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19. 09;00
그칠 줄 알았던 비가 계속 내린다.
기상청에선 분명히 오전 중에 그친다고 했는데, 용띠가 7명이나 되니 하늘이 계속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차라리 천화대에 올라가 저 먹구름을 타고 승천해버릴까?
9시에 한계령에 도착하지만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린다.
강풍으로 몸이 흔들리며 구름이 주위를 가려 조망도 안 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손이 시리다.
설악산 서북능선을 타기로 하고, 귀때기청 삼거리를 향해 45도에 가까운 급경사 계단을 오른다.
빗줄기가 조금 더 세져 복장과 짐을 정리한다.
매표소를 지나 너덜 길을 올라서니 가파른 계단이 처음부터 질리게 한다.
겨우 500m 올라왔는데 힘은 들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이 시려 카메라 셔터가 잘 눌러지지 않는다.
종주 첫 날의 목표는 중청대피소까지 7.7km로 약 6시간 정도 예정이다,
여기 설악산은 서울 근교산과 꽃의 개화나 잎이 나오는 시기가 약 한 달 정도 차이가 진다.
철쭉도 이제 피며 계절에 맞추지 못한 진달래가 꽃이 다 떨어진 후에 잎이 나오는 순리를
무시하고 잎과 꽃이 동시에 핀다.
개회나무 꽃인지 남정목의 꽃인지 빗속에 활짝 피었는데 잘 구분이 안간다.
현재 고도 1,200m, 태풍 '루사, 매미' 때의 피해 흔적이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처참하다.
급사면은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깎여 나갔고, 심하게 패인 구간에는 데크시설이 들어 서있다.
몇 년 사이 해마다 반복되는 집중폭우와 태풍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대청봉은
더 심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가진 설악이 언제나 치유 되려나 안타깝다.
너무 추워 동굴에서 잠시 휴식을 한다.
이 근처에 목마른 산객들의 갈증을 달래주던 샘이 있었는데, 태풍 '매미'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40
출발한지 1시간 40분만에 귀때기청봉 삼거리에 도착하지만
조망은 전혀 되지 않고, 강한 비바람 속에 잠시의 휴식도 없이 진행한다.
삼각뿔 모양의 귀때기청봉(1577.6m)과 동해바다, 점봉산, 공룡능선, 용아능선은 구름 속에
잠기고 강풍 속에 비만 뿌려댄다.
2박 3일의 옷과 행동 간식, 2리터의 물을 담았으니 배낭이 몹시 무겁다.
군대시절 완전군장 이후 제일 무겁게 매었다.
봉길이 회장은 친구들 식량과 소주 등을 많이 담아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엔 아무리 짐이 많아도 불평기색이 없었는데, 오늘은 힘든 모양이다.
다들 20~30리터인데 혼자서만 65리터를 짊어졌으니 많이 힘들겠지.
개별꽃이 활짝 피어 나를 반긴다.
들별꽃, 또는 태자삼(太子參)이라고도 하며, 섬 지방을 뺀 전국의 산지 숲 속 그늘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끝청 4.2km, 대청까지 6km를 더 운행해야 한다.
등산로에 멋진 주목나무가 서있다.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다.
태백산 도립공원이나 소백산 국립공원에서는 관리번호까지 부여하여 철저히 관리하는데,
관리소 측에서 주목나무 관리를 자신하는 건지 이곳 설악산은 그냥 방치되어있다.
1.400고지에 '측백나무'도 보이고,
5.1km를 왔으니, 아직도 2.6km 남았다.
추위를 타는 몇몇은 앞서 나가 나와 거리를 벌린다.
신발과 바지에 진흙이 묻어 장난 아니다.
매우 위험한 코스에 준비도 엉성한 할머니 둘이서 길을 헤맨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안내자도 없고 여러 사람 힘들게 할 분위기인데 다행히 같은 방향의 남자들이
온다.
'얼레지'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한다.
