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525

느림의 미학 748 개근거지

2023. 5. 20. 11;00 "개근거지"라니? 조정경기장 행사장에서 초등학생 둘이 대화를 나눈다. '개근거지'라는 말은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즉 학교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교를 하여 개근상(皆勤賞)을 받는 학생을 개근거지라 한다는 거다. 형편이 어려워 교외 체험학습이나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빗대서 개근거지라고 놀리는 말을 들으며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한다. 이 대목에서 "나 때는~" 이런 이야기를 쓰면 '라떼노인'이라고 핀잔을 받겠지. 사실 예전 학교나 직장에서 '개근'이라는 의미는 성실의 대명사였다. 담임 선생님이었던 고 정동환 선생님과 다른 은사들께서도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상(賞)의 종류로 우등상, 모범상, 개근상, 정근상 등 여러 상이 있지만 ..

나의 이야기 2023.05.20

느림의 미학 747 생(生)과 사(死)는 종이 한 장 차이

2023. 5. 13. 06;00 바람이 분다. 봄에 부는 새벽바람치곤 이례적(異例的)으로 강풍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컨디션 난조로 어제 청주 큰 형님 팔순잔치에 못 갔는데 오늘도 여전히 몸이 무겁다. 새벽산책을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집을 나선다. 뜰안은 떨어진 나뭇잎들로 엉망이고 바람에 놀란 고양이가 불안한지 처마밑에서 잔뜩 웅크린 자세로 빤히 쳐다본다. 내가 늘 오르는 동산인 황산에 가려면 육교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길을 건너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황당한 광경과 맞닥뜨린다. 소방대원 세 명이 누워있는 사람에게 급히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구급차에 태우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길바닥엔 쓰러졌던 사람의 핏자국이 선명하고, 주인 잃은 물병과 모자가 바..

나의 이야기 2023.05.14

느림의 미학 746 산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

2023. 5. 7. 04;30 가로등이 동시에 꺼지고 암흑의 세상이 밀려왔다. 강풍이 하늘에서 먹구름을 밀어냈고 그 빈자리를 별이 채워 나간다. 스마트폰의 플래시 기능을 켜지 않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빛으로 가득한 밤의 도시에서는 웬만한 별들이 보이지 않는데 인공조명이 일제히 꺼지자, 동쪽하늘에선 '개밥바라기별'이 밝은 빛을 뿜으며 서쪽으로 향하고 국자모양의 '북두칠성'도 선명하게 보인다. 견우성(星)과 직녀성(星) 사이엔 은하수가 넘실거렸는데 조금 남은 도심의 빛 공해로 이들 사이에 있던 은하수는 사라졌다. 서쪽하늘에 조금 남은 먹구름은 달빛을 가렸고 북쪽하늘에서 보이는 별자리들이 나를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지수가 10 이하로 떨어지고 시커먼 밤하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별들이..

나의 이야기 2023.05.07

느림의 미학 745 엄니, 아부지 나 어떡혀!

2023. 4. 29. 05;00 엄니한테 칼국수를 안 먹고 편식한다며 충청도말로 '뒈지게' 혼나다가 잠에서 깨었다. 참고로 충청도에선 어머니, 아버지를 '엄니', '아부지'라 부른다. 꿈이었다. 최근 거의 매일 꿈을 꾸었고, 꾸었던 꿈이 너무도 선명하다. 밤 10시 취침해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자다가 새벽 5시 기상을 했는데 꿈에서 본 엄니, 아부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거다. 요즘들어 엄니, 아부지를 꿈에서 자주 뵌다.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거도 아닌데 왜 그럴까. 잠을 자고 있지만 뇌파가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는 렘수면(Rem 睡眠)이 아마도 남들보다 오래 지속되는 모양이다. 10;00 창밖에 보슬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아내가 말하는데..

나의 이야기 2023.04.29

느림의 미학 743 신세계(new world)

2023. 4. 6. 20;00 윤물무성(潤物無聲)이라, 소리 없이 시작된 봄비는 시간이 흐르자 안개비로 바뀌었다. '는개'보다 작은 알갱이로 흩날리던 빗방울은 잠시 후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면서 가로등불을 희미하게 만든다. 아!~ 저렇게 제법 굵은 빗줄기를 맞으면 벚꽃은 어떻게 되려나. 꽃샘바람과 함께 비를 맞고 있는 벚꽃은 힘없이 땅바닥으로 너부러진다. 응달에서 자라 조금 늦게 핀 목련화도 비바람에 시달려 나풀 거리더니 아래로 곤두박질한다. 긴 낮을 좋아하는 장일(長日) 식물인 개나리, 벚꽃, 사과꽃 등 봄꽃들이 핀지 불과 며칠 만에 속절없이 떨어진다. 꽃의 공백이 길어지려나. 봄꽃이 사라져도 오랜 가뭄 속에 내리는 단비는 목마른 대지와 까맣게 타들어가던 농부의 농심(農心)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려..

