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85 붉은 치마를 두른 무주 적상산< 赤裳山 1,034m>

김흥만 2018. 11. 2. 18:16


2018.  10.  24. 06;00

새벽 골목길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올 때,

늦은 밤 한잔 술에 취해 흔들리는 몸으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갈 때,

귀뚜라미, 여치 소리 요란할 때 나는 밤하늘 보기를 좋아한다.


집 앞 낮은 산 위로 보이는 밤하늘에 별이 보이는 날은 마음이 편하고,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이나 오늘 같이 달만 보이는 날은 왠지 스산하다.


앞산 하늘엔 북두칠성과 샛별 등 겨우 몇 개의 별만 보인다.

눈보라가 몰아치 듯 은하수가 하얗게 깔린 밤하늘을 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인공적인 빛도 별로 없는데 별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오늘밤 덕유산 자락에서

잃어버린 밤을, 사라져 숨은 별과 은하수를 찾아야겠다.


08;00

황금빛이 출렁거리던 들판이 텅 비어간다.

단풍은 산꼭대기에 머물렀다가 어느새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하늘은 파랗고 무심한 전투기 똥구멍에서 새나오는 비행운이 하늘을 두쪽으로 가른다.


초록으로 꽉 찼던 숲도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들판도 텅비어가고, 텅비어가는 들판만큼 하늘은

높아져 가는데 왜 이럴까,

산야(山野)에 비어지는 공간만큼 마음이 허전해지니 유독 나만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10;50

절벽을 붉은 치마로 두른 산,

적상산(赤裳山) 서창(西倉)은 정적만 흐르고, 절벽은 엷은 박무 속에 신비롭게 숨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백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적상산(1,034m),

긴 암벽이 산중턱에 늘어섰으니 '적상캐니언'이라 부를까,

붉게 물든 단풍이 치마바위를 둘러싸 붉은 치마바위가 되었구나.


가을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을 만들었다.

바위와 땅도 검붉은 모습으로 빛나기에 어느 시인은 붉은 치마를 입은 요염한 여인이

산객을 유혹한다고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가에 대장 기러기를 선두로 비행연습을 하던 기러기 떼의 

선두가 다시 바뀐다.


서둘러 포커스를 맞추지만 어느새 먼 하늘가로 사라졌고, 산허리를 살짝 둘렀던 운해도

완전히 사라졌다.


문득 어느 노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란 글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말은 내려놓아라, 놓아버려라는 뜻이기에 자연은 단풍으로 

활활 태우며 완전히 내려놓을 준비에 분주한데 나는 무엇을 내려놓을까.

서서히 비어 가는 자연 속에서 나는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비워야할지를 고민해야겠다.



원시림이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적상산의 수림은 울창하고,

표고 800~900m대에 형성된 층암절벽은 병풍에 그린 수채화의 모습이다.


적상산 산신(山神)이 마술을 부려 신비스런 절벽을 만들었으니 멋진 토어(Tor)와

애추(崖錐)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하며 고도계를 확인하니 현재 372m라 정상까지

700m 정도 고도를 려야겠다.


                <                    건들바람


                          가을바람 건들건들 분다.

                          건들바람은 비움의 계절에 무엇이든 싹 비우라 한다.

                          그리움이 남았으면 그리움도 욕심이라 비우라 한다.


                          건들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맞으면 되고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하면 되는데

                          비우라 한다.


                          살다보면 아픔도 와 머무르고 때가 되면 가겠지.

                          세월도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다는 걸 몰라

                          가슴 아픈 한참까지 비우지 못하고 미련을 떨었구나.                   석천   >


자기네 고추밭이라며 먹을 만큼 따가라는 시골 아낙의 뒷모습에 여유로움이 배었다.

아직 무서리가 내리지 않은 고추잎은 싱싱하고 고추대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가 매달렸다. 