작년에는 땅나리, 하늘나리, 말나리, 원추리 등이 지천이었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는다.
'끝청'이다.
비바람이 세차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다.
좌우로 용아능과 공룡능, 점봉산 등 고산준봉들이 함께 펼쳐지는 산악미를 보지 못하고,
급히 '중청'으로 향한다.
바지도 많이 젖었고 모자는 빗물의 무게에 차양이 내려앉아 시야를 가린다.
중청까지 1.8km 남았다.
앞도 잘 안보이고 세찬 비바람에 몸이 날아갈 거 같다.
초속 30m가 넘는 태풍 급 바람에 온몸이 젖고 손이 시려 얼얼하다.
15;10
드디어 중청대피소.
지금 시각 세시 약간 넘었으니 쉬지도 못하고 올라와 작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단축이 되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한 봉길 회장이 돼지고기와 홍어무침으로 술상을 봐났다.
오늘 소주는 300cc 16병이다.
1인당 두 병씩이나 되는 양이다.
에고! 저걸 다 짊어지고 왔으니 허긴 다들 주당들이라 많은 양은 아니다.
처음엔 많다고 투덜대던 친구들도 젖은 몸에 한잔하니 기분들이 풀린다.
바람소리가 귀신 울음소리로 들리며 대피소 창문이 떨어져 나갈 기세다.
18;00
오후 여섯시.
어느새 비는 그치고 파란하늘아래 '대청봉'이 늠름하게 서있다.
강풍으로 지금 올라가면 매우 위험하다.
속초시내, 공룡, 용아능선 다 조망이 되는데, 여름복장으론 추워서 밖에 있을 수 없다.
대피소 안에 들어가니 의외로 등산객이 많고, 말리는 옷가지들이 난민수용소나 다름없다.
씻지 못한 냄새, 음식물 냄새, 젖은 옷과 땀 냄새 속에
어둠의 깊은 침묵은 세상의 모든 숨소리까지 빨아들이고 어느새 잠이 든다.
5. 20. 04;00
새벽 네 시.
강풍으로 몸은 흔들리고 달빛 아래 대청봉의 모습이 처연하다.
새벽 5시.
설악은 바람과 함께 깨어났다.
세찬 바람에 대청봉은 포기하고, 희운각 대피소로 하산한다.
얼음이 얼고 귀와 손이 몹시 시리다.
5월 중순에 강풍으로 얼음이 얼었으니 영하 5도는 되리라.
소청으로 운해가 피어오르며 진달래, 철쭉이 바람에 흔들린다.
거무튀튀한 해무가 수평선 따라 두텁게 깔린 채 붉은 띠에서 좀처럼 솟구치지 못하더니,
화채능선 위로 해가 솟구친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이여 소원성취 하소서!
소청 희운각 삼거리 전망대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다.
[ 선인
동(東)에는 망망대해(茫茫大海)요
서(西)로는 무변운해(無邊雲海)로다.
남(南)으로는 기암절벽(奇巖絶壁壁)이요.
북(北)으로는 울울창창(蔚鬱昌蒼)숲이니
구름 위 나의 모습 선인(仙人)임이 분명하다. 석천 흥만 ]
날이 밝아오니,
공룡능의 나한봉과 범봉, 가야동의 깊은 골짜기, 일천부처가 기지개를 펴는 '천불동'의 기암괴석,
천화대의 암릉, 칠형제봉의 암릉, 화채봉으로 이어지는 망경대 능선 등 수많은 암릉과 암봉들이
하늘을 찌르는 기세이다.
장엄하고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순간 난 오르가즘을 느낀다.
무엇이라 표현할 것인가 차라리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바라보자.
희운각 방향은 급경사 하산로라 주위에 자작나무, 물박달, 거제수나무, 구상나무 등이 지천이다.
워낙 고산지대라 소나무는 보이지 않고 '눈잣나무'가 드물게 보인다.
너덜지대로 내려서다 왼쪽 무릎이 꺾어지며 자지러진다.
