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83 동무 <횡성호 둘레길을 걷다>

김흥만 2018. 10. 16. 20:24


2018.  10.  13. 04;00

지난밤 한잔 술에 제법 취했었는데 숙취가 전혀 없다.

컨디션이 좋으니 오늘은 횡성호 트래킹과 소금산 출렁다리를 오르는 멋진 일정이 되겠다.


06;00

발걸음소리가 또각또각 들리는 골목길,

가로등아래 개망초, 사데풀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영상 3도까지 떨어진 새벽,

사람들은 겨울복장을 하고도 부족해 몸을 잔뜩 웅크린다.


차에 올라타니 매캐한 히터냄새가 난다.

어느새 따뜻한 히터가 반가우니 가을추위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08;20 두물머리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남실바람'이 살짝 분다.

팔당호에 막 피기 시작한 아침안개가 살짝 흩어진다.


느티나무아래 모인 사진작가들은 추위에 떨며 소리도 내지 않고 손을 호호 분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일출, 실루엣을 그리는 황포돛배와 저 앞의

400살 느티나무에게 한강 제1경 '두물경'이라 이름을 붙였다.


                  <      일엽편주(一葉片舟)


                       사공 없는 일엽편주,

                       남실바람에 몸을 맡겼다.


                       사람들은 안개 낀 물 위

                       흔들리는 나룻배에 셔터를 누르고,

                       피사체가 된 배는 반가워하지 않는다.


                       언제 오려나,

                       주인을 그리워하다 무한정 기다림에 지친

                       강아지 신세 일엽편주(一葉片舟)는

                       침잠(沈潛)속에 빠져나오려 

                       결박된 줄을 살짝 비튼다.                      석천   >


공기가 차다.

가슴을 열고 숨을 깊이 들여마신다.

엄청 지독했던 여름을 힘겹게 밀어낸 가을이 슬그머니 사라지려나.

아직 10월 중순인데 종아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


찬바람과 함께 호빵도 왔다.

두물머리 주차장 편의점 호빵 찜기에서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내 입안에선 군침이 살짝 돈다.

호빵은 12월이나 1월 등 겨울 추위를 일상으로 느낄 때보다 요즘 같이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한기(寒氣)를 느낄 때 먹으면 더 맛이 있다.


나는 유난히 삼립호빵을 좋아한다.

야채호빵보다도 팥 앙금이 듬뿍 든 호빵이 더 좋기에 호빵이 출시되면 박스로 사서

냉동을 하였다가 수시로 쪄서 먹는다.


단팥이 든 빵으론 횡성의 안흥찐빵, 군산의 이성당 단팥빵, 경주의 황남빵이 유명하기에

다 맛을 보았지만 난 삼립호빵을 더 좋아한다.


이등병 시절 최전방인 양구에 면회 온 둘째 형과 7~8개월 만에 사제 흰 쌀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도 부족해 삼립크림빵을 17개째 먹고 있는데 형은 벽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지.


문득 삼립크림빵에 대한 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호빵은 스산한 가을바람과 함께 왔다가 봄의 훈풍(薰風)이 오기 전 슬그머니 사라지겠지.


피안(彼岸)의 세계가 된 정암산(406m)이 물안개 속에 실루엣을 그리고,

차안(此岸)에 서있는 친구가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두물머리라,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의 강으로 합쳐져 한강이 되는 곳.


합수머리, 두머리, 이수두(二水頭), 양수두(兩水頭) 등으로 불리다가 두물머리로 불리는

이곳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장소로도 명성을 날린다.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해 철원 금성천을 거쳐 화천을 지나 이곳에 이르고,

남한강은 삼척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해 영월 평창강과 단양을 지나 달천을 합친다.


이후 충주를 거쳐 섬강과 청미천을 합치고, 여주로 들어와 양화천과 복하천을 합한 후

양평에서 흑천까지 만나고 이곳에 와 북한강과 합치는 거다.


물안개 피어오르고,

안개를 뚫고 들어온 아침햇살을 받아 강물은 '윤슬'이 되어 부드럽게 반짝인다. 


10;25

횡성호 입구에 핀 도라지꽃이 나를 반긴다.

여긴 아직 무서리가 내리지 않은 모양인지 꽃이 싱싱하다.


횡성(橫城)은 고구려 때 명칭이 붙었다.

다른 지역의 물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반하여 횡성의 하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가로로 빗겨 흐르기에 가로 횡(橫)자를 써서 횡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강이 낙동강을 제외하곤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지리학자가 아니니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

파문(波紋) 없는 호수를 보며 숨이 막힌다.

물속에도 어답산과 하늘이 담겼으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느 곳이 물인가.

초록과 청색이 합하여 만든 선(線)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로다. 


하늘에 금이 갈까, 호수에 잔물결이 일까,

하늘에 금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호수에 물결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침정(沈靜)속에 발소리 내기도 미안하고 숨소리도 미안해 어답산(786.4m)을 향해

슬그머니 포커스를 맞춘다.


10;30

횡성호 둘레길 5코스인 4.5km가 시작되는 곳,

숲으로 스며든다.


물에서 알파음이 들린다.

비록 바다가 아니라도 해조음(海潮音)과 함께 음이온이 실려 온다.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능엄경에서는 잠을 자면서도 물에서 들려오는 해조음을 들을 수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눈을 뜨고도 듣지 못하면 바보 아닌가.

산과 물이 함께하는 곳에서 나오는 '알파'파는 신기하게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동무라,

이 세상의 글과 말 중에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말이 사랑이다.


사랑 다음에 무슨 단어가 사랑을 받을까.

애정, 슬픔, 이별의 아픔인가, 아마도 친구(親舊)라는 말이겠지.