여인이 붉은 치마를 입고 기다린다.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단풍이 든 적상산의 품안은 냄새부터 다르다.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던 서창마을은 지형이 험하기에 성내까지 운반이 어려워 성내 사고지

옆으로 창고를 옮겼다고 한다.


지난 주말 많은 인파로 몸살을 앓은 마을에 주중인 오늘은 우리 일행만 두런거린다.



자연요새인 적상산에 걸어서 오를 수 있는 길은 단 두 곳뿐인데,

지금 서창에서 오르는 길은 평범해 보여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유서 깊은 길이다.



평범한 돌길이라도 묘한 기품을 가졌다.

돌계단은 바위마냥 평범하고 완만하며 군데군데 침목도 끼어 자연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린 산길이 이어진다.


활엽수와 침엽수는 경쟁이라도 하듯 상쾌한 냄새를 내뿜어 머리를 맑게 해주고

작은 계곡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막힌 귀를 뚫어준다.


서창~장도바위~적상산성~향로봉 3거리~기봉~안렴대~안국사~적상호~치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약 9km 정도의 긴 길이지만 돌아서거나 멈추지 않고 오르련다.


풀잎은 서서히 삭고 부드러운 꽃잎이 강쇠바람에 흔들린다.

'벌개미취'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독락(獨樂)을 즐긴다.



길은 서서히 가팔라지지만 매우 부드럽다.


숲이 짙어 조망이 없으므로  근사한 노송이 점잖게 앉은 바위 턱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발길을 재촉한다.


산은 시시때때로 얼굴 모습을 바꾸는데 유독 이 구간은 연둣빛이 남았다.

나만의 길, 나만의 여행이라 생각하며 지질학적 지형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을 오른다.



산속은 만산홍엽이라, 빨갛고 노란 세상이다.

시간의 빈틈에 동박새 들어와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예쁘다.


길은 외길이다.

천국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산을 오르며 마음이 편해지니 드디어 마음의 천국을 찾았다.


며칠 전 친구의 혼사에 참석하였다가 주례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프레젠트(present)라,

프레젠트는 선물을 한다는 뜻으로만 알았는데,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거다.


가장 지혜로운 인생은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고 지금 나 자신이 하고 있는 걸 행복하다고 느끼면 바로 행복이다.


내 삶의 소중함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잊어버렸던 화두(話頭)인 현재 즉 '지금'이라,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을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다.


살면서 늘 부족하고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낄 때가 많았지.

행복함을 별로 느끼지 못해서인지 과거의 아쉬움과 상처를 끊임없이 끄집어내고,

미래의 불안을 미리 꺼내서 힘들어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미리 한 게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미래의 불안에 떨지 말고 현재의 매순간을 선물로 받아 살아야

한다는 목사의 주례사를 들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살아있는 매순간 순간마다 기뻐하고 행복을 느껴야 한다니,

알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던 말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 신선하게 들린다.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고, 수고하고, 느끼고, 매순간 기쁨을 누리면 내가 오늘 사는 게

즐거운 이유가 되겠지.


지금껏 살면서 후회는 바로 그때 젊어서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거다.

쫓기듯이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그게 인생의 전부였던 젊은시절,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아프다는 핑계로 인생을 즐기지 못했기에 내 인생에서 남은 게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12;14

기세 좋던 폭염이 사라진 지금 가을 산은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여름산이 청춘이라면 가을산은 황혼이라 어느덧 내 나이도 산과 비슷한 황혼이 되었다.


목사의 멋진 주례사를 듣던 날 빈 봉투 세 개를 축의금으로 접수하는 황당한 일이 생겼다.

지갑 속에 축의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걸 나중에 확인하며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벌써 치매가 온 걸까,

건망증이겠지라고 생각을 하며 혼주에게 확인하니 빈 봉투를 접수한 게 맞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심해 신경세포가 죽어가는 동창도 있고,

뇌혈관이 막혀 혈관성 치매로 인한 혼수상태로 있다가 며칠 전 타계한 동창도 있다.


