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3.
난 겨울이 좋다.
30대에는 설렘을 안고 연두색 새싹들이 대지를 뚫고 나오는 봄이 좋았고,
40대까지는 단풍 물든 가을이 좋았다.
50대가 되면서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은 왠지 쓸쓸하기에 겨울이 더 좋아지니
나이에 따라서 계절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세상을 살다보면 그냥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설렘이 있는 삶이 좋다.
이 세상에 설레는 것처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여행과 산행이란 설렘이 있어 좋은데 설렘의 대상이 지리산이라면 더 좋다.
11;54
참 지독한 미세먼지가 지리산까지 몰려왔다.
수치상으로 매우 나쁜 단계라 하니 마음이 괜히 심란하다.
덕두산(1,150m)~바래봉(1,165m)~팔랑치~부운치~세동치~세걸산(1,216m)~정령치~
만복대(1,438m)로 이어지는 덕두능선이 검은 구름을 품으려 꿈틀댄다.
어느 산에 가면 겨울 정취를 맛볼 수 있을까.
지리산에 와도 세상은 온통 뿌옇고 안개와 섞인 미세먼지 냄새는 매캐하다.
2016년 11월 24일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후 지리산을 나의 산행 버킷 리스트에서
지웠건만, 천왕봉은 아니지만 또다시 지리산에 왔으니 내 마음 속에 든 지리산에 대한
연모(戀慕)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지리산 바래봉은 원래 철쭉 산행지로 소문이 났다.
얼마 전 산행지를 고르다 눈꽃과 상고대가 대단하다는 글을 읽고 바래봉으로 결정을 했는데
여기도 눈은커녕 산도 계곡도 다 메말랐다.
지리산까지 내려오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말라버린 산과 강으로 한숨이 나왔지.
멀쩡한 원전(原電)을 세우고 미세먼지가 대량 발생하는 화력발전을 돌리는 탓에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심각한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
참 지독한 겨울가뭄이다.
거의 두 달간 비는커녕 눈도 보지 못했다.
오름길엔 찬바람을 타고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산은 바짝 마른 흙먼지를 날리고 나무 사이로 황토 빛 속살을 그대로 드러냈다.
멋진 눈꽃 산행은 기대하기 힘들고 능선은 굽이굽이 헐벗은 모습을 보여준다.
지리산에 오면 눈꽃과 상고대를 볼 수 있을지 몰라 새벽부터 서둘렀는데 막상 산속으로
들어서며 실망부터 나온다.
12;23
운지사 삼거리에 세운 해충 퇴치기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산에서 해충(害蟲)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람들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충(害蟲)과 익충(益蟲)을 분류하는 오만과 편견을 가졌다.
자연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에 해충은 없다.
사람이 싫어해 해충으로 분류하는 모기도 조류(鳥類)나 파충류에겐 유익한 먹이라 익충이
아닌가.
쓸데없이 많은 예산을 들여 세운 해충 퇴치기를 보며 헛웃음이 나오는 건 나만의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남원 운봉읍이 미세먼지로 잠겼다.
1990년대까지 1만 2,000명이던 인구가 현재는 4,300여 명이고 그 절반이 노인이라는데,
철쭉군락지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송림(松林)이 아픔을 말해준다.
이 산엔 철쭉나무가 얼마나 될까,
붉은 철쭉이 필 무렵 다시 찾아야겠다.
문득 옥돌봉의 562년이 넘은 철쭉, 가지산의 천연기념물로 460년이 넘은 철쭉이 떠오른다.
철쭉은 진달래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꽃엔 애벌레로부터 꽃을 방어하기 위한 '드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물질이 나오는데
접촉만으로도 피부염이 생길 수 있다.
진달래꽃은 먹어도 탈이 없는데 철쭉꽃을 먹으면 심한 배탈과 구토를 하게 된다.
산에서 겨울이라는 시간은 끝남이 아니다.
한동안 이어진 따뜻한 겨울날씨에 봄을 준비하느라 철쭉엔 꽃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를 오른다.
매년 5월이면 개화기 동안 20만 명 이상의 탐방객이 찾는 바래봉 철쭉 군락지는 1970년대
호주에서 들여온 양떼가 수십 년 동안 산지를 훼손한 결과라고 한다.
양들은 워낙 영리해 독이 있는 철쭉꽃을 먹지 않기에 철쭉만 살아남았다고 전문가들은
정리를 하는데 양떼가 사라진 뒤에도 산철쭉의 쇠퇴현상이 두드러졌다니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눈이 언제 오려나,
작년 11월 24일 서울에는 8.8cm의 눈 폭탄이 뿌려졌고 이후 두달간 전국의 눈 소식이 없다.
올겨울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 극심한
겨울가뭄으로 산야(山野)가 신음하고, 롱 패딩을 많이 만든 의류업자들은 망하기 직전이다.
겨울철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흉년이 들 것에 대비해서 지난 가을 도토리가 대풍(大豊)이었던 모양이다.
