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느림의 미학 64 이 산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정선 가리왕산<1,561m>

김흥만 2017. 3. 22. 11:21


2009.  6.  9. 10시

 <아이도 採微가고 松林이 비었세라,

  헤친 碁局은 뉘라서 주워오리

  취하여 松根을 지혔으니 날새는 줄 몰라라.>

송강 '정철선생'의 시가 들머리에 있으니 이 산은 '정철선생'과 특별한 인연일까?

 

산의 높이만 따지면 우리나라 남한지역의 9위권이다.

한라1950m, 지리1915m, 설악1708m, 덕유1614m, 계방1577m, 함백1573m, 태백1567m,

오대1563m 다음으로 가리왕산이 1561m이니 하늘과 땅을 감싸 안은 큰 어머니의 산이다.

 

동해안에 있던 옛 부족국가 맥국의 갈왕이 피신해 숨어 있던 산이라 해서 갈왕산이라 하다가

나중에 가리왕산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밑에서 보니 그 큰 덩치로 보아 볏단이나 나무를

크게 쌓은 '가리' 형태의 '가리왕산'이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깎아 내리고 부정하기 위해 가리왕(王)산을 가리왕(旺)산으로

즉 日+王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왕(旺)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후 '王'으로 다시 바꾸었으나 지도와 정상석에선 아직도 성할 왕(旺)을 쓰고 있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인王산'을 인旺산으로, '토王성'을 토旺성으로,' 계룡산 천왕봉'을 천皇봉으로,'속리산

천왕봉'을 천皇봉으로, '월출산 천왕봉'을 천皇봉으로,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등등

일본의 창씨개명 만행이 사람뿐만 아니라 산과 지명에도 영향을 지대하게 끼쳤으니 

참으로 죽일 놈들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거북 구(龜)자를 아홉 구(九)자로, 닭 계(鷄)를 시내 계(溪), 풍성할 풍(豊)을 바람 풍(風)으로

고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니 하루 빨리 지명을 정상화 시켜야겠다.

 

휴양림 숙소에서] 짐을 정리한 후 함박꽃이 활짝 핀 마당을 들머리로 하여 '어은골'로 들어선다.

 

이 '어은골'은 6.25전쟁 당시 10여 호의 화전민이 살았다고 하며, 군데군데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골 입구에 있는 큰 바위가 수면을 가르며 헤엄치는 이무기 모양을 하고 있어 '이무기 때문에

물고기가 숨어사는 골'이라고 하는데, 

나는 큰 바위를 보지 못하였으니 관찰력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비온 뒤의 숲의 향기, 새소리, 물소리, 산의 소리가 너무 정겹고, 계류의 물은 맑다.

 

1,000일 동안 말을 삼가고 좌선 기도하면 득도 할 수 있다는 수행절지인 '천일굴'이 나온다.

90년대 초에도 30대 젊은 여인이 이곳에서 3년 수도 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에구 힘들어!

고도 420m에서 1,1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하니 만만치 않다.

어은골~마항치~정상인 상봉~중봉~매표소로 이어지는 오늘의 산행은 약 8시간 반 코스이다.


잠시 쉬며 체력을 비축하자.

 

계류를 몇 번 건너 너덜지대를 통과한다.

 

또 계류가 나오고 물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휴! 임도이다.  

3.3km치고 올라오는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이정표엔 이곳에서 정상까지 1.7km에 1시간 40분으로 표기 되었는데 실제로 올라가니 엉터리다.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오고 구름이 흐른다.

정상에서 조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임도를 가로 질러 된비알을 올라간다.

숨을 몰아쉬어도 힘들다.

가리왕산의 원시림 속에 300년 이상 된 '신갈나무'가 우리를 압도한다.

 

세 명이 감싸 안아도 남으니 둘레가 약 6m 정도이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나무를 안고 있으면 나무의 정기를 받아 이내 평화로워진다.

 

워낙 몸이 빠른 종승이와 힘이 장사인 봉길이는 내 시야에서 이미 사라졌다.

생명의 신비로움이여!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물박달나무'가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세 시간 정도 된비알을 올라왔으니 배가 몹시 고프다.

 

두 해살이 풀이며 '호엽자근이'라고 하는 염주괴불주머니가 예쁘게 피었다.

자르면 불쾌한 냄새가 나며 열매가 염주처럼 생겼다는데 아직 보지를 못했다.

 

맥항과 여러해살이풀이며 어린잎과 줄기는 나물로 먹는 <풀솜대>도 보이며,

 

장미과 관상용으로 높은 산에만 자라는 <눈개승마>도 활짝 피어 군락을 이룬다.