나름대로 지적 활동을 많이 하려 애쓰고, 육체적인 운동도 많이 하는데 뜻밖에도

봉투에 돈을 담지 못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으니 뇌세포의 감퇴에 따라 일시적으로

일어난 건망증이라고 애써 자위를 한다.


빨갛고 노란 단풍에 눈이 호강을 한다.

금년 가을단풍색은 유난히 더 선명하고 짙게 보인다.


노란 단풍은 잎 속에 엽록소가 파괴되면 추위에 강한 카로티노이드가 남아 노란색을

띄게 하고,

빨간 단풍은 날이 추워지면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을 줄기로 이동 시키는데,

미처 줄기로 넘어가지 못한 잎에 남아있는 탄수화물이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으로

바뀌어 빨간 단풍을 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요즘 맑은 날씨가 많고 기온이 빠르게 낮아지기에 예쁜 단풍을 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는 거다.


'키로티노이드'나 '안토시아닌' 색소는 사람이 먹으면 노화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질병에 걸리면 몸속 산소가 지나치게 많아져 산화작용이 일어나

각종 신체 기능을 망가뜨리는 활성산소가 되는데,

'안토시아닌'과 '키로티노이드' 같은 황산화물질은 노화를 방지해주는 건강보조식품으로

널리 쓰인다.


빨간 단풍과 보라색 가지를 만드는 '안토시아닌'이 대표적인 항산화물질이며,

'키로티노이드' 색조로 만든 루테인은 항산화물질로 효능이 커 특히 눈을 보호하는

기능이 좋다고 한다.


황반변성이라는 눈 질환이 있는 나는 이곳에서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편해짐을

느낀다.


오늘은 발걸음이 가볍다.

조금만 더워도 숨을 헐떡이고 벌걸음이 느렸는데 최근 체중감량과 찬 날씨는 걸음을

가볍게 한다.


지난 1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으로 적상산 산행을 포기하였다가 오늘 단풍 계절에

오르고 있으니 얼마나 황홀한가.


도전과 포기도 아닌 산행을 하며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볍고 거침이 없다.

처음 나온 전망대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인생사가 티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망대는 드라마틱한 풍경을 발아래 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고 또 올랐기에  이런 풍경 앞에 서면 자연 앞에선 나약한 존재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살짝 바람이 분다.

꿈틀거리는 피안(彼岸)의 산릉은 산에 대한 존경심과 외경심을 갖게 한다.


하늘은 맑고 높다.

거대한 백두대간은 꿈틀거리고 인간세상의 차들은 느릿느릿 어디론가 사라진다.


높지만 거칠지 않은 적상산,

전망대에 선 나는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나무냄새와 단풍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고 먼 시선으로 하늘을 본다.


12;38

최영 장군은 이 바위에도 전설을 남겼다.

최영 장군이 탐라의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을 할 때 이곳에 이르러 산 전체의 붉은 단풍과

깎아 세운 암벽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산 정상으로 오른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절벽 같은 바위가 길을 막자 최영 장군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長刀)로 바위를 힘껏 내리치자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며 길이 열렸다는 장도바위에

가을햇살이 스며든다.


12;43

적상산성에 오른다.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었던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적상산성의 형세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니 성을 수리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반드시 지킬 곳으로 삼는다면 삼남(三南)의 안전을 보장할 곳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왕에게 보고를 하였다는 철옹성에 내가 들어가는 거다.


차곡차곡 쌓은 산성의 돌담은 위협적이지 않다.

잔잔한 돌로 쌓은 낮은 성은 편안하게 적상산이라는 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조선왕조는 실제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이 철옹성에 보관하였다.