눈이 내리기 위한 최적의 조건은 삼한사온의 7일 주기라는데,
요즘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면서 '삼한사미'라는 용어도 생겼다.
실제로 12~14일 주기가 반복되어 눈이 오지 않는 것이라고 관계당국에서 설명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사대강에 보를 만들어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물을 가뒀는데도
4대강 반대론자 및 환경단체에 밀린 무능한 정부는 사대강 보에 저장한 귀한 물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봄 농사, 여름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할지 농민들과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는데,
정부관계자와 환경단체는 강을 살린다며 보(洑)를 철거해야 된다고 고집을 피운다.
이들이 저지르는 죄업으로 국민들은 얼마나 힘들고 자연은 어떻게 감당할까.
미세먼지의 공습에 이은 겨울 가뭄 속에 며칠 전 내린 눈이 산길에 살짝 쌓였다.
시인 두보는 '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를 춘야희우(春夜喜雨)라 하며
"좋은 비 시절 알아, 봄을 맞아 내리누나. 바람 따라 밤에 들어 소리 없이 적시네.~~라고
노래했다.
오늘밤이라도 눈이 내리면 나또한 동야희설(冬夜喜雪)을 노래할 텐데,
존경받는 대통령이나 지도자가 없으니 태종우(太宗雨)나 어사우(御使雨)가 내리겠는가.
드라마에서 태종이 머리 헤쳐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비를 빌던 장면이 떠오름은 나만의
미망(迷妄)인지도 모르겠다.
12;44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산에도 눈은 길바닥에 조금만 남았고 산길엔 쓸쓸한 바람만
불어댄다.
눈길 가장자리 일부구간은 산딸기나무와 미역줄나무가 철쭉나무를 못살게 굴어 밀어냈다.
용산주차장에서 바래봉 정상까지 4.8km로 안내되었고, 어느 지도에서는 1시간 반이면
정상에 오른다 했는데 과연 맞으려나.
일상을 접고 바래봉에 오르는 산행은 이 거대한 우주에 오직 우리만 오르니 황제산행인가.
나는 지금 평행선이 사라지는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을 향해 올라간다.
눈이 끝나는 지점을 지나면 경계가 사라질까.
어쩌면 저 길이 끝나도 또 다른 길이 나오기에 소실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한원점(無限遠點)일 수도 있겠다.
13;51
왼발에 찬 아이젠이 돌아가 똑바로 잡으려하자 끈이 끊어진다.
6년 넘게 사용한 아이젠의 고무줄이 오래되어 삭은 모양인데 탄력을 체크하지 못한
내가 잘못이다.
난감하다.
내 산행실력으론 아이젠이 없으면 오름길이야 오르겠지만 하산길이 걱정이다.
배낭에 있는 주머니 끈을 잘라서 구멍에 끼면 가능할 텐데, 끈을 자를 비상용 칼이 없으니
걱정이 된다.
고개를 숙여 산길에 철사나 끈이 떨어져 있을까,
다른 사람이 아이젠을 흘리지 않았을까 두리번거려도 바닥엔 흰눈뿐이다.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세상이 차가워질수록 산의 속살은 또렷이 보이고 굽이진 인생길과도 같은 산길이 이어진다.
시간의 흐름을 막고 시린 바람을 안고 오른다.
14;16
구상나무 사이로 바래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을 200m 앞두고 푸른 잎이 그대로 남아있는 구상나무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제대로 된 설경도 아니고 낙엽도 없는 앙상한 계절에 산은 오히려 홀딱 벗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보여준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는 바래봉,
둥그스름하고 순한 산릉에 거센 바람이 불어댄다.
방한모를 뚫은 된바람은 귀신의 비명이 되어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한다.
계단을 하나 둘씩 세다가 포기한다.
평생을 숫자 속에 살다가 은퇴하였으니 이젠 숫자에 매겨지는 인생이 싫다.
바람이 미세먼지를 몰아내고 드러난 파란하늘은 무변(無邊)이다.
장대한 하늘과 두리뭉실한 바래봉 정상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구름이 몰려온다.
첩첩산중이라 산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신(神)과 함께 정상에 오르는 거다.
능선이 첩첩으로 쌓여진 곳을 벗어나니 바래봉 정상이 홀로 서있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신과 함께 머물러야겠다.
1968년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방문한 후 농가소득을 올리고자
면양시범농장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바래봉에서 5월부터 10월말까지 가축몰이 개가 3,000~4,000마리의 양떼를 이끄는 방목을
하였는데 양들이 다른 풀이나 나무는 모조리 뜯어먹었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은 먹지 않아
홀로 살아남았고 양들에 의해 바래봉 일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국립공원에서는 10만 그루의 철쭉을 심는다는데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주왕산 상의계곡과 소백산 연화봉, 지리산 노고단의 철쭉이 그립다.
아쉽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 전체가 파노라마가 되어 전개되고 굽이치는
암봉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지리산의 신은 끝내 나에게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산 정상에서 구름에 쌓인 산 능선을 바라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며 쌓였던 삶의 찌꺼기를 저 아래로 던져야겠다.
