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27.
무엇이 그리 바빴던지, 이성산성이 지척에 있는데도 이제야 올라간다.
임금이 계셨던 황성이었어도 그랬을까?
생태교육 사부에게 화류계 생활 40여 년을 보내다 이제야 찾게 되었노라 고백한다.
안내팻말을 수시로 보면서도 무심했던 그 세월이 왜 그리 길었던 걸까.
권불십년 인생무상(權不十年 人生無常)이라!
자살이라는 비보의 충격 속에 비를 맞으며 검단산 산행 중 마음이 뻥 뚫려 아무말도 못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돌을 던진 자로서 깊은 가책과 함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이젠 조용한 세상에서 모든 근심과 걱정과 모멸감 없이 영면하시리라.
가득한 것 보다는 어딘가 좀 엉성한 구석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완벽하게 잘생긴 완소남 보다는 조금 못 생긴 사람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조금은 덜 채우더라도, 조금 밑져도 어리숙하고, 어딘가에 빈구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세상에서 살다보면 손해 볼 때도 있는 것이 인생의 이치일 텐데 성급하게 세상을 떠났다.
태조 왕건의 드라마에서 궁예(김영철 분)가 태조 왕건(최수종 분)앞에서 죽을 때,
<무엇이 그리 급해 이리도 서둘렀던가 죽으면 다 끝인 것을~>독백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초입에 안내판이 있다.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어도 산성의 기분은 못 느낀다.
손으로 비비면 애기 똥냄새가 난다는 애기똥풀이 노랗게 피었고,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이 나온다.
조그만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는 2차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산성내 자연계곡 아래쪽을 막았고,
2차는 1차를 준설한 후 4면에 석축으로 만들었다.
석축은 50x20x30cm의 돌로 5cm가량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외벽을 '옥수수알'모양인
포곡식으로 예쁘게 축성하였다.
그 속에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된 또 다른 성벽이 있다하며 배수로도 잘 남았다.
이 산성은 백제 때 처음 축조한 이후 고구려, 신라가 보축하여 사용하였다 한다.
배수로에 '쌍살벌집'이 있다.
쏘일까 겁이 나 얼른 사진을 찍는다.
이 벌은 전 세계에 분포하는 16mm 길이의 '호리허리벌류'로 말벌과이다.
오렌지색 촉각 및 날개와 발목마디를 가지며 쏘이면 통증이 있으나, 다른 말벌에 비하면
독성이 약하다는데, 난 쏘이면 입조심 안했다고 망신당할 것 같아서 조심한다.
그 옛날 설악산 신흥사에서 입을 잘못 놀려 쏘인 이후엔 벌만 보면 입부터 다문다.
뱀딸기가 예쁜 여인의 입술처럼 빨갛게 익었다.
저수지아래 잡초 속에 '붓꽃'이 초연하게 자태를 뽐낸다.
'땅비싸리꽃'도 보이며,
'지느러미 엉겅퀴'도 예쁘게 피었다.
옆에 죽단화, 개복숭아, 노린재나무도 보이며, 한때 혈압 당뇨에 좋다고 이름 날렸던
'돼지감자'도 지천이다.
올챙이가 몰려 있는 이유는 크게 보여 잡혀 먹이지 않으려는 생존의 본능이라고 사부는
설명해준다.
다년생 풀인 호장근(虎杖根)이 보이는데, 이성산성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며 1m 정도 자라며,
속이 비어 있고, 한방에선 뿌리를 통경제, 이뇨제로 사용하며,민간에서는 진정제로 사용하고
어린잎은 나물로 먹기도 한다.
이 꽃이 진짜 '씀바귀'라는 설명을 들으며,
올라가니 정상부의 '12각지 건물터'가 나온다.
'장방형 건물지'도 나온다.
32.02mx7.88m로 약 76.5평인 이 건물의 장축방향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정북에서 약60도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초석의 면을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기둥이 놓이고, 윗면만 약간 다듬어 투박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던 누각형 건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9각 건물지'는 장방형 건물지에서 4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출입구나 난방시설은 없다.
9라는 숫자는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숫자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천단(天壇)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9각 건물과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이 8각 건물은 8이 땅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된다.
백제시조 온조왕과 그의 어머니가 있었던 산으로 이성산(二聖山)이라고 하는데,
이성산성은 '예성산성'이라고도 한다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209.8m)에 위치한 백제시대 산성으로 성벽의 높이가 5~6m, 둘레가
약 2km이며, 넓이는 약160,361평방미터로 48,509평 정도가 된다.
주변엔 약 5km거리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남한산성이 있다.
한강의 주변지역이 한눈에 관측되어 주변의 평야지역과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이다.
한양대 발굴조사단에 의하면 백제유물은 별로 없고, 신라유물로서 608년으로 추정되는
목간(木簡 무진년 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이 나왔고, 자(尺), 철제농기구, 무기, 벼루 등이
나왔다고 해,
신라가 통일시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신주를 설치하였다는 가능성도 제기한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근래의 많은 학자들은 이성산성과 춘궁동을 백제의 도읍지로 비정
하였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것이었으니 말 없는 이성산성은 어떤 우매한 인간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예봉산 율리봉, 검단산, 객산이 조망되는데 제일 가까이 보이는 '객산'은 백제시대의 토성이라 하니
많은 관심이 간다.
백제시대 궁궐이 있었다는 '궁안지' 등 춘궁동은 궁안, 궁지가 있었다는 춘장, 규율을 관장하던
법동의 버구리, 산성의 입구를 의미하는 선상동, 많은 길이 교차하던 행기리등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백제가 숨 쉬는 땅이다.
또한 1988년 국내 최대의 고려시대 '철불'이 출토되었으니 고려가 같이 숨쉬는 땅이다.
고골저수지 부근의 사적 '제352호 동사지'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신라 황룡사에 버금가는
규모의 절터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의 한강을 장악하면 동쪽으론 멀리 충주, 영월까지, 북쪽으론 춘천, 화천 등 강원도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으니 가히 군사 요충이건만,
지금은 건물터의 주춧돌만 남아 있으니 당시 위정자가 얼마나 실정을 하여 초토화가 되었는지
영화를 누렸던 흔적이 전혀 없다.
씁쓸함을 뒤로하고 내려서는데 옻나무과의 붉나무가 보인다.
약 7m정도 자라는데 봄에는 어린 순을 따 데쳐 먹기도 하나 유독한 성분이 있어 조심하여야 하며,
가을에는 다른 나무보다 먼저 입이 붉고 노랗게 변하여 '붉나무'라 한다.
며칠간 온갖 잡념과 상념 속에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필을 놓았다가 오늘에야 졸필을 든다.
2009. 5. 27.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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