나의 이야기 2023.04.08

느림의 미학 742 꽃비

2023. 4. 1. 10;30 밤새 팝콘을 튀겼는가, 아님 하얀 꽃으로 펑펑 축포를 쐈는지 분노가 폭발하듯 세상은 벚꽃 천지가 되었다. 매스컴에서는 벚꽃이 예년보다 열흘에서 보름이상 빨리 피었다고 호들갑을 떤다. 1922년 이후 가장 빨리 피었다니 102년 만인가. 어느새 벚꽃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열량인 즉 적산온도 (積算溫度) 158도를 꽉 채운 모양이다. 개나리는 냉각량이 -90도, 가온량이 128.5도, 진달래는 가온량이 96.1도, 벚꽃은 냉각량이 -100도, 가온량이 158도라고 국가농림기상센터의 '김진희 박사'가 썼던 논문이 생각난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당정섬 벚꽃 터널로 내려선다. 코로나로 짓눌려 살다가 마스크가 해제된 게 불과 며칠 전이라 오늘따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나의 이야기 2023.04.01

느림의 미학 741 미선(尾扇)이는 잠꾸러기

2023.  3.  26.  05;00오늘은 미선(尾扇)이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을까?미세먼지가 심해 이틀간 미선이가 있는 곳에 오르지 않았는데,그곳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설렌다. 아!며칠간 25도를 넘나드는 가온량(加溫量)에 만족했던지 어둠 속에 흰꽃봉오리가 열린 미선나무가 보인다. 작년엔 3월 14일 개화를 하였는데 금년은 3월 26일 피었으니계산상으로는 무려 10일 이상 늦잠을 잔셈이다. 암튼 미선나무는 꽃샘추위가 지나가자 겨울잠에서 깨고 적당한 시기에 꽃을 피웠으니 온도와 일조시간을 인지하는 메커니즘(mechanism)이 제대로 작동한 모양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적외선 모드에선 셔터 스피드가 느려지면서 초점이 맞지를 않아 플래시를 켠다. 한참 미선나무꽃에 집중하는데,새벽운동을 나온 ..

나의 이야기 2023.03.26

느림의 미학 740 꽃샘추위와 사람추위

2023. 3. 13. 05;00 춥다! 비가 그친 후 새벽기온은 영하 4도까지 떨어졌다. 찬 바람이 내 몸을 후벼 파자 입에서 춥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겨울 추위에는 살이 시리지만 봄추위에는 뼈가 시리다'라는 속담이 실감 날 정도로 종아리와 목덜미가 써늘해진다. 어제 한낮의 기온은 영상 24도까지 올라간 초여름 날씨로 공기가 사뭇 부드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몰아치는 찬바람이 기온을 뚝 떨어뜨려 세상을 다시 얼린다. 여기저기에서 꽃 소식이 들리고, 뜰안의 매화도 막 피기 시작 했는데 꽃샘추위가 본격적으로 찾아온 거다. 남한산성의 복수초와 검단산의 노루귀가 꼬물꼬물 올라오고, 개불알꽃, 봄맞이꽃 등 키 작은 봄꽃들이 올망졸망 올라 오는 중인데 갑자기 내린 된서리에 이 꽃들은 얼마나 황망(慌忙) 할..

나의 이야기 2023.03.13

느림의 미학 739 산불

2023. 3. 4. 극심한 가뭄에 의해 건조주의보가 매일 내려진다. 지난 1~2월 중 전국의 산에서 149번이나 산불이 났고, 60% 이상이 남부지역에서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나온다. 며칠 전에는 내가 2010. 9. 17일 올랐고, 퇴계 이황선생이 호를 '청량산인'으로 쓸 정도로 사랑했던 봉화 청량산이 화재로 불탔으며, 어제도 전국의 여기저기 20여 군데에서 산불이 발생하였고, 오늘도 아침부터 산불소식이 뉴스를 장식한다. 양양과 강릉사이에 나는 양강지풍(襄江之風), 양양과 간성사이에 나는 양간지풍(襄杆之風) 등 영동지방의 독특한 기후현상에 의해 큰 산불이 나기도 하지만 통계상 사람들의 실수로 인한 화재가 더 많다는 거다. 도시에서 불이 나면 해당 건물의 물적피해와 인적피해가 발생 하지만 산에서 불이 나..

나의 이야기 2023.03.04

느림의 미학 738 한 줌의 청춘

2023. 2. 28. 며칠 전 풍산역에서 하행선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데 아직은 코로나 시대라 감염에 조심하고자 남이 만진 손잡이를 잡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다. 시선을 앞에 두다가 감탄을 한다. 바로 몇 미터 앞에 생머리를 한 팔등신 미녀가 서있는데, 몸에 착 달라붙은 레깅스를 착용하였기에 늘씬한 자태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풍산역은 주택가에 있는 역이라 이 시간이면 몇 사람만 타고 내리는 한적(閑寂)한 역이다. 이 역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소유한 여인이 타다니, 나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하고 뒷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행히 선글라스를 썼으니 저 여인이 내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 지 불과 10여 초도 지나지 않아 억! 소리도 내..

나의 이야기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