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9.
[ 칠갑산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적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 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
한잔 술에 취한 가슴을 부여안고 흥얼대던 이 노랫말에는 콩밭 매는 한 많은 아낙네와
이 홀어머니를 두고 울며 시집가는 어린 딸인 두 여인이 등장한다.
화전민의 아내로서 너무 가난해 밥이나 굶지 말라고 어린 딸을 부잣집 민며느리로 보내며
받은 밭떼기에 얽힌 서러운 사연이 어린 구슬픈 노랫가락은 우리 50~60대의 심금을 울리는
국민가요로 불리게 되었다.
두메산골 청양은 1967년 36살의 양창선씨가 국내 제1의 금광에서 낙반사고로 지하 125m에
매몰되었다가 16일 만에 구조되어 알려지게 된 두메산골이다.
그 후 그는 많은 돈을 벌어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비명횡사를 하는데
다시 <콩밭 매는 아낙네~~>란 노래로 '칠갑산'의 '청양'이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청양고추'의 동네를 시속 20~30km로 느릿느릿 달리는 차속에서 아무리 밖을 봐도
고추밭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청양고추는 경북지방의 청송과 영양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추라는데,
엉뚱하게도 이곳 청양이 원산지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해마다 이맘 때 쯤 국민은행동우회에선 전 동우회원을 불러 등산겸 푸짐한 식사를 하는
행사를 하는데 작년 소금강에 이어 오늘은 칠갑산이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출발한 17대의 대형버스는 칠갑산 들머리에 약 600여 명을
내려놓는다.
들머리의 안내판을 확인하는데 워낙 많은 인파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아무 간섭 없이 유유자적 하면서 등산하는 즐거움은 사치가 되었다.
수많은 인파에 묻혀 그저 땅만 보고 천천히 내 딛는다.
한라산에서의 무릎 아픔이 오늘도 내내 날 괴롭힐 것 같다.
한치고개 들머리에 1964~1973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청양지역 참전
유공자를 기린 베트남 참전 기념탑이 보인다.
연평해전 기념식에 총리, 장관이 10여 년 만에 처음 참석한 이 나라인데, 청양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 애국자들이다.
조금 더 가니 대치터널이라는 문이 나온다.
그림은 '고구려 쌍용총'의 말 타고 활 쏘는 모습이다.
이곳은 백제 땅으로 알고 있는데, 고구려 시대의 이 그림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저 앞에 보이는데 인파에 휘둘려 가까히 가지 못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고장에서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제자 임병찬과 함께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이 지급하는
음식물을 거절하고 단식하며 유소(遺疎)를 구술, 임병찬에게 초하여 무능한 임금님께
드리게 한 뒤 굶어 죽은 구한말의 애국지사이다.
왕이 무능하면 곧바로 만백성에게 피해가 오는 건 만고의 진리다.
즉 국가안보가 확고해야 만백성의 안녕이 확보되는데, 몇 해 전 금강산에서 본 기억이
쉽사리 잊어지질 않는다.
불쌍한 북측 사람들, 북측 군인들을 보며 저렇게 사는 것이 공산주의의 참모습일까?
비참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목숨 걸고 공산정권에 대항해 자유와 인권을 찾던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어차피 많은 인파 속에 여유 있는 산행은 포기하고 충혼탑 앞에서 30년을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는 입행동기들과 기념 촬영을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한 청양군 출신 전몰영령들의 호국정신과 나라사랑을 기리며
< 용감했도다. 오오 임들은 청양의 힘인 나라의 기둥이요,
겨레의 참 빛이외다. 굽힐 줄 모르는 정의는
조국애, 민족애, 고향애로 대한 땅 무궁화 꽃 피었도다.>
비(碑)에 새긴 글이 내 마음을 두드린다.
넓은 등산로에 쌓인 낙엽은 무수한 등산화에 밟혀 먼지만 날리고 정상까지 2.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외롭다.
등산로는 거의 평지에 가깝고 벚나무 잎은 다 떨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들과 정담을 나누며 오솔길을 올라간다.
굴참나무 사이로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 보인다.
10여 분 더 오르니 칠갑산 서쪽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자비성(慈悲城)의 이름을 딴
자비정(慈悲停)이 나온다.
자비정이라!
어떤 슬픈 사연을 가진 사람이 머물렀던 정자일까?
사람 자(慈) 슬플 비(悲) 머무를 정(停)자를 쓰니 말이다.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밀리고 밀려서 속도가 나지 않으니 무릎이 아픈 나로선 다행이다.
한 시간여 만에 도착한 정상은 수백 명으로 인산인해를 이뤄 소란스럽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정상을 딛고자 한다.
정상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높은 곳인데 왜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바로 내려가려고 할까?
정상은 광장같이 넓다.
칠갑산(561m 七甲山)은 원래 칠악산(漆岳山)이었는데, 백제시대에 이 산을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불교식인 칠갑산으로 이름을 바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한다.
'七"은 천지만물을 생성한다는 風, 水, 火, 和, 見, 識을 뜻하고 '甲'은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으뜸이 '甲'자이다.
일설로는 금강 상류의 지천을 굽어보는 이 산이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라,
즉, 갑옷(甲)을 입을 장군을 상징하여 '칠갑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청양사람들은 칠갑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 봄의 철쭉, 여름의 울창한 숲,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을 내세워 '충남의 알프스'라고 한다.
