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524

느림의 미학 782 추(醜)한 두 노인의 이야기

2023. 12. 14.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검사결과 오른쪽 귀의 청력이 25db로 돌발성 난청이 온 지 4개월 만에 정상수치로 돌아왔다. 왼쪽은 7db로 여전히 예민하고, 오른쪽 귀는 돌발성 난청이 왔던 날 검사수치가 57db에서 오늘 25db까지 떨어졌으니 스테로이드 치료덕을 단단히 본 모양이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처방약 '기넥신'을 사서 가방에 넣고 전철에 오르니 사람들이 웅성댄다. 한쪽에서 비쩍 마른 노인이 서서 큰소리로 "일본~~ 전쟁, 미군~~ 씨팔"하며 마구 욕을 해대니 정상으로 돌아온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럽고, 한쪽에 서있는 젊은이들이 작은 소리로 욕을 하며 투덜 거리는 걸 보니 은근히 화가 치민다. 제지를 하려고 다가가는데, 아마도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앞쪽에서 전철..

나의 이야기 2023.12.14

느림의 미학 781 삶의 과정(過程)

2023. 12. 08. 08;20 다문화 센터에 출근하여 베란다로 나간다. 화분에 심었던 고추와 가지, 토마토가 말라비틀어지고 축 늘어졌다. 얼마 전 단 며칠이라도 더 살리려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고 물을 조금만 주었는데도 고추 등 채소류의 생명이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수명이 다한 거다. 고추 등 일년초는 자연의 생육성쇠멸(生育盛衰滅) 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다 죽는다. 다른 쪽에 놓인 여러 개의 일일초(日日草)는 아직 살아남아 겨울바람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는 작은 생명 또한 고귀하기에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화분을 옮긴다. 09;00 어느새 12월, 연말이 20여 일 정도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센터에 알바를 다닌 지도 어언(於焉) 3년이 되었고, 그 3년이라는 세월..

나의 이야기 2023.12.10

느림의 미학 777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2023. 11. 12. 08;00 영하 3도까지 떨어진 기온을 타고 부는 고추바람은 방한 복장의 틈새를 노려 몸 안으로 매섭게 파고든다. 아직 11월 중순인데 가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주의 만물을 만든 신(神)인 조화옹(造化翁)에게 달려가 실종신고를 하여야 하나. 통통하게 살이 찐 너구리 한 마리가 종일 볕이 들어 아직도 파란 단풍나무잎이 그대로인 담벼락 뒤로 숨는다. 이곳엔 누가 살았을까. 담벼락은 무엇을 보호했을까. 양택(陽宅)이었을까, 음택(陰宅)이었을까. 앞을 지날 때마다 늘 궁금한 생각이 든다. 예전 산길이 뚜렷하지 않았고, 가로등이 설치되기 전 랜턴을 켜고 이곳을 지날 때는 한여름밤에도 한기(寒氣)를 느꼈었다. 영혼인 지박령(地縛靈)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죽은 장소를 맴도는 듯 몸이 오..

나의 이야기 2023.11.12

느림의 미학 776 자연의 암묵지(暗默知)

2023. 11. 2. 15;00 집 근처에 있는 경정장에 들렸다. 경정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조정경기를 치렀던 곳이고, 지금은 모터보트 경기를 하는 경정장(競艇場)으로 운용 중이다. 호수는 푸른 물이 늘 넘실거리며 평화롭다. 젊은이들이 수시로 조정 연습을 하며 생동감을 보여주고, 주중에는 모터보트가 굉음과 함께 물 위를 질주하며 삶의 역동감(力動感)을 보여주기에 산책을 할 겸 자주 찾는 곳이다. 물가를 벗어나 뒤쪽으로 난 숲길을 걷는다. 개나리가 터널을 이룬 곳에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를 외계에서 온듯한 식물이 소나무 전체를 덮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외래종 '가시박'이 소나무 전체를 감아 고사(枯死)를 시키는 중이다. 관계자들이 가시박 뿌리에서 뻗어 올라온 본줄기 몇 가..

