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524

느림의 미학 771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2023. 10. 3. 개천절 고 2 때 1968년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라는 그래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칠판에 써가며 경제담당 정재탁 선생님이 열강을 하셨는데, 그 법칙은 8년 후 1976년 이노베이션(Innovation)과 함께 주택은행 입사 시험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16세기 영국 왕실의 재정고문이었던 '그래샴'은 당시 통용되던 은화(銀貨)의 품질을 낮추면 왕실재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은의 순도를 낮춰 통용시킨다. 이는 금본위제하에서 제시된 경제학 이론 중 하나로 시장에서는 질 좋은 양화(良貨)는 본인들이 소장하고 거래 대금은 질 나쁜 악화(惡貨)로 지불하게 되는데 바로 악화가 양화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한 거다. 이후 미국에서 태환지폐의 제도인 ..

나의 이야기 2023.10.03

느림의 미학 770 싸리비

2023. 10. 2. 07;00 참싸리꽃이 피었다. 이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면 싸리비가 되는 거지. 옛날 60년대 초 상산국민학교 운동장에 군용 트럭이 도착하면 군인 아저씨들이 수백 자루의 싸리비를 내려놓았고 각반별로 그 싸리비를 분배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매년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강제로 써야 했고, 비누, 치약 등 생필품을 위문품으로 학교에 제출했는데, 싸리비는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국군장병들이 만들어 보낸 거다. 위문편지는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으로 "국군장병 아저씨에게~"로 시작해서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로 끝난다. 나도 세월이 흘러 군인이 되었고, 1973년 겨울 어느 날 초등학생과 여고생이 보낸 위문편지를 받는다. 그 여고생은 '군인들이 불쌍하다'는 ..

나의 이야기 2023.10.02

느림의 미학 769 가을은 온몸으로 소리를 낸다.

2023. 9. 24. 05;00 소슬(蕭瑟) 바람이 분다. 새벽온도가 18도까지 떨어지고 드러낸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개여울에 조용히 서있던 왜가리가 갑자기 왝왝거리고, 그 소리에 흰뺨검둥오리와 쇠백로가 놀랐는지 날갯짓을 하며 푸드덕 댄다. 숲 속으로 들어가자 밤송이와 도토리의 아람 벌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밤송이는 다소 둔탁한 소리로 딱딱거리고, 도토리는 툭툭 경쾌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물 고인 웅덩이에서 개구리와 맹꽁이가 제법 큰소리를 내며 돌발성 난청으로 치료 중인 내 귀를 호강시킨다. 언제부터인가 교앙(驕昻)스럽게 울어대던 매미가 일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귀뚜라미, 베짱이, 방울벌레, 풀종다리, 쌕쌔기, 풀무치, 여치가 그 빈자리를 메꿨다. 풀벌레 소리는 우는 걸까, 아님 노래..

나의 이야기 2023.09.24

느림의 미학 768 새 친구 '꾸지'를 만나다.

2023. 9. 15. 05;10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아 우화(雨靴)를 꺼내 신고 우산을 챙긴다. 매일 1분씩 늦게 꺼지는 가로등이라 오늘은 5시 48분에 꺼지겠다. 가로등이 꺼지기 전에 목표지점까지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줄기가 조금씩 더 굵어지며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무를 때리는 빗소리와 합쳐 하모니(harmony)를 이룬다. 오늘은 비 형태가 조금 특이하다. 이렇게 산기슭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산자락을 때리는 소나기를 '산돌림'이라 했던가. 우리 조상들은 소낙비 가지고도 여러 의미를 부여하고 멋진 이름을 지었음에 탄복을 한다. 어라 이 나무가 무슨 나무지? 어둠 속에 뽕나무과의 '꾸지나무'가 보인다. 이곳을 숱하게 지나다녔어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

나의 이야기 2023.09.15

느림의 미학 767 거꾸로 보는 숲 속의 세상

2023. 9. 9. 04;30 부엉이가 앞산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소쩍새도 간간히 울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부엉이 소리에 잠이 퍼뜩 달아나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밤중이 한참 지나 여명(黎明)이 가까워지는 시간, 새벽하늘엔 실낱같은 그믐달이 간신히 보이고 그 옆엔 주먹만 한 개밥바라기별이 빛난다. 부엉이가 잠이 들어 고요해진 숲 속, 한구석 '사위질빵' 덩굴 사이로 토종 '박주가리 꽃'이 보인다. 이 아이가 들판에서 자라야 하는데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외래종 '가시박'이라는 놈한테 밀려나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어두운 숲 속은 바람소리 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그 속을 걸으며 잠시 침잠(沈潛)에 빠져든다. 시인들은 바람이 불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숲 속을 평화롭다고 말한..