이수광은 지붕유설에서 병을 물리치는 각병팔법(却病八法)을 말한다.
첫째, 고요히 앉아 허공을 보면 생사시비와 이해득실이 모두 망령되어 참이 아니라 하기에
꿈틀거리는 능선 위 허공(虛空)을 바라본다.
둘째, 번뇌가 생기면 통쾌한 일을 찾아서 툭 놓아버리라는데 바래봉 정상에 올랐으니
참으로 통쾌한 일이 아닌가.
셋째, 위쪽만 보면 답이 없다, 나만 못한 처지를 생각하는 여유를 지녀라 하는데,
이미 산 정상에 도달했으니 위쪽을 볼 이유가 없어 마음이 편하다.
넷째, 조물주는 나를 힘들게 해서 살린다.
병을 만나 한가롭게 지내면 도리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이 생기는 법이라,
엎어진 김에 쉬어가고 병을 원수가 아닌 벗으로 삼으라고 하는데 영락없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섯째, 날마다 대나무와 바위, 물고기와 새를 친구 삼아 언제나 초탈하여 자득하라는데,
여기까지 오르면서 조릿대와 바위, 구상나무, 소나무, 철쭉을 벗 삼아 올랐으니
여유와 생기가 생기는구나.
여섯째, 추운 계절에는 바람을 조심하고 음식과 기욕(嗜慾)은 담박하게, 생각과 염려는
줄이라는데, 겨울바람을 의식해 방한모자를 쓰고 찬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으며 생각을
적게 하였으니 몸에 쾌적함이 유지된다.
일곱째, 좋은 벗과 친한 친구와 마음을 활짝 열어 세속을 벗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찌꺼기를 걷어냈으니 병(病)에 대해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여덟째, 병을 괴로워 말고 죽음을 근심치도 말라하는데,
이미 웰 다잉(well dying)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했으니 마음이 느긋하고 평안하다.
바래봉을 오르며 각병팔법을 제대로 이행하였으니 내몸의 병도 사라지고 양생하여
수명이 늘겠다는 생각이 든다.
14;36
아이젠을 한쪽만 차면 몸의 균형이 깨져 오히려 위험하다.
줄이 끊어진 아이젠을 친구가 고쳐주니 마음이 편하다.
정상은 시간이 고인 곳이다.
영원과 순간의 사이에 선 나,
지나간 시간이 채워진 곳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인생에서 아끼지 말아야 할 거는 꿈이다.
이제껏 치열한 도전을 했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이 순간이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팔랑치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 철쭉이 무리지어 있다.
약 1,5km구간에 펼쳐지는 철쭉꽃은 바래봉의 백미라는데 계절이 맞지 않으니 아쉽다.
모자를 벗은 친구의 흰머리가 보인다.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흰머리와 주름살 등 노화의 증거가 나날이 생기는 건 슬픈 일이다.
사실 늙음을 인정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나이 드는 것도 성장과정의 일부라 노년이어서 생기는 장점도 많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생겼던 스트레스에 대응하고 회복 탄력성이 커지기에
노화에 부정적이며 변화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어느 전문가는 긍정적인 이들의 생존율이 7.7년 더 길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15;46
딸기, 노린재나무, 고광나무, 조팝나무, 병꽃나무, 조록싸리나무가 산철쭉나무를 밀어내고
참나무 종류인 신갈나무도 여기저기 눈에 뛴다.
목양이 이룬 대규모 산철쭉 군락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는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철쭉나무 군락지가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산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16;30
미세먼지가 사라진 덕두능선과 바래봉은 파랗게 빛나고,
당초 예정 시간인 세 시간을 훌쩍 넘겨 네 시간 만에 산행을 끝낸다.
21;00 해발 680m
잠시 숙소 문을 열고 나와 밤하늘을 은은히 밝히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비스러운
기분이 든다.
보름이 이틀이나 지났건만 달빛은 화광처럼 빛나고 문득 '클로드 드뷔시'의 피아노 곡인
'달빛'이 떠오른다.
금세라도 베토벤이 나타나 피아노로 월광 소나타를 연주할만한 분위기는 환상적이다.
22;00
빈 술병은 방모서리로 밀려난다.
약 6km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소주 세 병도 금세 동이 난다.
< 달빛
시간은 멈추고
방구석으로 밀려난 빈 술병
이병 저병 쌓이는구나.
달빛 서슬 시퍼런데
나그네 마음 누가 잡을까.
저 달빛 잡으면 내님도 잡으려나.
이 시간이 지나면
휑한 내 가슴속에
달빛은 머무르지 않고
서산 너머로 사라지겠지.
달빛아 사라져라,
내 청춘 돌아오면
너를 무한 사랑하리라. 석천 >
소쩍새도 부엉이도 사라진 지리산 산속의 밤은 달빛아래 깊어만 간다.
2019. 1. 23. 지리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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