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426 내 곁에 있는 부처(서산 마애삼존불상과 해미읍성)

김흥만 2019. 3. 3. 19:42


2019.  2.  28

오늘은 어떤 기쁨이 나를 찾아오려나.

백제의 미소라는 '마애삼존불상'을 보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며칠 전 2월 어느 날 단골 당구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장이 말한 게 생각난다.


"사무실을 없앴으니 나오는 시간도 늦어졌고, 비우니까 속이 편하시지요?"

뜬금없이 들리는 소리가 내 머리를 때린다.


고승(高僧)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뜻밖에도 스님이나 철학자도 아닌 당구장

사장에게서 비우면 편하다는 이야기를 듣다니,

이 사람도 일면스님의 글 중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는 방하착(放下着)을 읽었을까.


09;30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마애삼존불상이 나온다.

불이문이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도 둘이 아니요,

선(善)과 악(惡), 깨끗함과 더러움도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둘이 아니고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다르지 않다?

성(聖)과 속(俗)도 다르지 않다는 건데 화엄사상의 근본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는 연기론(緣起論)이다.

연기는 불이사상에 깔려 있는 불교의 근본사상이라 나는 불교에 문외한이니 이해하기

참 어렵다.


그냥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 된다고 간단히 해석을 하면 좋으련만

어렵게 의미를 부여 한다.


법정스님의 글 중에

"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이 내려다본다.

부처는 절에 없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면 천지에 널려 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 못하고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 하는가" 까지 내가 기억을 한다.


김 사장을 보며 내 곁에도 깨달음을 주는 부처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비우면 편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껏 모르고 살았으니 내가 헛살았다.


비우라는 말 한마디에 떨림이 오니 내가 그동안 매사에 집착을 한 모양이다.

늘 산에 다니며 비운다 비운다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마음속엔 온갖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구나.


진즉에 비웠으면 조금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사내는 갈곳이 있어야 한다는

욕심 하나로 십년세월을 넘게 끌고 왔던 사무실이었지.


사람마음은 참 간사하다.

사무실을 비운 후 일주일은 무언가 허전하고 마음이 휑하였는데 열흘이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마음이 편하다.


이젠 한 시간 늦게 나가는 거도 오히려 좋다.

늦게 나가면 버스정류장이 한적해서 좋고 텅 빈 버스에 앉아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사색을 하다 졸음이 오면 조는 것도 좋다.

햇볕은 따사하고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좋다.


오늘 여행을 마치고 올라가면 무엇을 비울 것인가.

며칠 전 겨우내 신지 않았던 신발을 버렸으니 이번엔 겨우내 입지 않았던 겨울옷을

정리해 버리면 누군가 또 입겠지.

사무실에서 가져다 쌓아놓은 잡동사니도 버려야겠다.


가을이 비움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채움의 준비 계절이다.

봄은 채움이 계절인데 나는 거꾸로 이 봄을 비움의 계절로 착각을 하니 때로는

착각을 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


햇살이 지금 어디쯤 왔을까.

햇살이 마애불을 비추면 부처의 또 다른 미소가 보일 텐데,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지옥이다.

죽어서 천당 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살아라는 법정스님과 비슷한 설법을

듣고 싶은데, 무심한 스님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연신 합격과 취업을 반복해서

염불을 한다.


수년 전 덕숭산에 올랐다가 홀딱 반해 다시 찾은 삼존마애불의 미소는 변함이 없다.

국보 제84호 높이 2.8m의 삼존마애불,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흐르는 미소는 '백제의 미소'로도 불린다.


보는 방향에 따라, 해가 비치는 시간에 따라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온화해 보이는

부처의 얼굴은 신비롭다.


10;10

한 시간을 달려와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에 도착한다.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여 태종 때부터 세종 3년까지 축성된 해미읍성엔 한때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2014년 8월 17일 지금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문하였던 해미읍성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약3천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당한 천주교 순교 성지 중의 하나이다.


천주교 박해 당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1866년 박해 때에는 1천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하는 해미읍성 진남문 앞에 선다.


화포, 충차 등을 보며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했던 현장을 향해 걷는다.


조선이 명(明)나라를 섬기고 성리학을 신봉할 때 일본은 세계를 만났다.

천주교가 이 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다.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풍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파를 하였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역설적이지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인정하고, 유일신을 고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민초들에게 스며들었어도 천주교가 박해를 당했을까.


이 당시 조선이 쇄국정책을  쓰고 발달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을 하고 죽이던 회화나무 노거수가 하늘을 향해 신음한다.


수령 300년 이상으로 기념물 제172호인 회화나무에는 1790~1880년대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다고 하는데 철사 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 또는 귀신을 쫓는 나무라 하여 상서로운 나무인데

어쩌다 이 나무는 사람을 매달고 죽이는 살인(殺人)나무가 되었던가,

억울하게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 회화나무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처절한 통곡을 한다.



인생이란 바람 따라 물 흐르듯 살면 된다.


막한 일상에서 여행은 삶의 질을 높여주기에 이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다음엔 어디로 떠날지 벌써 마음이 설레니 역마살(驛馬煞)이 껴도 단단히 끼었구나.

 

                                                            2019.  2.  28. 해미읍성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