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3. 14;46
간현유원지 주차장은 소란스럽다.
언제 지어졌는지 모르는 시골의 간이역으로 간현역(艮峴驛)이 있었는데,
2011. 11. 3일 기차를 타고 왔었으니 무려 7년이란 세월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 텅 빈 역사엔 직원 두 명, 우리 일행 4명과 다른 팀 6명으로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백악관 호프집, 청와대 부동산, 대동강 노래방 등 시간이 멈췄던 간판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머무를 간(艮)자, 재갈 현(峴)자를 쓰는 간현에서 제대로 머무르는 게 보이지 않음은
무슨 뜻일까.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유격장은 그대로 있고 신선이 살던 문연동천(汶淵洞天)은 인파로 아우성이니 출렁다리
하나로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철커덩 철커덩 소리가 들려 기차가 오나싶더니 기차는커녕 레일바이크 달리는 소리가
섬강(蟾江) 물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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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산 출렁다리 입장권을 사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세상의 인연에는 우연(遇緣)과 필연(必緣)이 있다.
사전에서는 우연(偶然)과 필연(必然)으로 표기를 하지만 나는 일부로 만날 우(遇)자와
인연 연(緣)자로 표기한다.
한 친구는 고향친구야말로 동무로써 필연이라고 한다.
객지에서 만난 친구는 언제라도 등 돌리면 관계가 끝나지만 고향친구는 필연(必緣)으로
이어진 끈이기에 끝날 수가 없다고 하는 거다.
인연(因緣)이란 대개 좋은 뜻으로 쓰이나 실제로 인연은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을 뜻하는 억겁(億劫)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눈 깜짝할 새는 '찰나(刹那)'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시간은 '탄지(彈指)'라 하며,
숨 한 번 쉬는 시간은 '순식간(瞬息間)'이라고 한다.
겁(劫)이란 헤아릴 수 없이 길고 긴 시간을 말하는데,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한 겁'이라고 한다.
상상초차 불가능한 시간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시간이다.
2천겁의 세월이 지나면 사람과 사람이 하루동안 동행을 할 수가 있고,
5천겁의 인연이 되면 이웃으로 태어날 수 있으며,
6천겁이 넘는 인연이 되어야 하룻밤을 같이 잘 수 있고,
억겁의 세월을 넘어서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 된다고 한다.
친구들의 얼굴과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보며,
나와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 내 눈앞에 북적거리는 사람들도 최소한 1천 겁 이상의 인연으로 만나는 귀중한
풍경이라 세월 앞에 육신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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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개의 계단을 다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출렁다리에 도착한다.
해발 343m의 소금산 자락에 설치된 출렁다리가 많은 사람의 무게를 받느라 출렁인다.
높이 100m 길이 200m 폭 1.5m를 자랑하는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 위에 선다.
빼곡하게 들어찼던 사람들 무리가 앞으로 이동을 하고 잠시 틈이 생겼다.
70kg의 성인 1,285명이 동시에 올라도 견디게 설계되었다는 다리의 8겹 강선을 슬쩍
만져본다.
힘이 들긴 했지만 다들 여기까지 올랐다.
나이 듦을 당연시하고 나이 든 척할 필요가 없는 곳을 천천히 오른 거다.
8년 만에 다시 오른 소금산,
그때는 없었던 출렁다리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며 희열을 느낀다.
잠깐이나마 무념무상이 되어 일체 잡념이 사라지니 대반열반(大般涅槃)이 되는 모양이다.
송강 정철 선생은 관동별곡에서,
"한수(漢水)를 돌아드니 섬강(蟾江)이 어디메뇨, 치악(雉岳)은 여기로다."라고 절경을
예찬하였다는데,
나 역시 "섬강의 푸른 물과 백사장, 기암 준봉을 병풍 속에 넣었다."고 예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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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를 건넜다.
지난 토요일 친구의 혼사에 참석하기 위해 청주에 내려간다.
식사 중 주변 친구들의 대화를 귀동냥 한다.
두 친구가 걷기가 힘들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으며,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싶어 친구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다.
가서 잠깐 얼굴이나 볼까 생각하다가 초췌한 모습을 보기에도, 보여주는 친구도 힘들 거
같아 이내 생각을 접는다.
물취이모(勿取以貌)라!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는 말을 알면서도 차마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지.
그동안 가까운 친구들의 아파하는 모습, 임종 직전의 모습을 보면 한동안 마음 고생을
했기에 비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무상한 육신에 집착하지 말고 진정한 나를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수양이 덜 되었으니
언제가 되어야 물취이모의 경지에 이를까.
잠시 인터넷을 보니 산악인 김창호 대장의 일행 9명이 네팔 구르자히말 산에서 눈폭풍에
조난당해 숨졌다는 기사가 떴다.
"From home to home"이라 가장 성공한 원정 산행은 '집 문을 열고 나가서 닫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른다."고 했던 그가
사망했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히말라야 14좌 무산소최단기 완등, 세계 최초 등정 3회, 새 루트개척 8회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운 김창호 대장을 평소에도 좋아했다.
연인으로 알려진 고(故)고미영 여성 산악인이 안나푸르나에서 사망한 사고에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을 사진에서 보고 가슴이 찡했는데 오늘은 그의 사고소식에 가슴이 아프다.
이미 개척된 루트를 따라가는 등정(登頂)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올라가는
등로(登路)주의를 고집했던 그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후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도전을 하였다.
그가 히말라야 산군에서 연인이었던 고미영 산악인을 따라갔기에 잠시 고개 숙여 영면과
명복을 빈다.
우리나라에는 히말라야 14죄를 완등한 산악인이 6명으로 이탈리아의 7명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완등한 산악인으론 한국 산악계의 전설인 고(故) 박영석 대장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8091m)를 오르다 실종 되었고, 엄홍길, 한왕용, 김재수, 김미곤에 이어 김창호 대장이며
여성으로는 오은선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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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부모 잘 만난 금수저가 아니다.
금수저로 태어나면 영적(靈的)인 성숙이 어렵다.
제로베이스에서 인생을 출발하면 철저하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