 먹구름이 얇아졌다가 다시 두꺼워진다.

궁평항에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정처없이 걸어야겠다.

 

2018.  9.  20. 17;00

금연구역인 버스 정류장 의자에서 틱 환자로 보이는 젊은이가 담배를 핀다.

유난히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나에게 중대한 도전을 하는 거다.

잔소리를 할까하다가 증인이 없고 단 둘이만 있어 성질을 내지 못하고 참는다.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급한 사람은 갈수록 더 급해지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는

갈수록 더 불같아진다.

때로는 무심(無心)으로 사는 거도 좋다.

 

참견과 잔소리 같은 단어를 잊고 적당하게 타협을 하며 느긋하게 바라보는 무심함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애써 자위를 한다.

 

                                                2018.  9.  20.  월류봉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