근데 어느 명산에나 다 있는 기암괴석은 없고, 정상까지 육산으로 물도 귀하고, 임도가 많아
그냥 수수하고 부담 없어 가족이나 남녀노소가 어울려서 사계절 편안히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이렇게 순한 고장에서 사납고 날카로운 눈매로 언제나 국민과 역사를 우습게 알며, 무섭고
매섭게 몰아치던 이해찬 전 총리가 태어났음은 역사의 아이러니하다.
멀리 '계룡산'이 뿌연 연무 속에 조망되며 백마강은 보이지 않는다.
운장산, 모악산도 보이고,
억새로 유명한 오서산도 조망되고 아스라이 대천 앞바다도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 동료들과 반갑게 포옹을 한다.
20~30년 선배지점장들도 보이니 80이 넘은 나이에도 체력관리들을 잘한 모양이다.
용솟음치던 젊음의 날도 덧없는 인생인 것을
중년, 노년에 맞이하는 가을 앞에는 그저 오늘이 있어 내일이 아름다우리라.
어디로 흘러갈 건지 걱정하지말자.
아쉬움도, 미련도, 그리움으로 간직하자고 한다.
성질 고약하게 굴어 사람대접 못 받던 선배도 보이고, 고매한 인격자로 품위 있게 노년을
맞은 선배도 보인다.
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그 선배를 늘 닮고 싶었지.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목마른 여름날의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냉수 같은 사람이었을까?
몹시 추운 겨울날 따사하게 감싸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힘을 다하여 삶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어제와 오늘을 사랑했을까?
아마도,
남의 잘못을 엄히 꾸짖고 나의 허물은 너그럽게 용서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칠갑산은 명산의 특징도 없고, 그저 시골 한구석에 있는 평범한 산인데 왜 이렇게 유명하나,
노래에 의한 헛소문에 실망했다."고,
말하는 순간에 난 멋지게 공중회전을 하며 넘어진다.
나의 쓸데없는 교만과 자만심에 이 성스러운 진산 칠갑산은 나에게 노여움을 표시한 거다.
왼팔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프고, 오른팔은 까졌지만 다행히 장갑을 낀 손바닥은 다치지 않았다.
줄을 지어 내려오던 수십 명이 이 광경을 보고 웃으니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단풍은 별로 보이지 않고 가을도 거의 하산했으니 얼마 후면 쌀쌀한 바람과 함께 겨울이 오겠지.
한 시간을 내려오니 유서 깊은 장곡사이다.
국보 제58호인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와 제300호인 '미륵불쾌불탱화' 등 2점이 있으며,
한국에서 유일무이하다는 한 절에 '상대웅전' '하대웅전' 등 2개의 대웅전이 있다.
전각 뒤로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수많은 인파들에 점령당한 절의 고즈넉한 풍경은 이미 사라졌다.
일주문을 지나니 꽤 오래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보인다.
수령 200~300년은 된 듯,
느티나무는 낙엽활엽수 중에서 위엄, 아름다움, 오래 사는 것으로 손꼽히는 나무이다,
햇볕이 쪼이는 양엽(陽葉)은 강한 광도에 견딜 수 있고, 그늘 속에 달려있는 음엽(陰葉)은 약한
햇볕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양엽과 음엽이 모여 짙은 그늘을 만들어 나무아래의 기온을 시원하게 해준다.
느릅나무과로서 해발 1,000m이하에서 25m이상 자라며, 전국적으로 33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느티나무에 함유되어 있는 'Cadalene' 약리상분은 우리나라 암 사망률 1위인 폐암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임업연구원에서 시험 연구 및 특허출원 중이라고 한다.
노란 단풍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밑을 은발의 노선배가 걷고 있다.
인생이 어디쯤 왔을까.
가던 길 잠시 멈추고 뒤돌아보지만, 온 길 모르 듯 갈 길도 알 수 없다.
버거웠던 삶의 무게를 하나씩 벗어야 할 기로에 선 나이엔 배낭이 제격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인 것을 언제든 훌훌 털고 대자연을 가까이 해야겠지.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에 분포 되어있다.
가을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에 강하여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원주 문막 '반계리 은행나무'는 800~1000년 정도의 나이로 추정되며 높이 32m 허리둘레가
16m이다.
최고령은 용문사 은행나무이며 경제적 가치가 매우 많은 나무이다.
빙하기를 거쳐 무려 3억 년을 살아 내려왔으며, 일본 나가사끼 원폭투하 시에도, 관동 대지진에도
살아남았으며, 섭씨 610도 이상이 되어야 잎이 마른다고 하는데,
고대 일본에서는 물을 뿜는 나무, 중국에서는 불을 삼키는 나무라고도 하였다.
산소배출량이 다른 나무보다 5~6배 많다고 하며, 대기오염, 중금속, 토양오염까지도 정화 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워낙 많은 인원이라 식당을 분산시켜 소주잔을 나눈다.
"왕년에 내가!"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선배도 보이지만 그냥 측은할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인생이 무척 긴 것으로 생각되나 나이 먹어서는 살아 온 젊은 날이 얼마나 짧았던가를
깨닫는다.
불콰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정을 나눈다.
대천을 지나 어느 이름 모를 강의 습지의 물길이 <S>자를 그린다.
수능과 입시철이다.
죄 없는 산과 계곡에 촛농을 떨어뜨리며, 과일을 썩게 만드는 고사와 기도는 지내지 말고,
이곳에 와 주변청소를 하고, 물고기 밥을 주며 치성을 드리면 S자인 '서울대'는 무난히
들어가리라.
2009. 10. 29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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