먼옛날 어렸을 때에는 친구라는 단어보다도 동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는데,

전쟁을 치룬 남북이 더 심각하게 대립하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동무'라는

말은 점점 잊혀져간다.


반공교육의 부산물이랄까,

반공포스터에 나오는 북한 사람들은 얼굴이 빨갛고 머리엔 뿔난 도깨비 모습이

주류를 이뤘고, 그들을 주제로 한 영화나 만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동무였다.


그러한 영향으로 지금은 동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99% 이상 친구라는 말을 쓴다.

동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이다.


오늘은 진천중학교 동기동창들의 수학여행이다.

길게는 60년, 짧게는 57년의 인연을 맺은 친구로 평생의 100%를 가깝게 지낸 친구들끼리

하는 여행이다.


전쟁 중에 태어나 운이 억세게 좋기에 살아남아 장성한 친구들,

보릿고개, 혁명, 월남전, 중동 근로자, 외환위기 등 격동의 세월을 치룬 친구들의 나이는

6살까지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벗을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종자기'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친구가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고 하여 자기 손으로 거문고 줄을 끊은 데서 유래하는 지음지교(知音之交)가

생각나게 하는 동무들과 숲속을 걷는다.


[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멀리 떠나간 동무가 그리워져요,

  정답게 손잡고 뛰놀던 내 동무 그곳에도 지금 귀뚜린 울고 있을까.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만나고 싶은 동무께 편지나 쓰자,

  즐겁게 뛰놀던 지난 날 이야기 그 동무도 지금 내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즐겨 부르는 동요 '귀뚜라미 우는 밤'을 흥얼거리며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추억을 현실로 꺼낸다.

추억 속에 남았던 소중한 것들이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꾸만 없어지고 사라져가기에

안타깝다.


풀벌레 소리 사라지고 까마귀가 까악댄다.

이 길에서 정적명상(靜的冥想)은 어울리지 않는다.


비록 물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동박새 소리를 들어가며 느리게 걷는 동적명상(動的冥想)이

잘 어울리는 길이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사라지자,

옻나무과의 붉나무가 땅바닥에 붉은 그림을 그렸다.


가을 단풍이 아직 들지 않았을 때 붉게 물든 붉나무를 옛사람들은 천금목(千金木)이라 했다.

천금을 주어야 하는 천금목을 깎아 갓끈을 만들었고, 귀신을 쫓기도 하였으며,

소가 병이 들면 베어다가 외양간에 두르고 잎을 짧게 썰어 끓여 먹였다.


팥알 굵기 정도의 열매인 오배자에서 소금이 나와 소금이 귀한 곳에서는 간을 맞추는데

쓰기도 했기에 염부목(鹽膚木), 혹은 목염(木鹽)이라고 했다.


가을 풍경엔 '미역취'의 노란 꽃도 한몫을 한다.

아직 서리를 맞지 않은 미역취가 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자연에서 많은 것에 대해 아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모르는 게 더 많은 게 자연이라,

이제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모자람을 깨우쳐야겠지.


11;12

잠시 서서 물과 하늘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대자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만들어졌는지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

내 눈앞에 실체가 있으니 그냥 보고 느끼면 된다.


물에서 나오는 음이온은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그동안 세파에 오염되었던 눈과 귀를

말끔하게 씻어주니 횡성호는 세이호수(洗耳湖水)로구나.


물새 한 마리 놀지 않는 호수엔 정적(靜寂)만 흐르고, 먼 하늘가엔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잔잔하고 따뜻한 물가를 걸으며 여기서 잘 어울리는 음악은 무엇일까,

연주하는 악기는 첼로가 좋을까, 바이올린이 좋을까, 아님 피아노가 좋을까,

어쩌면 대금이 더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같이 걷는 친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끔 죽음에 대해 고찰(考察)을 했다고 한다.

벌써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는가 보다.


때가 되면 생존 장례식도 하고,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장기와 시신기증을 하면,

품위 있고 멋진 마무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세 가지를 제안 한다.


삶은 예측이 아니라 대응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을 예측하긴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지난밤에 꿈을 꾼 모양이다.

내가 50대에서 다시 40대로 내려가고 30대로 내려가는 꿈을 말이다.

노인에서 장년으로, 장년에서 다시 중년으로, 청년으로 돌아가는 희한한 꿈을 꿨으니

너무 항당한 꿈이겠지.


나는 10년 후도 싫고 10년 전도 싫다.

단지 이 순간에만 영원히 머물고 싶기에 나와 지금 이 순간의 관계만을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지나간 과거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 남은 내 생애에서 가장 어리고 젊은 날이라는 것이다.


호수 건너 어답산(786.4m)이 계속 나를 따라온다.

약 2천 년 전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시조 박혁거세에게 쫓겨 태기산을 거쳐 저 산으로

피해왔기에 '왕이 밟은 산' 즉 어답산(御踏山)으로 이름이 붙었다.


얼마 전에 태기산을 다녀왔으니 조만간 태기왕의 전설을 따라 저 산을 올라야겠다.


댐이 어느쪽에 있는지 모르겠다.

높이 48.8m, 길이 205m 발전시설 1,400kw이라는 횡성호,


사업비가 1607억 원, 공사기간이 10년이나 걸렸고,

저수용량이 86.9백만㎥요, 용수공급이 111.6백만㎥이며 홍수조절이 86.9백만㎥라니

다목적댐이겠다.


11;40

팔작지붕 형태의 작은 정자로 다가간다.

기와집 지붕은 크게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등 네 가지가 있는데,

화성정은 팔작지붕 형태로 만들었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횡성의 별호를 화전(花田)이라 기록되었기에

화성정(花城亭)이라 정자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횡성호 트래킹을 마치고 다음 일정인 소금산 출렁다리를 향해 이동한다.


                                                 2018.  10.  13. 횡성호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