왕실족보를 기록한 선첩(旋牒), 조선실록을 담은 금궤(金櫃), 즉 사고본을 한양의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에 분산 보관했으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소실되었고,


전주의 사고본만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 선비가 이태조의 초상화와 사고본을 내장산 용굴암

바위굴에 숨겼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며,

전쟁이 끝나고 내장산 사고본은 묘향산으로 옮겨지고, 다시 5부로 늘려 한양 춘추관과

오대산, 태백산, 강화 마니산, 적상산으로 분산 보존하였다.


적상산의 비범한 산세는 예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이를 놓치지 않고 최영 장군은 자연요새를 활용하여 적상산성을 쌓았으니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최영 장군의 탁월한 안목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남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성은 길이가 8km에 이르며 독특한 산세로 인해

산성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분지에 많은 주민이 살았는데, 고려 때 거란이 침입했을 때

이곳에 사는 주민들만 참화를 면했다고 전해진다.


용담문이라고 하며 2층 3칸의 문루가 있었다는 적상산성 서문지에 나무 그림자가 정오가

지났다고 알려준다.


사적 제146호인 적상산성은 8,143m의 길이에 면적이 214,976㎡라니 약 6만 5천 평의

규모가 된다.


2015. 11. 26일 눈보라 속에서 완주 안수산을 등반한 기억이 난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안수산였는데 속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기에 잠시 두려움에 떤 후

나는 전라도의 산을 겉과 속이 다르다고 표현을 했다.


서창마을에서 바라본 적상산의 바짝 선 암벽을 보며 험하고 숨깨나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막상 산속으로 들어오니 산길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지그재그로 돌며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이니 숨도 헐떡이지 않고 오르는 거다.


겉으로 보기보다 수월한 산길이기에 무주 방면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통하여

물자를 산성으로 들여온 모양이다.


이건 무슨 새지?

요란한 새소리를 들으며 잠시 동적명상을 즐긴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의 맑은 기운을 받으며 명상을 즐기니 여긴 치유의 공간이다.

그냥 산길을 걸을 뿐인데 닫혔던 마음이 열리니 나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다.


산 아래 인간 세상엔 번잡함으로 그득한데 이곳엔 고요함이 가득하니 힐링의 공간을

마음껏 누리리다.


어제 비가 왔다.

이곳에도 비가 내렸기에 하늘을 씻고, 그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이 단풍에 녹아든다.

먼지 한 점 없는 단풍잎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다.


서문을 지나자 능선이 지척이다.

어느새 9부 능선을 올랐고 정상의 통신탑이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노랗고 빨갛게 물들던 나뭇잎이 빨리 찾아온 가을추위에 힘을 잃어 바짝 말랐다.


13;03

조금 편해진 길을 따라 숨을 고르며 오른다.

산길을 오르자 평지가 나타난다.

향로봉 삼거리는 첫 번째 봉우리에 해당한다.



산 정상부에는 겨울이 시작되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적상호의 푸른 물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할일을 다했으니 분주함도 없고 동물들도 월동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그릇은 비워야 음식이나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버리고 비우고, 비워야만 채울 수 있는 당무유용(當無有用)을 스스로 실천하는 자연의

위대함에 잠시 숙연해진다.


소리만으로도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는 곳,

물과 바람,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니 숲속의 교향곡이다.


신갈나무가 암(癌)으로 뒤틀리는 소리도 이 산에선 정겹다.


14;14

통신시설로 정상엔 오르지 못하기에 이곳이 실질적 정상인 기봉(1,034m)이다.

산허리의 단풍과 달리 정상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유명세를 치르는 산의 정상에 제대로 된 정상석이 없으니 다소

싱겁지만 정상석이 없기에 더 정감이 가는 정상에 잠시 서서 지친다리를 쉰다.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진 나목사이로 햇살이 마구 내려앉는다.

적상산은 지금 눈(雪)이 없으니 빛의 향연을 만들며 마음껏 즐기라고 하는 거다.