나의 이야기 2023.09.09

느림의 미학 766 사색(思索)의 거리

2023. 9. 6. 08;00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의 위세에 눌려 안경을 선글라스로 바꾼다. 어라~ 이 녀석이! 새로 핀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담장에서 나를 유혹한다. 붉은 루주를 바른 어느 여인의 입술처럼 요염한 장미꽃을 바라보며 묘한 생각이 든다. 지난 5~6월 담장을 붉게 물들였던 장미가 세월을 착각했는지 울타리 여기저기에 다시 피기 시작하는 거다. 알바를 다닌 지 벌써 2년 하고도 9개월째인가. 집에서 전철 풍산역까지는 608m요, 사무실까지 1,100m 정도를 걸어서 출근한다. 출근시간은 9시이다. 그러나 슬슬 걸어가도 8시 13분경 도착하기에 급할 게 없으니 주변을 살피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4거리엔 깃발을 든 어르신 4명이 학생들과 주민들이 안전하게 횡단보도..

나의 이야기 2023.09.06

느림의 미학 765 환삼의 변신

2023. 9. 2. 05;30 9월이 되자 새벽공기는 사뭇 달라졌다. 19도까지 떨어진 기온은 새벽공기를 제법 쌀쌀하게 만들어 등산용 조끼를 걸치게 한다. 맹위를 떨치던 더위, 물러나지 않는 폭염에 지쳤던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자 폭염은 나한테 '돌발성 난청'이라는 병만 남긴 채 간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매미도 울지 않는 새벽, 거미만 사냥용 그물을 치느라 어둠 속에서 부산하고, 14년 후에나 다시 찾아온다는 슈퍼 블루문이 교교하게 빛난다. 모처럼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가로등 꺼진 어두운 산길에서 내가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스마트폰의 플래시 기능을 켜자 불빛 범위 내에 든 식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환삼덩굴'이 눈에 띈다. 논두렁 밭두렁과 산길에서 칡넝쿨과 함께 무한대로 공..

나의 이야기 2023.09.02

느림의 미학 764 호루라기 부는 날

2023. 8. 31. 인터넷으로 주문한 호루라기 45개가 택배로 도착해 지인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내가 쓸 호루라기는 달랑 2개만 남았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다." '하 수상하다'라는 말에서 '하는 아주, 수상(殊常)은 평소보다 몹시 다르다'라는 의미인데, 내가 조선 인조 때 이조판서 최명길과 대척점에 있었던 예조판서(좌의정) 김상헌의 시조에 나오는 내용 중 '하 수상하다'라는 말을 쓸 줄이야. 우리나라는 치안이 좋은 나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밤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도 겁을 내지 않고 국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안전한 몇몇 나라에 해당이 된다고 했다. 요즘 '묻지 마' 범죄가 기승을 부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 "조심히 들어가, 들어가서 연..

나의 이야기 2023.08.31

느림의 미학 763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2023. 8. 27. 06;00 열대야가 사라진 오늘새벽 모처럼 늦잠을 잤다. 너무 시원해 30분만 더 자고 일어난다는 게 무려 2시간을 더 자고 앞산에 오른다. 지난주 금요일이었지. 약속시간인 오후 1시가 되자 귀한 인연을 이어가는 선배와 옛 동료들이 지하철 강동역 밖으로 나온다. 88년 올림픽을 전후해 주택은행 둔촌동 지점에서 만났으니 무려 35년이 훌쩍 지난 인연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 나이가 35~36살 때였다. 폐쇄적이고 개폼과 권위를 앞세우던 주택은행 인사부 문화가 싫어서 선택한 영업점이 둔촌동 지점이었지. 권위주의로 무장한 본점 참모부서는 체질상 어울리지 않던 나는 고객을 상대하며 직원들과 희비애환(喜悲哀歡)을 같이 할 수 있는 영업점이 은행에 입사한 처음부터 좋았다. 영업을 하며..

나의 이야기 2023.08.27

느림의 미학 762 아! 돌발성 난청이~답은 골든 타임(Golden time)이다.

2023. 8. 2. 10;00~ 8. 14. 24;00 12일간의 병상기록 그날이 8월 2일이었던가. 오전 10시쯤 나는 세상의 소리를 잃었다. 새벽 앞산에 올라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렸고, 알바 센터에서 에어컨을 켰는데도 온몸이 다 젖었다. 조금 힘에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앉는 순간 오른쪽 귀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소리만 들리고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게 뭔 일이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일부로 코를 풀어도 해결되지 않고, 혼돈(混沌)과 고통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14;00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당구장옆 이비인후과에 진료를 신청하고, 청력검사 데이터를 본 원장은 큰 병원으로 빨리 가야 된다며 소견서를 써준다. 늘 다니는 성심병원에서 진료를 ..

나의 이야기 2023.08.19