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386 떡비

김흥만 2018. 11. 4. 11:55


2018.  10. 28.

떡비가 가을 세상을 촉촉하게 적신다.

머리카락이나 겨우 적신다는 예보를 믿었다가 다시 들어가 우산을 꺼낸다.


우산을 펴고 숲속으로 들어서니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풀숲으로 사라진다.

사람들은 가을걷이가 끝나고 비가 오면 떡을 해먹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기에

가을비를 '떡비'라 불렀다.


여기저기서 딱딱거리며 도토리와 밤이 떨어지고 우산 위에도 떨어진다.

숲속을 하얗게 수놓던 넓은잎쥐오줌풀 꽃은 잔뜩 시들었고, 붉은서나물 백발에도

빗물이 스며든다.


10.31

며칠 전 가을비가 촉촉이 내렸기에 향교의 은행나무 잎도 다 떨어졌을까 궁금하여

향교로 발걸음을 향한다.

무서리 내린 향교는 고요 속에 잠긴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600년이 넘은 모(母) 은행나무는 아직도 초록 잎을 떨구지 않았고,

480~510년 된 자(子) 은행나무에선 황금 잎이 떨어져 땅바닥에 황금을 깔기 시작한다.


강쇠바람도 건들바람도 없는 가을아침,

무서리 덮어쓴 은행잎을 밟다가 비명소리가 나 나무밑에서 벗어난다.


땅바닥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은 마음을 흔드는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만추(晩秋)가 아닌 만추(滿秋)에 선 은행나무는 황금 잎을 뿌리며 '황금의 미학'을

자랑하고, 객산(客山) 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빛나는 또 하나의 호수이다.


황금빛과 파란하늘의 조합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아침,

완전히 여문 노란단풍이 하늘빛에 머무는 은행나무 밑에서 서성이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향교를 향해 걷는다.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은 게 잘못인지, 녹은 무서리는 내 운동화를 적시고

양말까지 젖게 한다.


누군가 마당이라도 쓸고 있을까 향교 담벼락 안을 들여다본다.

댕기머리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향교의 적막은 가을아침을 더 스산하게 한다.



가을이 안 오는 줄 알았다.

100여 년만의 기록적인 폭염과 열대야, 그리고 태풍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은 폭염이 드세 염제(炎帝)라 불렀는데, 세월 앞에 장사가 없는지 어느새 찬바람이

부니 세월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자연과 사람은 제행무상(際行無常)이다.

여름이 제아무리 맹위를 떨쳤어도 봄~여름~가을~겨울 순서로 사계절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다.


가을은 인생의 황혼기라 지는 세월이다.

나무 또한 가을이 되면 황금기를 지나 낙엽이 다 떨어지고 또 다른 계절이 시작된다.


은행잎 한 잎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시인들이 말하는 일엽지추(一葉知秋)를 보며 세월무상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직 된서리 내리지 않았으니 지금은 황금색의 향연을 즐기지만, 이 잎이 다 떨어지면

겨울이 시작되겠지.

지독했던 폭염의 여름이 가고 이 겨울엔 얼마나 센 혹한(酷寒)이 찾아오려나.

술비 내리고 눈(雪)이 산천에 수북이 쌓이는 날 다시 찾겠다며 발걸음을 돌린다.


                                                            2018.  10.  3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