14;25

적상산의 아찔한 전망대인 안렴대(按簾臺)에 오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오늘밤 보름달이 뜨려니 이 가을밤에 안렴대에 걸터앉아 보름달을 보며 술잔을 드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옛날 거란이 쳐들어왔을 대 지방장관인 삼도 안렴사가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는데,

통신대를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안렴대는 적상산에서 최고의 조망을 자랑한다.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군은 날개를 편 봉황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백두대간이 날카로운 지느러미와 발톱을 갖고 여의주를 문 모습도 아닌 부드러운

덕유산의 꿈틀거림을 보는 거다.


안렴대에서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보며 느끼는 것은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이다.

여기선 햇살 한 줌도, 상괘한 공기의 한 조각도 넉넉하기에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며

큰 숨을 몰아쉰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이 없고 덩치 큰 산봉우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섰다.

거대한 덕유산의 덩치에 눌린 작은 산들이 엎드려 끝없이 펼쳐지고 간신히 보이는 도로에는

차들이 기어간다.


압도적인 조망권을 가진 안렴대는 천상천하의 절경을 볼 수 있는 특급전망대임을 뽐낸다.


안국사로 향하는 길은 고승(高僧)도 유혹을 느낄 만큼 황홀한 길이다.

이렇게 붉은 단풍 아래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면 그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4;41

고려 때 창건한 안국사는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영험이 깃든 보물 제1267호

'영산화괘불탱'이 있다고 하는데 양수발전소를 만들면서 호국사 터인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국사 청하루(淸霞樓)에 오르다가 공사를 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굴삭기를 피해

적상호로 내려간다.


원래 이곳은 호국사 터였다고 한다.

적상산 기봉과 향로봉을 잇는 능선의 오른쪽 넓은 분지는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샘이 마르지 않아 토질이 비옥했다.


산성사, 보경사, 상원사, 안국사 등 많은 사찰, 산성과 사고를 지키는 많은 승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양수발전소 상부댐 수몰지역에 있던 안국사가 여기로 이전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적 제146호로 지정되었다는 적상산성의 표지석이 외롭게 성곽을 지키고,

나무 사이로 덕유산 향적봉이 박무 속에 꿈틀거린다.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고 일필휘지로 쓴 안국사 일주문 앞에 선다.

고려 충렬왕 3년 월인화상(月印和尙)이 창건했다는 일주문의 기둥이 두 개인데

왜 일주문(一柱門)이라 할까,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있다는 뜻이며, 두 기둥 위에 다포계 맞배지붕을

하고 현판을 걸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하며 신성한 가람에 들어가기 전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사찰을 나서며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도 둘이 아니다라는 말을 곰씹는다. 




나무들이 나목(裸木)으로 서서히 비워가니 조만간 텅 빈숲이 되겠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침엽수는 어느새 활기를 잃어가고,

활엽수인 단풍나무는 몸을 활활 태우며 나목으로 비울 준비를 한다.


적상산 사고 골목길에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낙엽 떨어진 길 위에 서면 마음보다 몸이 몇 발짝씩 앞서가는 기분이 든다.  


15;06

적상산 상부댐 공사로 새로 축조된 적상산 사고에 도착한다.

사고는 조선조 광해군 4년(1612년)에 실록전이 창건된 후 1614년 설치되었다.


광해군 10년(1618년) 9월 평안도 묘향산의 조선왕조실록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으며, 인조 19년(1641년)에는 선원각과 군기고도 건립하였다.


사고 11간, 승장청 6간, 군기고 7간, 화약고 1간 외에 40간의 건물이 있었으며,

실록 824책, 선외원록 144책, 의궤 260책 등 총 5,514책이 보관되었다가 1910년 한일합방 후

규장각으로 옮기면서 사고가 폐쇄되었다는 자료를 읽는다.