다행히 다치진 않아 서둘러 무릎보호대를 찬다.
조깅에서 워킹으로 바꾼 후 무릎이 별로 아프지 않아 잠시 방심을 하였더니 금방 표시가 난다.
드디어 희운각이다.
아침은 라면이고 산장 관리인에게 부탁하니 고맙게도 선뜻 자기 도시락 김치를 나눠준다.
여기서부터 공룡~비선대 구간은 8.6km에 7시간 반이 걸리며,
천불동~양폭~비선대 구간은 6.4km에 5시간이 걸린다.
멀리 죽음의 계곡 위로 대청봉이 보인다.
희운(喜雲) 선생이 죽음의 계곡에서 동계훈련 시 죽은 이들을 기리며 이곳에 대피소가 있었더라면
아까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사재를 털어 희운각을 지었다 하니 그 숭고한
정신에 고개를 숙인다.
무너미 고개이다.
계속 강풍이라 공룡능선이 위험할 텐데,
공룡 팀 종승, 재영, 문성과 천불동 팀 봉길, 태영, 덕근이 비선대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뒤로 신선대 암릉이 우뚝 서있다.
신선대 뒤로 1,275봉과 범봉이 날카롭게 솟구치고, 마등령이 듬직하게 솟아올라 장쾌하고 장대한
공룡능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천불동 계곡을 택한다.
머리 수술 후 균형추가 약간 무너져 암릉을 탈 때 중심이 무너지면 매우 위험하기에 공룡능선을
타지 못하는 아쉬움에 능선을 바라본다.
천불동은 대청에서 비선대까지 약 8km의 중심계곡으로, 와선대, 비선대, 양폭, 천당폭 등
멋있는 절경이 있다.
계곡의 양쪽 봉우리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의 1000여 개의 불상과 같아 천불동이라 한다.
공룡능선과 천화대, 용아장성, 화채능선을 한군데 모아놓은 모습의 경승지이며,
지리산의 칠선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손꼽히는 계곡이다.
에구~추워라!
그래도 얼음물같이 찬 계류에서 진흙투성이 바지를 빨아야겠지.
1.11km 오니 양폭까지 0.9km 남고, 비선대까지는 4.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저 기암절벽을 보라!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이름 붙이는 것이 오히려 유치하리라.
참 기막힌 협곡이다.
'천당폭포'이다.
천불동 계곡의 마지막 폭포로 예전에는 아주 험준하여 일반인은 접근이 거의 힘들었고,
속세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가 이곳에 오면 마치 천당에 온 거 같다고 해서 천당폭포라 하는데,
허긴 극락도 같은 개념일 테니 불교의 동네에서도 천당을 인정하나 보다.
산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들의 소리, 기암괴석의 소리
난 온갖 산의 소리를 듣는다.
[ 선경
천불동에 꽃이 피니
선경(仙景)이 여기로다.
기암(奇岩)에 기암(奇岩)
수성(水聲)에 수성(水聲)
절벽은 하늘 날고 폭포엔 안개 일어
한세상 근심함이 우습구나. 천불동에서 석천 흥만]
강풍에 모자가 날아간다.
돌단풍이 나를 향해 웃는다.
에델바이스(솜다리)는 어디에 있을까.
솜다리를 찾는 내 마음을 알아줄까?
돌단풍은 '돌나리'라고도 하며 깊은 산골에 잘 자라고 여러해살이풀이다.
오래간 만에 유유자적하며 천불동을 즐긴다.
공룡 팀보다 3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검은 기암절벽을 보며 너럭바위를 파고든 소(沼)와
코발트빛의 하늘아래 발을 담그고 비상용 양주 한잔을 하니 우리가 바로 선인(仙人)일세.
난 '양폭'이 두 갈래 폭포 또는 이단폭포로 생각했었는데, 천불동 계곡의 대표적인 폭포로
왼쪽 골짜기의 음폭 골에 있는 음폭포와 이웃하여 양(陽)폭포로 불린다고 한다.