 

멧돼지들이 사방을 파헤쳐 놓았다.

산에서 좋은 뿌리는 이놈들이 다 먹는 것 같다.


고도 1,200m에 '대제학'을 지낸 이의 황폐한 무덤이 나오는데, 이 높은 곳에 묘지를 쓴 사연이

궁금하다.

송강 정철선생과 관련이 있을까.

 

묘지터로는 적당하지 않아 보이는데,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라 괜히 험한 흔적을 남기는구나.

'대제학'의 지위는 조선시대 정2품관으로 학문이 출중하여 국가의 文翰을 총괄하는 지위로서

문과 출신 중 최고의 영예로 지금의 장관급인데 가문이 멸망하였는가 보다.

 

'마항치' 삼거리가 나오고 이제부턴 주능선길이다.

 

이정표엔 이곳에서 정상까지 1km로 되어 있으나 이것도 엉터리이고 실제거리는 2.5km이다.

하산 후 관리 부서에 항의를 하던지 인터넷에서 시정 요구를 하여야겠다.

 

먼저 정상에 다녀온 종승이 바람이 세니 이곳에서 막걸리 한잔과 요기를 하자고 한다.

땀 흘린 후 정상주는 서울 장수막걸리가 최고다.

 

드디어 정상인 상봉(1,561m)이다.

정상은 안개 속에 다 숨어버렸다.

 

구름 속에 바람이 드세다.

산등성이의 나무들은 사면에서 자라는 나무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산기슭의 쭉쭉 뻗은 나무와 달리 이리 저리 뒤틀려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얼마나 모진 바람에 시달렸으면 저토록 괴로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함백산~두타산~오대산을 거치는 백두대간과 높고 낮은 산봉들이 조망되어야 하는데

름 속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고 세찬바람이 하산을 독촉한다.

이끼계곡으로 명성이 자자한 '장구목이골'로 내려서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니

중봉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휴양림까지 5km에 4시간 10분으로 표기되었으나 이것도 제대로 된건지 모르겠다.

 

하산 길에 멋있는 주목 몇 그루가 가리왕산의 운치를 더한다.

 

16;00

곰취는 별로 보이지 않고 원추리나물은 지천이다.

쥐똥나무의 흰 꽃이 참 아름답다.

중봉(1,433m)에서 휴식을 하며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워지니 서둘러야겠다.


온갖 곤충과 생물들이 숨어 살 수 있는 돌탑이 나온다. 

여러 사람에 의해 쌓여진 이 돌탑은 생태계의 보물이 될 것이다.


중봉에서 하산 길은 엄청난 급경사이다.

조심조심!

돌을 밟는 순간 내 몸은 붕 날아 떨어진다.


그렇게도 조심하였건만 허망하기만 하다.

오른팔이 몹시 아프다

떨어지는 순간 많이 울렸던 모양이다.

머리 수술 후 균형추가 약간 무너졌다는 주치의의 말이 떠오른다.

 

임도가 나온다.

매표소까지 1.5km에 40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론 약 3km에 1시간 반이 더 걸린다.

이젠 은근히 심통이 난다.

이 산의 이정표가 거의 다 엉터리이니 말이다.

 

과연 이 산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가리왕산'은 품이 너무나 넓다. 

가도 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산 길이 4시간 가까이 되니 몸과 마음이 지쳐온다.

다들 지겹다고 생각하기에 누가 가리왕산 가자고 했지? 하며 장난을 친다.

 

폐가가 나오고,

장장 7시간 반에 걸친 산행이 끝나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구름은 걷혔고 '중봉'이 보인다.

맑은 계류에서 옷과 신발을 닦은 후,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소주 한잔의 맛을 무엇에 비기랴!

 

별이 쏟아지는걸 봐야 하는데 강풍에 몸을 떨고 이내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한다.

 

2009.  6.  10.  10시

참 오랜만에 보는 제비집이다.

새끼 두 마리가 입을 벌려 먹이를 기다리고 어미는 밖에서 빙빙 돈다.

 

영월로 이동 청령포를 지나 <어라연>으로 들어선다.

 

어라연은 영월 동쪽을 흐르는 동강 상류 12km에 있으며, 영월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계곡을 구불구불 기어가는 사행천이다.

잣봉으로 등산하여 접근하는 방법도 있으나 우리는 비포장 도로로 접근하는데 만만치 않다.

 

                                                 2009.  6.  10.  가리왕산 종주를 마치고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