문득 '배달의 민족'이라는 광고가 생각난다.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달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기록의 민족'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 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1,893권 888책으로 되어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으니 우리 민족은 

기록의 민족이다.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지붕은 맞배지붕, 팔작지붕,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 십자형지붕

등이 있는데 다포 맞배지붕의 양식을 채택한 사고(史庫)의 지붕을 바라본다. 


인적이 끊어진 사고의 담벼락아래 '개망초꽃'이 하늘거린다.


붉고 노란 단풍으로 지금까지 눈이 호사를 누렸는데 한적한 곳에서 '나라가 망할 때인

개화기에 들어온 꽃'이라 해서 개망초라는 이름을 얻은 하얀 꽃을 보는 재미도 괜찮다.


15;09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소인 적상호 상부댐은 최근에 가물었는지

군데군데 바닥이 드러났고, 호숫가를 삥 두른 단풍이 요염한 모습의 풍경을 만들었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모두 금강에 합수되어 군산 하굿둑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전기가 적게 사용되는 심야시간에 하부 저수지의 물을 퍼 올려 전기소비가 많은 시간에

7시간 발전을 하는 양수발전소는 저수용량 약 348만 톤으로 전라북도 지역 전체가 약 3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기량이라고 안내를 한다.


상부·하부 저수지간 낙차 589m를 이용하여 30만kw의 발전기 2대가 발전을 한다는데,

점봉산의 양수발전소와 호명산의 양수발전소가 생각난다.


점봉산 양수발전소에선 낙차가 819m이며 25만x4기가 9시간동안 100만kw를 생산하고

호명산 양수발전소는 732m의 낙차를 이용해 20만x2기로 40만kw를 생산한다.


예천 양수발전소는 484m의 낙차로 40만x2기가 80만kw를 생산하며,

청송양수발전소는 340m의 낙차로 30만x2기로 60만kw를 생산한다.


이밖에도 산청에선 392m의 낙차로 35만x2기로 70만kw를 생산하며,

삼랑진에선 345m의 낙차로 30만x2기로 60만kw를 생산한다는데,

적상호수를 보며 힘겹게 올랐던 호명산 상부저수지와 점봉산 양수발전소를 떠올린다.


호숫가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붉은 단풍 속에 몇 가닥의 억새를 보며 가을이 서서히 떠나려한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 내가 느낀 미학은 몇 개나 될까.

천천히 정상에 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왔으니 '느림의 미학'이며,

붉은 단풍 노란 단풍 속에 황홀감을 맛봤으니 '색의 미학'을 누린 거고,

지금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는 '바람의 미학'이다.


또한 총천연색으로 단장된 적상산의 단풍, 파란하늘 아래 푸른 물가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는 억새는 운치를 더해주는 '흔들림의 미학'이다.



호숫가에 드문드문 서서 흔들리는 억새는 쓸쓸한 풍광의 일부지만

하얀 이삭을 드러낸 억새는 초록을 유지하는 소나무와 멋진 조화를 이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파도가 일렁이는 억새가 있기에 가을은 더 매력이 있다. 

몇 그루의 억새는 가을을 타는 나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마구 흔들린다.


15;30

저녁 햇볕이 스며든다.

산행 일정을 끝내고 잠시 앉은 곳에 고요가 머무른다.


이런 고요속의 아름다움을 무엇이라 표현할까.

아주 먼 옛날 극장의 영화 광고 그림에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말을 썼다.

어쩌면 지금 나는 인생 영화의 한 장면을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발 893m에 바람을 타고 물소리 날아온다. 


삶에서 모든 건 순간이다.

인생과 자연의 시간이라, 자연에서 인간의 시간은 순간이다.

자연에선 시간이라는 세월이 쌓이고 사람의 인생에서는 삶의 찌꺼기가 쌓인다.



호수가에 한가롭던 기러기 떼가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일제히 허공으로 오른다.

다시 길게 대형을 이루더니 하늘을 가로 질러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미 사라져 쇠기러기인지 큰기러기인지 분간은 되지 않지만,

내년 3월까지는 이곳에서 월동을 하려니, 혹한(酷寒)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19;00

어둠이 깔린다.