나의 이야기 2023.11.02

느림의 미학 775 얌체족과 스피커족

2023. 10. 23. 05;00 가로등이 외로운 산길을 밤새도록 지켰다. 박무(薄霧) 속에서 한 사람이 작은 발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다가온다. 전형적인 미음완보(微吟緩步)를 하는 그 사람에게 "일찍 나오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은행 영업점 직원은 CS(고객만족 Customer Satisfation)가 체질화되어 있다. 직원은 고객만족을 위하여 친절해야 하고, 친절이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제일 중요한 게 인사다. 나는 수십 년 은행 영업점 생활에서 몸에 밴 CS Training으로 지금도 인사를 잘하는 편이다. 특히 이런 새벽시간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2~3분 정도 차이를 두고 올라오는 '스피커족'에겐 인사를 하지 않고 큰소리로 "에이 시끄럽다..

나의 이야기 2023.10.23

느림의 미학 774 망각(忘却)

2023. 10. 17. 우편함에 편지 한 통이 들어있다. 누가 보냈지? 나한테 올 편지가 없는데? 인터넷 시대인데 웬 편지가 생뚱맞게 왔을까? 발신인을 보니 한 XX로 되어있는데, 개봉을 해보고 나서야 얼마 전 별세한 친구의 아들이 보낸 편지라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별세한 친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구나. 살아있을 때는 늘 안타깝고 궁금해서 관심을 가졌건만 막상 타계를 하자 내 마음속에서 사라졌으니 사람의 인심이란 다 그런건가 자괴심(自傀心)을 느낀다. 어쩌면 이런 경우는 문해피사(文海彼沙)에 나오는 전형적인 노인지반(老人之反)이 아닌가? 예전일은 생생히 기억을 하고 최근일은 깜빡깜빡하니 말이다. 나이를 먹었는지 요즘 들어 지인의 죽음을 자주 대하게 된다. 삶의 행복과 ..

나의 이야기 2023.10.17

느림의 미학 773 호빵맨 가을을 남기고 떠나다.

2023. 10. 8. 05;00 스산한 '건들바람'에 한기를 느낀다. 며칠전만 해도 폭염으로 잠 못 이뤄 지새우던 밤이 이불로 온몸을 덮어야 하는 밤으로 변했다. 9월에서 10월로 달력을 넘기기가 무섭게 백로(白露)가 찾아왔고, 이슬 맞은 풀숲에서 바짓가랑이가 젖기 시작한다. 초가을에 선들선들 부는 바람은 '건들바람'이요, 이렇게 이른 가을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색바람'이라 했지. 가던 길 멈추고 가슴을 열어 '색바람'을 깊이 들이마신다. 갑자기 따끈따끈하게 데운 삼립호빵이 생각난다. 지난겨울 2박스를 보관했는데 냉장고에 삼립호빵이 남아 있으려나. 07;30 냉동칸을 열어보니 송편만 남아있기에 휴대폰으로 호빵을 주문하려다 앱을 멈춘다. 아! 나보다 삼립호빵을 더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지. 유달리 호빵을..

나의 이야기 2023.10.08

느림의 미학 772 징크스(Jinx)

2023. 10. 5. 눈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 독서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고, 주치의가 내린 금주(禁酒) 명령에 좋아하는 막걸리 한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니 사는 게 재미가 없다. 미국에서 잠시 방문차 귀국했던 고교동창은 내가 명필(名筆) 이었다며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릴없이 쓴웃음만 나온다. 그 친구는 내가 1983년 뇌종양 후유증으로 팔이 마비된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기에 내가 썼던 글씨를 떠올리며 칭찬한 건데 불편한 오른팔을 보며 괜히 우울해진다. 글씨를 못쓰고, 책도 볼 수 없으니 눈에 인공눈물을 넣으며 Tv를 켠다. 투생(偸生)에 해당되는 인간들, 시경 상서(相鼠) 편에서 말하는 쥐새끼 같은 정치인들이 나오는 채널을 피해 중국 항저우에서 중계방송하는 아시안 게임을 본다. 예전부터 나에겐..

나의 이야기 202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