깊은 소(沼)에서 용이 금방 승천하려나.
이틀간 그렇게도 많은 비가 왔는데 맑은 물이다.
'칠성골 철다리'도 '병풍교 철 계단'도 아름답기만 하다.
협곡을 휘어감은 철 계단을 내려서니 협곡이 터지면서 만경대 기암절벽이 우뚝 솟구쳤다.
대청에서 4.5km 내려왔으니, 비선대까지 3.5km 남았고, 주차장까지는 6.5km 남았다.
기암절벽에 소나무가 뿌리를 깊게 박았다.
귀면암과 양폭 사이에 깎아지른 바위골짜기 사이에 5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며, 장관을
이루는 '오련폭포'인데 나무 등이 워낙 무성해 잘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폭포일대의 암벽이 천불동 계곡의 수문장 같다고 해서 <앞문다지>라고도 하였다.
'눈개승마'가 활짝 피어있다.
조팝나무꽃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싶다.
'산목련(함박꽃)'이 활짝 피어있다.
바위아래 움막을 지어놓고 산짐승처럼 살던 중 물에 휩쓸린 등산객을 구하려다 죽은 설악의
영웅 '약초꾼 유만석'의 전설을 간직한 귀면암이다.
바위 모습이 귀신의 얼굴 같다하여, 귀면암이며 화강암의 바위 결이 여러 방향으로 발달했다.
천화대에 놀러온 선녀들이 귀신이 무서워 신선한테 부탁하여 귀신의 얼굴을 만들었더니, 귀신이
접근을 못하였다는 전설도 있는 귀면암을 지난다.
던져준 빵 부스러기를 다람쥐가 경계심 없이 맛있게 먹는다.
이 글을 쓰며 뉴스를 들으니 박영석 대장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에 성공하였다.
참으로 장하고 진정한 애국자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여의도의 쓰레기보다 못한 299놈보다도, 민주로 위장하고 죽창 휘두르며 촛불 드는 수많은
놈들 다 합쳐도 박 대장 하나만 못하다.
7.5km를 왔으니 '비선대'까지 아직도 1km 남았다.
금강굴의 철 계단이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몇 해 전 비 오는 날 철 계단 난간을 잡고 벌벌 떨며 올라가던 생각이 난다.
'금강굴'은 미륵봉(일명 장군봉)에 있으며,
1,300여 년 전 원효대사가 수행기도 하였다고 하여 대사의 대표작 '금강삼매경론'의 머리 글자를
땄다고 한다.
그 옛날 철 계단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올라갔을까?
비선대에 들어선다.
비선대 오른쪽에 4명이 붙어 암벽등반을 즐기고 있다.
와선대에 누워서 주변경관을 감상하던 마고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서 비선대라 하는데,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이 보인다.
바위에 깊게 뿌리박은 저 소나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함박꽃이 활짝 피었고,
홍두깨 방망이를 만들던 박달나무도 보인다.
쭉쭉 뻗은 금강송에
쪽동백, 서어나무, 개회나무, 노린재나무, 사람주나무가 보이며,
가을에 팥 같은 열매가 열려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는 팥배나무도 보인다.
바로 위에 신흥사가 있는데도 서낭당 같은 돌무덤이 있으니 인간의 욕심은 어디가 한계일까?
살아있는 자체가 천국이거늘 무엇을 더 원하는 걸까.
황금빛이 퇴색한 금불상이 존엄하게 앉아있다.
처음엔 황금빛으로 번쩍거려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세월이 흘러 퇴색하니,
오히려 친근감이 간다.
에고! 다왔네.
오늘 등산로에 대해 복기를 한다.
권금성 케이블카가 한가롭게 올라가고,
불두화가 활짝 피어 아름답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울산바위가 무심하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
탕수육과 이과도주 한잔에 피로도 잊은 채 해단식을 한다.
2009 5. 20.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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