세상의 빛이 사라지고 하늘엔 달이 빛난다.

보름달이 떴고 별이 밤하늘에 수를 놓는다.

별을 세다가 목이 아파 포기를 한다.


수천 수억 광년을 날아와 내 눈에 와닿는 별빛은 내가 저 먼 은하계의 존재와

연결되어있는지도 모르기에 별빛을 받아들이며 묘한 상상을 한다.


2018.  10.  25.  07;00

덕유산 휴양림 산자락을 오른다.

산은 작은 울음소리를 내고, 미역취 노란 꽃이 무서리를 맞았다.


구절초도 서리를 맞았다.

달력을 보니 어제가 상강(霜降)이었구나.


숲속에 서있는 나무들, 숲의 공간을 기던 넝쿨들뿐만 아니라 싱싱했던 풀잎들 모두가

시들어간다.

식물들의 한해살이는 이렇게 그쳐가는구나.


사진을 찍다 보는 이 없는 것 같아 구절초를 피해 오줌 줄기를 쏟아낸다.

이렇게 손 시린 아침이면 소변량이 많아지고 자주 보는 것은 자연스런 노화현상이겠지.


08;40

무주구천동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황금빛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노란은행잎이 빨간 단풍과 뒤섞여 휘날리며 색의 미학을 뽐낸다.


여기에선 내가 어디에다 행복의 기준을 맞춰야할까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순간이야말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08;52

작은 폭포에 물이 떨어진다.

물소리에 이어 기러기 끼륵거리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린다.

황홀한 단풍을 보며 잠시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는지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되어

잠시 나를 잊었다.


이름이 멋진 월하탄 앞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월하탄(月下灘)이라, 선녀들이 달빛아래 춤을 추며 내려오듯 두 줄기 폭포수가 기암을 타고

쏟아져 내려 푸른 담소를 이뤄 아름다운 월하탄은 구천동 33경 중  제 15경이다.


물소리 가득한 산길에 계곡물은 흐르다 소(沼)를 만들었고 소를 넘친 물은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웅장한 물소리를 내기에는 어림없지만 물소리를 들으려 온 게 아니기에 그냥 내발걸음

소리와 합쳐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걷는다.


단아한 구천동어사길이 나온다.

경관에 마음을 뺏기며 무념의 걸음을 걸을 수 있어 나 자신을 보기에 알맞은 숲길이다.


마음이 달아난 자리에 또 다른 잡념이 들어온다.

마음을 붙들지 못했으니 잡념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우리나라 공직자 중 청렴의 상징인 '암행어사 박문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인물, 늘 민초들의 편에 섰고, 악덕 위정자와 가진 자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청렴을 실천한 암행어사 박문수는 백성들에게 영웅이었다.


암행어사로서 영조시대의 박문수, 정조시대 정약용, 고종시대 맹활약한 이건창 등은

공직자의 표상인데 요즘엔 그런 큰 인물은 볼 수가 없고 좌파 종북주의자들이 전 요직을

장악했고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들만 중요시하는 소인배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다.


09;30

풍경의 한조각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음은 또 하나의 욕심인지 모르지만

여행이란 선물상자를 받은 지금은 단풍아래에서 멈추고 싶은 순간이다.


이 글을 정리하는 중 배낭을 전철에 두고 내려 잃었다는 친구의 연락이 온다.

술을 너무 좋아해 늘 걱정이 되는데 배낭을 잃었으니 앞으로 조심하리라 생각하면서

알콜 중독이 될까 염려가 된다.


알콜 중독 증세로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폭음을 하며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감마유형'이 있고,

술에 대한 조절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매일 술을 먹는 '델타유형'이 있는데

젊음이 사라진 나이니 서로 조심해야겠다.


                                                2018.  10.  24~25. 적상산을 다녀와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